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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안(肉眼)과 심안(心眼) >
눈이 대상을 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단순히 표면적 현상을 맨눈으로 보는 육안(肉眼),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심안(心眼)이다.
이 두 관점은 대상을 본다는 행위는 같으나 서로 다른 것을 본다.
그렇다면 육안과 심안은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 어떤 실체가 있어서
우리 눈[目]으로 보는 것을 육안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고,
실체는 없으나 마음[心]으로 무언가를 추리해보는 것을 심안으로 본다고 말한다.
눈앞에 나타나 있는 현상(現象)을 보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이고,
현상은 없으나 이치적으로 따져 무언가 지각(知覺)하는 것이 심안으로 보는 것이다.
즉, 마음의 눈을 심안이라고 한다.
우리가 육안으로 사물을 보듯이 심안으로는 진리를 찾는다.
육안으로 물체의 크기를 재듯이 심안으로 사리를 분별한다.
그런데 육체의 세포가 분열해 두 눈의 사이가 넓어지듯이 무수한 경험과 수행을 통해
안목(眼目)이 확장됨에 따라 심안의 양미간에도 변화가 온다.
이런 변화를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아집과 독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처럼 심안은 육안과 뜻이 상대되는 것이다.
육안은 자기 눈으로 직접 사물을 볼 때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식견(識見) 없이 단순히 표면적인 현상만을 볼 때도 그리 말한다.
이에 비해, 심안은 사물을 주의해 잘 살펴서 그가 가진 의미까지 식별(識別)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사색(思索)하고 사고(思考)하는 능력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해 육안은 단순히 보는 것이고, 심안은 통찰(洞察)과 관계가 깊다.
육안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유심히 보는 것이고,
통찰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 육안(肉眼)으로 대상을 본다함은 대상(사물)이 빛을 발산하고
그 빛이 사람의 눈에 맺히고, 눈에 연결된 시신경(neuron)을 통해 우리의 뇌로 전달돼서
그 대상을 인지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단순히 그 대상의 형(形)과 색(色)을 인지할 뿐이다.
따라서 대상을 육안으로 본다는 것은 볼 수 있는 범위가 지극히 한정된 1차원적인 관찰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심안(心眼)으로 보는 것은 1차원적인 한계를 넘어서 대상의 본질까지 접근하는 통찰법이다.
육안으로 단순히 사물의 형과 색을 분별했다면,
심안으로는 더 깊이 나아가 형과 색을 통해 그 대상이 표출하고 있는 본질적 아름다움이나
의미까지도 본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심미안(審美眼)이 심안의 일종이이다.
심안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을 살펴 분별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겠으나
불가에서는 ‘마음의 눈’이라 해서 아나율(阿那律) 존자의 예를 든다.
아나율 존자의 본명은 아니룻다(Aniruddha)로서, 석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숫도다나 대왕(淨飯王)의 동생인 쑤꼬다나[감로반왕(甘露飯王)]였다.
따라서 아니룻다는 붓다의 사촌 동생이 된다. 아니룻다는 부처님께서 고향인 가비라성을 방문하셨을 때
아난다와 데바닷다를 비롯해 우빨리 등과 함께 출가했다
아니룻다는 본래 출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형인 마하나마가 출가하려고 집안일을 부탁하자,
집안일 하는데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형 대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니 출가 초기에 아니룻다는 마음공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출가동기가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 설법시간에 자주 졸았다.
그래서 부처님으로부터 질책을 듣고 나서 적극적으로 마음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 후 밤낮으로 자지 않고 수행 정진하다가 그만 눈이 멀었다.
그러나 그는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참 지혜의 눈인 천안통(天眼通)을 얻어
붓다 10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 일컬어진다.
말하자면 육안(肉眼)은 잃었지만 심안(心眼)을 얻은 것이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예화가 있다.
먼저 맹인 사진사의 심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집트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세상에서 유일한 맹인 사진사인
나지흐 게르헤스는 육감(肉感)과 마음의 눈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나의 큰 희망입니다. 그리고 카메라 렌즈가 나의 눈입니다.”
우리의 눈은 항상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눈에 띄는 것들은 대부분 일상적인 것이지만 신기한 것, 특이한 것들이
각별히 우리의 눈길을 끌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정녕 우리가 눈을 제대로 뜨기 위해서는 반대로 눈을 감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지흐 게르헤스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세상을 사랑하며 사진을 찍었다.
떠오르는 태양, 꽃의 향기, 어린이의 미소, 이웃의 슬픈 얼굴에 시선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마음의 근시안’이다. 평범한 것을 의미 있게 볼 수 있을 때,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울 것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서화담(徐花潭) 선생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울고 있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화담 선생에게 “저는 나이 다섯에 눈이 멀어 지금 20년이나 됐는데요,
오늘 아침에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환히 보이기에 기뻐 어쩔 줄 몰랐지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길은 여러 갈래고 집들이 비슷비슷해서
제 집을 분별할 수가 없군요.” 하는 것이다.
이에 선생은 “도로 눈을 감으시오. 그러면 곧 당신의 집이 있을 것이오.”라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 맹인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곧장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에 드러나는 색깔과 형상에 정신이 혼란스러워
차라리 맹인으로 돌아가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본분을 지키는 도리임을 깨우치기 위한 비유로
연암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이 일화를 소개했다.
「우리는 왜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할까? 우리가 만나야 하고, 소유해야 하는 것들 가운데 보이는 것은
과연 몇 %나 되는가?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형상과
제 귀에 들려오는 달콤한 말들에만 집착한다.
젊음은 덧없는 시간에 밀려 머지않아 주름이 지고 소멸의 나락에 떨어지련만,
우리 모두는 흡사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착각하고 산다.
달콤한 말이 바람결에 흘러가버리면 배신과 회한의 병균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움켜잡아야 할 구원의 노끈으로 착각한다.
세상의 모든 반목과 대립, 욕망과 집착이 바로 육체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으로부터 연유된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네 삶이 각박하고 힘겹진 않으리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보다 심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이나 세계가
훨씬 넓고 가치 있다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네 삶터가 삭막하진 않으리라.
그러나 우리 이웃들은 육안만을 지닌 채 그렇게 살아왔고,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육안만으로
그렇게들 살아갈 것이다. 육안으로 확인한 사실만 진실인줄 알고 모든 것의 표준으로 착각하면서 세상의 이익을 송두리째 삼키기 위해 혈안(血眼)이 돼 날뛸 것이다.
혈안은 분노와 흥분으로 핏발이 선 눈이다. 인간의 욕망과 배신, 갈등으로 점철된 육체의 눈이다.…
육안뿐인 우리들은 자신들이 진짜 시각 장애인인 줄을 모른다.…
육안은 우리 자신의 내면과 본질을 그르치는 욕망과 탐욕의 창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심안은 우리의 내면을 진리가 숨 쉬는 평화로운 초원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 일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육안만의 우리는 영원한 불구자들일 수밖에 없다.」― 조규익
그런데 불가에는 관견(管見)이란 말이 있다. 자신의 욕망과 관심이라는
좁은 대롱(竹筒)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편견이다.
때문에 사태의 다른 측면은 물론이고, 전체를 보기는 더욱 아득하다.
즉, 중생들에게 세상은 모두 나(我)의 이미지(相)로만 존재한다.
중생은 자기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판단하려 한다.
불교는 이와 같은 세속의 좁은 새장(鳥籠)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올라
거기서 세상을 조견(照見)하라는 ‘조감(鳥瞰)’을 권고한다.
꿈 깨서 꿈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흔히 “근시안적(近視眼的)이다”라든지,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도 있다.
이것들이 모두 관견과 같은 맥락의 말들이다.
깨달음은 사물의 본질을 보는 데서 일어난다,
<종경록(宗鏡錄)>에는 관(觀)하는 지혜가 곧 정념(正念)이라 했다.
관(觀)이란 대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수행에서 '본다' 즉 ‘관(觀)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흔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육안, 즉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육안은 자기 밖에 있는, 자기 자신과 분리돼 있는 형상만 볼 수 있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은 볼 수 없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 보는 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마음으로 본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능엄경>에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대상을 보느냐?"고 하시자,
아난 존자가 “눈이 봅니다”라고 했다. 눈이 있더라도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마음이 본다는 가르침이다.
불가에서 관(觀)한다는 것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의지하지 않고 마음이 바로 대상을 보는 것을 말함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 감각기관을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보고 아는 앎이다.
• 자기 감정, 생각, 영상에 의존해 보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자기 감정, 생각, 영상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 마음의 움직임이 곧 신체의 움직임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게 된다.
• 존재 전체를 본다.
• 생각은 유와 무를 생각하지만 공(무상ㆍ고ㆍ무아)을 보지 못하고 단지 추리할 뿐이다.
그러나 관(觀)은 창조된 적도 없고 만들어질 수도 없으며 어떠한 모습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공(空)을 본다.
궁극에는 관공불이(觀空不二)가 되는 경계에 이르게 한다.
• 의식이 부분에서 전체로 이행된다. 이때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안과 밖이 동시에 전체의식으로 진행된다.
즉, 밖으로 존재 전체를 보면서 안으로 그 본질의 공함에 들어감을 본다.
•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돼, 모든 고통에서 벗어 날수 있다.
• 궁극에는 법신(法身)을 본다.
따라서 관(觀)이야말로 진리를 깨치는 데 직접적이고 유일한 길이다.
번뇌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념(正念)으로 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마경>과 <원각경>에서는 정념으로 관하는 것이 몸과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는 방편이라 했다.
전체를 본다는 말은 곧 대상의 부분을 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덧붙여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좌우와 뒤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눈은 육안이 아니므로 앞뒤 상하 좌우를 걸림 없이 본다.
더구나 존재의 본질, 즉 마음과 형상의 속까지 꿰뚫어 본다.
따라서 하늘의 눈[천안(天眼)]을 얻으면 삼천대천세계를 보는 일이 손바닥을 보듯이 쉽다고 한다.
관찰 대상이 무상ㆍ고ㆍ무아임을 볼 때 비로소 관이라 할 수 있고, 이를 보지 못하는 것은 관이 아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치기 시작하면 지혜의 눈이 생겨서
우주와 그 본질이 물에 뜬 달같이 무상하고 공함을 일시에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눈을 오안(五眼, 산스크리트어 pañca caksūjsi)이라 해서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사물과 이치를 보는 데에 있어서 그 깊이와 폭이 다른 다섯 가지 눈을 말한다.
여기서 눈은 정신적 성취의 중요한 경로와 인식과 이해의 기능으로서의 눈을 뜻하며,
특히 지혜와 관련해서는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의 예에서 보듯,
완벽한 이해를 뜻하는 직관과 인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할 때 눈은 먼저 보고 아는 것이 순서로 돼 있지만,
불교에서는 반대로 먼저 알고 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래서 경에는 알고 보다, 혹은 지견(智見, ñāṇa-dassana, 앎과 봄)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불교에서 말하는 눈은 단순히 보는 눈이 아니라 직관과 인식,
그리고 이해, 깨달음의 도구로서의 눈을 의미한다.
<금강경> 등에서 말하는 오안은 수행 정도에 따라 갖추게 되는 다섯 가지 눈으로 아래와 같다.
① 육안(肉眼) - 인간의 보통 눈, 범부중생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육신에 갖추어져 있는 감각적 눈을 말한다.
육안은 사물의 형태나 빛깔을 구별하고 그것들을 어떤 한계 안에서만 볼 수 있으며,
가까운 것을 보면 먼 것을 못 보고, 앞을 보면 뒤를 못 보고, 밖을 보면 안을 못 보고,
밝은 것을 볼 수 있으되 어두운 곳의 사물은 볼 수 없는,
즉 종이 한 장만 가려도 사물을 바로 보지 못 하는 한계를 지닌 눈이다.
색안(色眼)이라고도 하는데, 진실을 보지 못하는 분별하는 눈이다.
이에 비해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은 분별이 없는 공성(空性)의 눈이다.
② 혜안(慧眼) - 우주 사물의 진리를 인식하는 눈이다.
곧, 만유의 모든 현상이 공(空) · 무상(無相) · 무작(無作) · 무생(無生) · 무멸(無滅)임을 깨달아
모든 집착을 버리고 차별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는 지혜의 눈을 말한다.
무아(無我)를 바탕으로 해서 무상(無常)한 일체 사물의 근본을 꿰뚫어 보는 눈이다.
즉, 사물에는 고정된 실상이란 것이 없이 항상 변화하고 있는,
형상이 없는 것을 보는 지혜의 눈이다.
지혜의 힘으로 우주의 진리를 밝게 꿰뚫어 보는 눈,
집착과 차별, 망집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이다.
우리 인간이 육안으로는 차별의 현상세계밖에 보지 못하지만, 혜안이 열리면
절대 무차별의 진리까지도 볼 수 있다. 형상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
보이지 않는 시공(時空)을 꿰뚫어 보는 눈, 곧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다만 '혜안'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등,
이승(二乘)의 지혜로 얻는 까닭에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 한다고 한다.
③ 천안(天眼) - 천상 세계에 태어나거나 또는 이 세상에서 선정(禪定)을 닦아 얻는 눈으로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사물이나 먼 곳에 있는 것까지도 널리 살펴볼 수 있는 눈을 이름 하는 것으로,
중생들이 미래에 태어나고 죽는 모습까지도 미리 내다볼 수 있다.
즉, 육안으로 봐서 분간하지 못하는 것을 분간해 아는 눈이다.
마음을 비우고, 지혜가 발달하고, 마음의 힘이 충만해지면 천안(天眼)이 생긴다.
④ 법안(法眼) - 법안은 남을 위해 이타행(利他行)을 하는 보살(菩薩)의 눈,
일체법을 하나로 분명하게 비추어 보는 눈, 진리를 꿰뚫어 보는 눈, 우주의 진리를 깨친 눈,
마음속에 법을 가진 사람의 눈이다. 보살은 이 눈(법안)으로
모든 법의 실상을 잘 알고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한다.
법안은 육안ㆍ혜안ㆍ천안을 두루 갖추고, 그 바탕의 근본섭리와 연결고리를 알며,
모든 선과 악, 있고 없는 양극을 초월해서 걸림으로부터 벗어 날 때 비로소 갖추어지는,
모든 현상의 참모습과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까지 두루 아는 보살의 눈이다.
보살이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정법을 유포하기 위해 불법은 물론 삼라만상의 이치에 통달한 지혜의 눈이다.
또한 일체만물이 갖는 특색을 살펴서 내재하는 힘을 끄집어내는 힘이고 자비가 그 바탕이 된다.
혜안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잠겨 있지만, 법안은 사회로 열린 눈이라 하겠다.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의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눈도 법안이라 하겠다.
심안이 확장된 것이 보살의 눈, 즉 법안(法眼)이다.
⑤ 불안(佛眼) - 모든 법의 진실된 참모습(實相)을 꿰뚫어 바로 보는 부처님 지혜의 눈을 말한다.
곧,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시방(十方)세계를 두루 자상하게 밝혀 볼 수 있는 눈이다.
즉, 우주만유를 대자대비심으로 보는 부처의 눈이다. 시간적으로는 과거ㆍ현세ㆍ미래세의 삼세에 걸치고,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바로 환히 볼 수 있는 부처의 눈이다.
이 불안에는 육안ㆍ천안ㆍ혜안ㆍ법안이 동시에 구비돼 있다.
이 불안(佛眼)은 금강삼매에 들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었을 때 성취된다고 한다.
그러니 불안이란 모든 걸 다 아는 눈, 일체종지의 눈을 말한다.
즉, 불안(佛眼)은 모든 일(일체법)을 꿰뚫어 보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불지견(佛知見)을 말한다.
불지견이란 제법(諸法) 실상(實相)의 이치를 깨닫고 비추어 보는 부처님 지혜이다.
그리하여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해야 부처님의 청정한 불안을 얻는다고 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