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도 과학이라지만 올바른 학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절반입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답사의 경험이 늘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터만 덩그러니 남은 쓸쓸한 폐사지를 더 좋아하듯,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깊어질수록 아직 학술적 연구가 미흡하고,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곳을 좋아하게 됩니다. 찾는 이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곳이 사는 곳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큰 행운입니다.
아침 안개가 초여름 햇볕에 걷히기 전 나주 반남면에 널브러진 옛 무덤들을 찾았습니다. 조금은 과장 같지만, 영산강 지류인 삼포천이 활 모양으로 감아 도는 반남면은 '들 반(半), 무덤 반(半)'입니다. 이곳 저곳 구석구석 찾아다니지 않고 자동차 안에서 스치듯 바라만 봐도 족히 십 수 기는 보일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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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기도 생김새도 가지각색인 반남고분군(덕산리고분군)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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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서부원 |
| 반남면의 들판이 나주평야의 중심임을 알겠습니다. 대도시에 인접한 농촌 들녘이면 흔히 보이는 비닐하우스도 이곳엔 거의 없고, 산은커녕 변변한 언덕 하나 없으니 이 묵직한 무덤들만 없다면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일 듯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조선 후기 박지원, 박규수 등의 위대한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한 호남의 명문가인 반남 박씨의 본향입니다. 고려 중기 이후 이 가문이 이곳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비옥한 농토를 기반으로 한 경제력에 기인한 것일 겁니다.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 데에, 또 후백제를 제압하는 데에 크게 공헌한 나주 오씨 등의 세력도 조금만 영역을 넓게 잡는다면 이곳 반남의 너른 들녘을 터전으로 삼았을 겁니다.
수십 기에 달하는 이곳의 옛 무덤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이미 도굴된 채 방치되었거나 몇 기의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금동관 등이 출토된 것들을 살펴보면 대개 당시 인접한 왕국이었던 백제나 신라, 가야, 심지어 왜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른 독창적인 것에서부터, 여러 나라의 문화가 융합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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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 주변 곳곳에 식수를 하는 등 공원처럼 가꾸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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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서부원 |
| 얼마 전에는 '왜(倭)'자가 적힌 와편이 발견되고, 또 이곳을 비롯하여 영산강을 따라 광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양식이 나타나 고대 일본과의 관계를 푸는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웃한 나라들과는 다르면서도 조화로운 문화를 보여준다는 것은 이곳에 탄탄한 경제력과 문화적 자신감을 가진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무덤들 사이에 파묻혀 주위를 둘러보면, 농업이 경제력의 전부였던 시대에 영산강이 만들어 놓은 비옥한 충적지를 배경으로 한 고대 '반남 왕국'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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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자미산성에 오르는 산책로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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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서부원 |
| 골고루 산재해 있는 반남면의 무덤떼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반남면사무소 뒤로 기댄 채 서 있는 자미산이 그곳입니다. 높이가 채 100미터도 되지 않는, 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쑥스러운 '동산'이지만, 너른 반남 들녘 한가운데에 선 원두막과도 같은 곳입니다. 주변이 온통 들판이라 밑에서 올려다보면 제법 우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자 이름인 자미(紫薇)가 백일홍이라는 뜻이니, 배롱나무가 산에 지천이고, 늦여름부터 초가을 사이에 산이 온통 붉은 빛을 띠게 되면 참 아름다울 거라고 상상했건만, 알고 보니 성벽을 뜻하는 우리말인 '잣'과 산을 이르는 '뫼'가 합해져 '잣뫼'가 되었고, 한자음을 빌어 표현하다보니 공교롭게도 자미-곧, 백일홍-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지명에 얽힌 참 재미있는 에피소드라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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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미산 정상 아래 세워진 제단(천지단)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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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서부원 |
| 이곳 반남면의 뒷동산에는 기대했던 배롱나무 숲 대신 흙과 돌이 섞인 채 쌓은 성벽의 흔적이 있습니다. 언제 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성벽으로 인해 산의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니 '자미산성'의 역할과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범상치 않음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산책 삼아 산을 오르면 주위에 시선을 끄는 몇 군데를 만나게 됩니다.
정상인 자미봉에 살짝 못 미쳐 오른 편에 천지단(天地壇)이라는 제단이 조촐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잘 다듬은 제단 돌 위에는 해를 상징하는 큰 동그라미와 네 각 모서리에 달과 별을 새겨 놓았습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상징하는 제단 돌 위에 최근 사람들이 다녀 간 흔적이 있습니다. 제사를 모셨을 그들에게는 이 산이 신과 같은 영험한 존재입니다.
산 정상에는 자미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이 등산로에 살짝 비껴 서 있는데, 그 뒤편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반남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그러고 보면, 적어도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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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미산의 정상, 자미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이 비껴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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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서부원 |
| 정상에 못 미쳐 천지단 앞으로 경사진 곳을 평평하게 다듬어놓은 널찍한 공간이 있습니다. 주춧돌은 보이지 않지만, 큼지막한 건물이 세워져 있었을 법한 터입니다. 예로부터 이곳 반남을 지배했던 세력가들이 똬리를 틀고 앉았던 곳이자, 넓은 들판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 주변 지역으로 통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기능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침 안개가 짙어 뿌옇게 시야를 가렸지만, 산 정상에 서면 맑은 날에는 가깝게는 영암 월출산에서, 멀게는 광주 무등산까지 손에 잡힐 듯 보인다고 합니다. '신기(神氣)'를 품고 있는 자미산에서 이 고장 사람들의 기상을 느껴봅니다. 그것은 흐르는 물소리 들릴 듯 가까운 젖줄 영산강과 고대 강력한 세력을 증거 하는 저 많은 무덤들을 통해서 눈과 가슴에 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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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남에서 함평으로 넘어가는 동강교 아래의 영산강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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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서부원 |
| 아직도 이 고장 사람들은 반남을 소개할 때 '마한고도(馬韓古都)'라고 할 만큼 자긍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산강이 품어 안은 '마한고도'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끌어내 보십시오.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
첫댓글 말만들어도 무서운 무덤이 이사진에나오는 고분은 참 아름답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