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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여주(申汝柱)
[셍졸년] 1502년(연산군 8)~1558년(명종 13) / 향년 56세
조선전기 부여현령, 원주통판, 군자감판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사직(士直). 고조부는 신숙주(申 叔舟)이며, 도관찰사 신면(申㴐)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 신용개(申用漑)이고, 아버지는 장례원판결사 신한(申瀚)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임맹영(任孟瑛)의 딸이다. 부인은 우의정 이명구(李明龜)의 딸이다.
음사로 1534년(중종 29) 성현찰방(省峴察訪)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감찰·부여현령·원주통판(原州通判)·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1558년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가평 군수로 전임되었다.
부임한 지 며칠 뒤 한밤중에 관아에서 불이 났는데, 창황중에도 부조(父祖)의 신주를 꺼내려고 열화 같은 불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미처 나오지 못하여 사망하였다. 이제까지 없었던 지극한 효행으로 인정되어 정표(旌表)되었고, 자손을 특별히 관직에 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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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군수 신공 묘갈명(加平郡守申公墓碣銘) -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가정 무오년(戊午年, 1558, 명종 13) 겨울에 가평(加平) 관아에 화재가 발생하여 군수 신여주(申汝柱) 공이 묘주(廟主)를 꺼내기 위해 화염 속에 뛰어들었다가 끝내 화를 당하고 말았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문을 내려 표창하고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이로 인해 공의 효성이 한 세상에 드러나 아녀자나 어린아이들조차도 공의 효성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효를 모든 행실의 으뜸이라 말하지만,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듯이 하는 이는 진실로 적다. 더구나 목숨을 버리고 위험 속에 뛰어들어 효를 성취한 것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이 떠나고 25년 뒤인 만력 임오년(壬午年, 1582, 선조 15)에 공의 부인 영인 이씨(令人李氏)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5년 뒤 정해년(丁亥年, 1587, 선조 20)에 공의 아들 전 신천 군수(信川郡守) 발(撥)이 내게 청하기를,
“선친의 사적과 행실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묘도에 표석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감히 그대의 비문을 얻어서 꾸민다면 선친은 사후에도 이름이 묻히지 않을 것이며, 선친으로 인해 돌아가신 모친도 이름이 묻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체로 훌륭한 행적을 드러내는 일에는 문장에 능한 자가 따로 있으니 내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더욱 간곡히 청하는 터라 사양할 수 없었다. 행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공의 자는 사직(士直)이다. 그 선조는 저명한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휘 성용(成用)은 고려 중엽에 높은 등급으로 급제하여 관직이 군기감 사에 이르렀다.
이후로 높은 관직에 오르고 명성이 알려진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조 문충공(文忠公) 숙주(叔舟)는 공신(功臣) 중에서 공훈(功勳)이 가장 높았으며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다. 증조 면(㴐)은 함길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성이 함락되자 끝까지 임무를 다하다가 죽었다.
조부 용개(用漑)는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분으로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량과 풍도로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으니, 실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어진 재상이었다. 부친 한(瀚)은 관리 능력과 청렴한 생활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장예원 판결사로 벼슬을 마쳤다. 모친 풍천 임씨(豐川任氏)는 첨지중추부사 임맹영(任孟瑛)의 따님이다.
공은 홍치(弘治) 임술년(壬戌年, 1502, 연산군 8) 2월 20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비범하였는데, 가정에서 배우고 집 밖에 따로 사부를 두지 않았다. 가정 갑오년(甲午年, 1534, 중종 29)에 음서(蔭敍)로 성현 찰방(省峴察訪)에 제수되었다.
무술년(戊戌年, 1538, 중종 33) 여름에 남부 주부(南部主簿)에 제수되고 얼마 뒤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기해년(己亥年, 1539, 중종 34) 봄에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나가서는 자신을 단속하여 공무를 봉행하고, 법을 적용하는 데 오차가 없었다. 이에 아전들은 서리를 맞은 듯이 조심하였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되었다.
계묘년(癸卯年, 1543, 중종 38) 가을에 판결사공의 상을 당해서는 진정으로 슬퍼하면서도 장례 절차에 소홀함이 없었다.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서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집에 가지 않았으며, 전(奠)을 올리는 일은 하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546, 명종 1)에 상복을 벗었다.
정미년(丁未年, 1547, 명종 2) 여름에 또 동부 주부(東部主簿)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감찰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승진하여 충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549, 명종 4) 봄에 원주 통판(原州通判)에 제수되었다.
임자년(壬子年, 1552, 명종 7) 여름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황주 통판(黃州通判)에 다시 제수되었다.
정사년(丁巳年, 1557, 명종 12)에 임기가 만료되어 종인부 전적(宗人府典籍)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으로 승진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558, 명종 13) 봄에 조사(詔使)가 왔을 때 선공감의 사무가 가장 많았다. 선공감 제조로 있던 재신(宰臣)이 공의 재주를 인정하여 임금께 아뢰어 첨정으로 삼았는데, 과연 일처리를 잘하였다. 선공감 첨정을 거쳐 가평 군수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열흘 만에 화를 당하였으니, 공의 향년 겨우 57세였다. 이듬해 기미년(己未年, 1559, 명종 14) 3월 갑자일에 선영이 있는 양주(楊洲) 금촌리(金村里)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명민하고 굳센 기질을 타고 났으며 벼슬살이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결백하였다. 가정에서의 행실도 지극히 순박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동기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먼 친족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공경을 지극히 하였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사당에 고했는데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거른 적이 없었으니, 평소 생활 속에서 타고난 극진한 효성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창졸간에도 자신을 생각지 않고 선조만을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시험 삼아 요행으로 한 일이겠는가.
관직을 맡아서는 신중하게 직무를 봉행하였고, 일을 맡아서는 여유 있게 처리하였으니, 공이 부임했던 고을마다 칭송이 드높아 항상 떠난 뒤에도 공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부인 영인 이씨는 계통이 종실에서 나왔으니, 당해 부수(唐海副守) 이명귀(李明龜)의 따님이자 공정대왕(恭靖大王 정종(定宗))의 5세손이다. 아들을 따라 안산군(安山郡) 관아에 있다가 그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홍치 신유년(1501, 연산군7)에 태어났으니, 춘추 82세였다. 공과 같은 묘역에 장사 지냈는데 묘는 따로 썼다.
영인은 온순하고 자애로우며 친족들에게 은덕을 베풀어 항상 궁핍하게 사는 친족들을 도왔다. 집안을 다스릴 때에도 큰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하녀들이 매질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 군수(郡守 신발(申撥))가 송도 유수를 보좌할 적에 내가 그곳 유수로 있었기에 동료로서 집안끼리 가깝게 지내면서 그 가정의 법도에 대해 익히 들었는데, 지금 행장을 보니 더욱 믿을 만하다.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군수 발(撥)이다. 차남 백(栢)은 임자년(壬子年, 1552, 명종 7)에 진사가 되고, 강릉 참봉(康陵參奉)으로 있다가 영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삼남 괄(栝)은 상서원 부직장을 지냈다. 딸은 의정부 우의정 정지연(鄭芝衍)에게 출가하였다.
군수는 윤의형(尹義衡)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낳았다. 아들 응구(應榘)는 임오년(壬午年, 1582, 선조 15)에 생원이 되었고, 지금 정릉 참봉(靖陵參奉)으로 재직 중이다. 장녀는 이양(李讓)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민우경(閔宇慶)에게 출가하고, 삼녀는 박동열(朴東說)에게 출가하였는데, 세 사위는 모두 사인(士人)이다.
참봉은 현령 신우렴(辛友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다. 장남은 응추(應樞), 차남은 응평(應枰)이다. 장녀는 사인 성몽규(成夢奎)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출가 전이다. 직장은 처음 청송 부사(靑松府使) 권용(權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응규(應槼)와 응송(應松)이다. 뒤에 다시 상원 군수(祥原郡守) 유덕남(柳德男)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내가 군수(郡守 신발(申撥))와 동료로 친분이 두터웠던 만큼 그 사람됨을 잘 아는데, 본성이 어질고 장자의 풍모를 지닌 사람이다. 직장(直長 신괄(申栝))도 내가 익히 잘 아는데 참으로 뜻이 크고 기개 있는 비범한 사람이며, 참봉(參奉 신백(申栢))은 몸을 검속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중대한 명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벼슬살이에서는 모두 조금 뒤처짐이 있는 듯하니, 조물주가 공의 공적에 대해 아직 보답하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옻나무를 심는 자도 세대가 바뀌어야 옻을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덕을 세운 자이겠는가. 어찌 벼슬이 더딘 것만 가지고 의심할 수 있으랴. 공의 사적을 내가 글로 엮어 드러내게 되었으니,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해동에 신씨가 있는데 / 海東有申氏
고령 신씨가 가장 드러났네 / 高靈姓最著
문충공과 문경공이 / 文忠與文景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네 / 丞相至貴倨
대를 이어 우리 공이 / 嗣世嗟惟公
민자건처럼 효성스러웠네 / 孝哉如子騫
끝내 자신을 잊고 불길로 들어가 / 忘身竟蹈難
목숨을 버려 천성을 보존하였지 / 毁魄全其天
큰 편액이 마을을 빛내니 / 巨扁耀門閭
만세토록 자식된 자들을 권면하네 / 萬世勸人子
천지를 지탱할 기둥이니 / 棟梁宇宙間
열렬한 공열 역사에 남으리라 / 烈烈垂信史
부인이 구천을 따르니 / 有媛從九京
그 흙이 검고도 누렇구나 / 厥土玄而黃
영기가 모여 다시 상서를 발하니 / 聚靈更發祥
참으로 군자가 잠든 곳이라네 / 允矣君子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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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加平郡守申公墓碣銘。
嘉靖戊午冬。加平衙廨燬於火。郡守申公汝柱將奉出廟主。直入烈焰中。遂至不救。事聞。命棹楔其門以旌異之。且錄其子孫。由是公之誠孝暴於一世。雖媍孺亦能言之。人亦孰不曰孝爲百行之首。而孺子慕者固寡矣。況捐生赴難。以成就一箇孝者。豈不亦卓絶鮮覯哉。蓋公歿之二十五年所。爲萬曆壬午。公之配令人李氏。以天年下世。後五年丁亥。公之胤子前信川郡守撥請余曰。先公事行。旣焯人耳目。而墓道未克表。敢徼惠子一言以文之。先子死且不朽。以先子而及亡母。亦死且不朽。夫揄揚盛烈。世自有秉筆者。謝非其人而請之逾勤。不獲辭則按狀。公字士直。其先高靈望族。有諱成用。當高麗中葉。登上第。官至軍器監事。是後多大官聞人。高祖文忠公叔舟。勳高盟府。位極上台。曾祖㴐。以咸吉道觀察使値李施愛之難。城陷。握節死。祖考用漑。議政府左議政。諡文景。雅量風度名一世。實己卯賢相。顯考瀚。以吏幹潔廉聞。仕終掌隸院判決事。妣豐川任氏。僉知中樞府事任孟瑛之女。公生以弘治壬戌二月二十日。少穎異不羣。擩染家庭。不煩外傅。嘉靖甲午以任子拜省峴察訪。戊戌夏。主南部簿。俄遷司憲監察。己亥春。出宰扶餘縣。約己奉公。持文法亡害。吏負霜雪而民得衽席。癸卯秋。丁判決公憂。戚不廢易。廬於墓側。竟三年。未嘗一至其家。饋奠必親執。不任僮僕。丙午。服闋。丁未夏。又主東部簿。再除監察。秋。陞拜忠勳都事。己酉春。通判原州。壬子夏。由軍資判官。復通判黃州。丁巳。官滿。授宗人典簿。冬。陞儀賓經歷。戊午春詔使之來。繕工事務叢委。宰臣有提調其司者才公。啓以爲僉正。果一切治辦。由僉正出守加平。到官浹旬而遘稱。得年僅五十七。以明年己未三月甲子。從葬楊州金村里先人之兆乾坐原。公明敏勁特自天。植掛朝籍。餘二十年。始終廉白一日也。內行淳備。事親夔夔。與弟妹友愛甚。敦睦逮於疏族。承祀極其敬。出入必告廟。雖沾醉未嘗廢。蓋其篤孝根於性者有素。故於倉皇之際。知有其先而不知其身。用能視死如歸。此豈嘗試而幸爲者。當官恪謹奉職。遇事游刃有餘。所莅郡邑。皆著聲稱。常有去後思云。令人李氏。系出宗室。唐海副守明龜之女。恭靖大王五世孫也。隨養安山郡衙卒。以其年三月距其生弘治辛酉。春秋八十有二。葬公域異墓。令人婉嫕慈惠。好族施黨。恒濟其窮匱。治於家不聞嗃嗃聲。婢使無見抶者。郡守曾佐松都。余實居守。以同僚有通家之誼。稔聞其內則。今視狀尤信云。有丈夫子三人女子一人。長卽郡守撥。次栢。壬子。進士。以康陵參奉。先令人逝。次栝。尙瑞院副直長。女適議政府右議政鄭芝衍。郡守娶尹義衡之女。生一男三女。男應榘。壬午。生員。今任靖陵參奉。女適李讓。次適閔宇慶。次適朴東說。三壻皆士人。參奉娶縣令辛友廉之女。生二男二女。長應樞。次應枰。女適士人成夢奎。次在室。直長前娶靑松府使權鎔之女。生二男。應榘,應松。後娶祥原郡守柳德男之女。郡守旣與余寮冞相厚。熟其爲人仁心爲質。有長者風。直長余又習之。倜儻固奇士。而參奉飭躬砥行。方有重名。其仕宦俱若少退者然。造物者似未有以報公烈矣。雖然樹漆者。獲用猶易世。況於樹德者乎。奈何獨以緩疑之。夫以公之行義而余得以屬辭比事。可以無愧色也。是爲銘。銘曰。
海東有申氏。高靈姓最著。文忠與文景。丞相至貴倨。嗣世嗟惟公。孝哉如子騫。忘身竟蹈難。毁魄全其天。巨扁耀門閭。萬世勸人子。棟梁宇宙間。烈烈垂信史。有媛從九京。厥土玄而黃。聚靈更發祥。允矣君子藏。<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