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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5
▣ 벨사살의 운명-다니엘 5장-
4장과 5장 사이에 20여 년이 흐르고 느부갓네살왕은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그를 계승한 아들은 몇 년간만 통치를 하다가 그의 처남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이 사람도 역시 4년 간을 통치하였으며 전쟁에서 죽었다. 이 두 통치자들은 매우 짧은 기간만 보좌를 차지하였었는데 이들 중에서 두번째 인물은 나보니두스였다. 그는 사실상 느부갓네살의 사위였으며 전대 왕들 중의 한 사람의 과부와 결혼하였다. 나보니두스는 그 당시 바벨론 제국의 왕이었으며, 그의 아들 벨사살은 바벨론 도성의 군주였다. 다니엘이 왜 세번째 통치자였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7, 29절). 5장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동안에 나보니두스왕은 4개월간 메대 바사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왕이 겪은 일을 살펴보자.
1. 잔치를 즐김(1-4절)
이 축제는 위대한 바벨론의 신들 중의 하나를 예배하는 것이었으며 주전 539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고고학자들은 1,000명의 손님들을 대접하기에 충분한 넓은 방이 있는 바벨론의 궁터를 발굴하였다. 이들은 또한 그 벽이 흰 분필과 같은 재료로 덮여 있었던 것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벽에 글씨를 쓴 사건을 설명해 준다. 이 구절들에 나오는 주된 것은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다. 술은 이 세상의 바벨론 “체제“와 언제나 관련이 되어 있다(렘 51:7/계 14:8/계 17:1-5/계 18:3/계 18:13). 왕은 그의 신들에게 축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4절/ 계 9:20) 유대인들의 신을 모욕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왕은 신성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져다가 우상을 섬기며 신을 모욕하는 잔치에 사용하게 하였다(단 1:2). 5장 2절에 나오는 “아버지“라는 단어는 “할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11절과 13절에서도 나온다.
성 안에서 벨사살의 잔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메대 바사의 강력한 군대가 이미 그 성의 문 밖에 와 있었음을 명심하자! 왕은 그 요새가 함락되지 않으리라는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문 밖의 침략자들을 비웃었다. 오늘날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심판이 막 임하려고 하는데 인간들은 결혼을 하며 거짓 신들을 예배하고 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라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은 말한다. 바벨론은 약 10m높이에 26m넓이의 성벽을 가진 강력한 요새였다. 유브라데강이 그 성을 대각선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큰 놋으로 만든 문은 그 성의 출입을 조절하였다. 누가 이같은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들은 함락되었다!
2. 두려움을 나타냄(5-9절)
손님들은 신비한 손이 나타난 것을 즉각적으로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왕은 그들의 반대편 벽면, 그들의 머리 위에 씌어진 글씨를 보았다. 왕이 떨며 무릎을 부딪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손님들에게 참으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술은 이제 그에게 용기를 줄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멧세지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절에는 “왕이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다. 그는 손과 글씨의 뜻을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상, 그는 이것을 설명하는 사람에게는 그 나라의 세번째 지위를 약속하기까지 하였다(참으로 어리석다! 몇 시간만 지나면 벨사살은 살지도, 다스리지도 못할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왕의 “전문가들“은 벽의 글씨를 해석할 수 없었으며 이 일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그가 자기의 할아버지 느부갓네살의 고문이었던 다니엘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나 벨사살은 조심성이 없는 젊은이였으며(이때 35세쯤 되었다) 영적인 문제보다는 권력과 쾌락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이 성이 망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장래를 깨달음(10-29절)
왕의 어머니가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현명한 여인은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왕국에서의 자기의 권력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결혼했던 느부갓네살의 과부인 듯하다. 어찌 되었든지 그녀는 연회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악할 일에 대하여 듣고 왕에게 조언하려고 왔다. “왕이시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말했는데 왕은 그 밤이 새기 전에 죽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다니엘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그가 어떻게 왕의 할아버지에게 조언하였었는가를 말하였다. 다니엘은 이제 노인이 되어 있었으며 공적인 정무에서 “은퇴해“ 있었다. 정부 관리자들의 명예 회원으로서 그는 아마도 그 잔치의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더럽히거나 자기의 간증을 손상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분리된 위치로 말미암아 다니엘은 하나님께 영광을 얻었다(고후 6:14-18).
왕은 다니엘에게 감동을 주려고 하였지만(13-16절) 다니엘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에 비교할 때 왕의 선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사살은 이러한 선물을 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글씨를 해석하기 전에 다니엘은 왕에게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할아버지를 실례로 제시하였다. 그는 왕의 교만과 죄에 대하여 경고하며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맹렬하게 심판하셨음을 상기시켰다. “당신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사악한 삶을 살려고 고집하였으므로, 하나님은 당신에게 심판의 멧세지를 보내셨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다니엘은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는 회개하도록 일 년이란 시간을 주었으나(4:28-33),벨사살이 회개할 기간은 없었다.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이제 그 해석을 들어보자. 그 글은 갈대아어로 되어 있었다! 메네 메네, 데겔, 베레스,(25절에 나오는 우바르신은 베레스의 복수형이며 “우“는 “그리고“라는 뜻의 갈대아어이다). 바벨론에서 미나와 데겔은 서로 다른 무게의 단위들이다. 베레스는 단순히 “나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벨론의 술사들이 벽에 이 단어들이 나타났을 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그 해석을 알게 하셨다. “수를 세었다... 무게를 알았다... 나뉘어졌다!“ 벨사살의 날수가 계산이 되었으며, 때가 찼다. 하나님의 척도로 무게를 달았더니 그는 중량이 모자란 것이 드러났다. 이제 그의 왕국은 메대 바사에 의해 정복당하고 분열될 것이었다. 그 시각에 다리오는 성문에 와 있었던 것을 명심하자!
벨사살은 떨고 두려워하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의 멧세지를 믿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가 회개했거나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를 볼 수 없다. 그는 왕국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나 한듯 자기의 약속을 지켜 다니엘을 세번째 통치자로 삼았다. 왕의 교만, 육욕, 무관심, 자기 만족이 그를 몰락으로 이끌어 갔다.
4. 운명에 직면함(30-31절)
만일 벨사살이 선지자 이사야를 연구하였더라면 바벨론이 어떻게 점령을 당하게 될 것인지 알았을 것이며 누구에 의해 점령당할 것인지도 알았을 것이다. 바사의 정복자 고레스는 메대를 패배시키고 바벨론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었다(사 41:25/사 45:1-4). 그는 운하를 파서 유브라데강의 유로를 변경시킨 뒤에 성문 아래로 자기의 군대를 몰래 들여 보낼 것이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군인들이 땅을 파는 것을 보았지만 성벽을 타고 넘을 언덕을 쌓고 있는 줄로 알았다. 사실은 물줄기를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 성은 왜 모르는 사이에 점령을 당하였던가?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굉장한 종교축제일이었으며 백성들은 방어를 생각하기보다는 쾌락에 빠져 있었다! 적은 연회장으로 곧장 와서 왕을 살해하였다. 우리의 세계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이 쾌락에 열중한 나라에 있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적들이 우리를 점령하게 되기란 쉬울 것이며, 역사는 이러한 일을 반복할 것이다.
메대의 다리오란 누구인가? 이사야는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할 것이며 유대인을 석방할 것이라고 말했었다(사 44:28-45:13/단 1:21/단 10:1). 다리오는 다니엘 6장 1, 6, 9, 25, 28절과 9장 1절, 11장 1절에 “왕“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답은 5장 31절에서의 “나라를 얻었다“는 말에서 발견된다. 그 “얻었다“는 “받았다“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고레스의 군대장관인 다리오는 바사의 왕인 고레스로부터 왕국을 받아 그를 대신하여 바벨론을 통치하였다. 6장 28절에서 우리는 바벨론이 이중의 왕권으로 통치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고레스는 제국의 왕이었으며, 다리오는 바벨론 및 이에 연관된 지역을 통치하였다. 고레스는 위대한 정복자로서 바벨론에 입성하였으며,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그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루어 나갔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칙령을 발표한 사람도 고레스였다(스 1:1-4/사 44:28). 결국, 제국들의 흥망 성쇠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시는 그의 계획의 일부였던 것이다(롬 8:28)!
539년에 바벨론이 멸망한 것은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오는 바벨론(마귀의 세상 제도)이 장차 망하게 될 것에 대한 모습을 예증하는 것이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벽에 나타난 글씨“를 이제는 볼 수 있으나, 눈먼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교만과 쾌락 속에서 계속 지낼 것이다. 주님이 오고 계시며 문에 와 계심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약 5:9)."
단 6:1-9
▣ 사자굴-다니엘 6장-
최근에는 “...의 하루“라는 연속 간행물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런 책들은 어떤 유명한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전형적인 한 날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본 장에서 우리는 메대 바사제국의 총리인 다니엘의 생활 중 하루를 살펴 볼 것이다! 본 장에서 다니엘은 10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는 이제 80대에 들어선 사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연령이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또한 유혹이나 시험에서 보호가 되는 것도 아님을 증명한다. 다니엘은 젊어서부터 믿음과 기도의 사람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여호와께 성실할 수가 있었다. 우리 함께 다니엘과 하루를 보내기로 하자.
1. 헌신의 새벽
국무총리의 하루는 여호와께 기도함으로 시작되었다. 6장 10절에서 우리는 그의 집 꼭대기에 특별한 “기도실“을 두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는 말을 들었다. 시편 55편 17절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여호와와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였는데, 그가 행한 이 일은 좋은 일이다! 원수들이 일어섰고, 다니엘에게는 그의 일생에 있어 직면해야 할 가장 큰 시험 중의 하나가 임박하고 있었다.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경고는 유익한 것이다. 다니엘의 삶에 있어서 기도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하기 위하여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그가 종일토록 주님과 이야기하였다고 확신할수 있다. 하나님이 그를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고 부르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9:23/10:11/10:19). 신약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적용되었다. 다니엘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들“ 중의 하나로 만든 것은 그의 믿음있는 행실과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었다(요 14:21-23). 여호와와 더불어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아브라함과 다윗이 이러한 습관을 가졌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다(창 19:27/시 5:3/막 1:35).
2. 현혹의 아침(6:1-9)
하나님은 다니엘의 충성으로 인하여 그를 높이셨고, 사실상 그는 그 나라의 두번째 통치자였다. 그 땅의 지도자는 총 124명이었는데, 다리오왕과 세 명의 통령(다니엘이 제1통령이었다) 그리고 120명의 제후들이었다. 다리오는 다니엘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서 그를 공식적인 제 2인자가 되도록 계획을 세웠다! 바벨론에서의 다니엘의 승진은 신자가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타협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마 6:33).
물론 122명의 다른 지도자들은 다니엘의 성공에 대하여 그렇게 기뻐하지 못하였다. 그 한 가지를 들자면 그는 외국인으로서 더구나 유대인이었다! 사단은 이미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박해하고 제거하는 데 극단적이었다. 사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의로운 사람들을 싫어한다. 물론 경건한 다니엘은 정직하였으며 나라의 일을 보살피는 데 주의깊었다. 다른 지도자들은 왕의 소유를 훔치고 계산을 틀리게 하여 도둑질을 은폐시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리오론 정부를 재조직하여 손상됨이 없게 해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사악한 자들은 거짓말을 한다. 이들은 다리오왕에게 모든 통령들이 이 계획에 찬성하였다고 말하였으나, 다니엘은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다리오가 자기의 가장 훌륭한 통령과 먼저 논의하지도 않고 칙령에 서명을 했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 역사는 다리오가 아첨에 쉽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다. 그래서 사악한 지도자들은 다니엘을 그들의 권력 아래 둘 수 있다고 본 듯하다. 그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
단 6:10-13
3. 결정의 오후(6:10-13)
다니엘은 새로운 칙령에 대하여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였다. 물론 그의 거룩한 성품과 신령한 행실은 그를 대신하여 이미 결정을 하였다. 그는 여호와를 섬길 것이며 언제나 해 온 대로 여호와께 기도하기로 하였다. 핑계를 대거나 타협할 수도 있었다. 그 한 가지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는데!“라는 변명도 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겼던 노인이었다. 그의 생애의 종말에 처하여 하나의 작은 타협이 그렇게 대단한 손상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이 일은 그의 전체 간증을 파괴할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여호와께 더욱 유용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다니엘은 타협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한 번의 기도 시간을 빠뜨리기보다는 사자들에게 먹히려고 할 것이었다!
그의 적들은 다니엘이 언제나 창문이 열려 있는 기도실로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들은 다니엘이 손을 드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마음에 평화가 있었다. 기도하며 감사를 드리고 간구하였다. 이 기도의 방식은 그가 10대였을 때부터 해 온 것이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영적인 습관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단 6:14-1
4. 실망의 석양(6:14-17)
왕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도 메대바사의 법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또한 하나님은 다리오가 다니엘을 구하게 하고 싶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특권이었다. 다니엘도 왕에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다(시 146:1-6). 그는 오래 전에 이미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사자의 굴에 들어가지 않도록 구하려 하심이 아니라, 사자굴 밖으로 구원하려 하셨다.
단 6:18-23
5. 구원의 밤(6:18-23)
궁전에 있는 다리오와 사자의 굴에 있는 다니엘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다리오는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였으나 다니엘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사자들과 완전한 화평을 누리고 있었다. 다니엘은 전적으로 안전한 장소에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다리오는 적들에 의해 그의 침상에서 살해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리오는 다니엘을 심판에서 구원하려고 전날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으나 그에게는 힘이 없었다. 한편 다니엘은 우주의 하나님께 단순히 말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얻었다. 모든 면으로 볼 때 다니엘은 왕답게 다스리고 있었으며 다리오는 노예였다!
다니엘을 구원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6:23/히 11:33). 그렇게 오랜 동안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에 살면서도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주님과의 일상적인 교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믿음을 가졌으며 충성스러웠다(시 18:17-24).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 성공적인 기도 생활의 기본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가 자기의 말씀을 지키실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타협하라는 많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길은 군중과 더불어 가는 길이라고 여길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위험한 길이다! 진실로 안전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길이다. 다니엘은 왕을 예배하며 왕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잘못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 밖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죽기를 원하였다. 사단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다가오며(벧전 5:8-9) 또한 사람들은 우리를 속이려고 한다(딤후 4: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면 우리를 구해내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위험 가운데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해내시는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의무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그들이 받는 상은 참으로 굉장한 것이다(계 2:10)!
단 6:24-28
6. 파멸의 아침(6:24-28)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혼들은 어린 아이들을 포함하여 전체의 가족을 굶주린 사자에게 던진다는 착상에 저항감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 나라의 법이었으며 이 사악한 사람들이 다니엘에게 적용하려 했던 바로 그 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죄한 자녀들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으나,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은 이와 같다.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닌 자녀들은 어쨌든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이방나라에서 불신앙 가운데 성장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을 옹호하신다.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잠 11:8). 만일 박해를 통과하고 있을때 하나님이 정말 돌보고 계신 것인지 의심이 생기면 시편 37편 1-15절을 읽으라. 그리고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다니엘에게 이러한 경험을 통과하게 하셨는지 알수 있다(25-27절). 이 일은 하나님의 이름에 큰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전서 3장 10-17절을 쓰게 했을 때 그는 아마도 다니엘을 생각했었을 것이다(이 구절들을 읽으라). 그리스도인이 유혹을 정복할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기“를 원했던 바울을 본받게 되기를 빈다(빌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