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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매운맛, 임춘애의 헝그리 정신… 라면 60년이 대한민국 현대사
[아무튼, 주말]
1963년 국내 첫 탄생 라면
전국민과 함께하는 ‘환갑연’
정상혁 기자
입력 2023.04.15. 03:00업데이트 2023.04.15. 14:13
옮겨 온 글
“라면 먹고 갈래?”
이 말에 담긴 구애(求愛)의 속뜻을 모르면, 한국인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넷플릭스 보고 갈래?”(미국)보다 정겹고 “가려운데 좀 긁어줄래?”(홍콩)보다 간접적이며 “새벽에 같이 커피 마실래?”(일본)보다 푸근한 사랑의 대사. 양은 냄비에서 목구멍을 지나 비로소 한국인의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된 라면. 라면만큼 우리를 살 찌운 소울 푸드가 있으랴. 라면을 부숴서 과자로도 먹는 유일한 민족 아니던가.
라면의 생애 주기가 올해로 60갑자 한 바퀴를 돌았다. 라면 전문 사이트 ‘라면 완전 정복’에 따르면, 현재 국내 시판 중인 라면 종류만 555개. 이젠 한국을 넘어 세계까지 살 찌운다. 즉석 면류 수출액은 지난해 처음 1조원(1조1400억원)을 돌파했다. 작년에 해외로 뻗어나간 라면은 26만톤, 면발 길이만 약 1억㎞다. 지구를 2670바퀴나 감을 수 있다. 배고파서, 심심해서, 즐거워서, 먹고살기 위해서, 오늘도 라면을 끓인다. 먹는다. 다음 60갑자를 향하여.
◇라멘 아니고 ‘라면’입니다
국민소득 104달러 시절, 63년생 토끼띠 ‘삼양라면’이 태어났다. 서울 남대문시장에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사람들이 긴 줄을 늘어서던 때였다. 그 가난의 행렬에서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은 일본 출장길에 먹어본 인스턴트 라멘(Ramen)을 떠올렸다. 만들기 쉽고, 국물까지 있다! 가난한 나라의 기업인은 일본 묘조식품을 찾아가 매달리다시피 라면 기술을 배웠다. 정부를 설득해 5만 달러를 지원받아 1961년 묘조식품에서 라면 기계 두 대를 들여왔다. 1963년 9월 15일, 라면 생산이 시작됐다. 중량 100g, 가격은 10원이었다.
시대가 라면을 원했다. 흉작이 이어지며 해마다 쌀 300만~600만석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혼식·분식 장려를 추진했다. 1969년 서울에 ‘종합분식센터’가 들어섰고, 각 도마다 라면과 빵 공장을 1개씩 세우도록 했다. 생산이 늘자 소비도 늘었다. 그해 3월 16일 자 조선일보에서 확인되듯, 신문에서 ‘라면 판매 급증’이라는 구절이 나오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다.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속을 확 풀어주는 한국인의 매운 맛, 라면의 기본 소양이다.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20~60대 성인 5025명을 조사한 결과, 라면이 생각날 때는 ‘출출할 때’(54.87%) ‘술 먹고 나서’(20.44%) ‘스트레스 쌓일 때’(14.03%) 순이었다. 후루룩, 시뻘건 국물이 땀을 쫙 빼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라면은 일본 라멘처럼 닭 육수 기반의 흰 국물이었다. 라면의 진화를 불러온 결정적 순간은 삼양식품 관철동 사장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된다. 1966년 가을이었다.
“대통령이 찾으십니다.” 청와대였다. 곧 박정희 대통령이 전화를 이어받았다.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에 공헌하는 삼양라면을 치하한 뒤, 예상 밖의 제안을 내놓는다. “한국 사람들은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니 라면에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해장을 라면으로 하곤 하던 박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 이 일화는 삼양식품 사사(社史)에 기록돼 있다. 국가가 나서 라면의 본색을 찾은 것이다.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
그 시절 인생 역전 스토리에는 늘 라면이 함께했다. 한국 축구 레전드 차범근은 “대학 다닐 때만해도 라면 먹고 볼을 찼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 야구 레전드 박찬호는 라면 때문에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부는 운동장에서 큰 솥에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다”는 것이다. 배 곯던 체육인에게 라면은 은혜와 같은 에너지원이었다.
163㎝에 43㎏의 깡마른 17세 소녀, 1986년 한국 육상 사상 최초로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에 오른 임춘애 선수는 라면의 상징이다. 부친은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떴고, 모친은 성남 달동네에서 월 15만원으로 노모와 2남2녀를 건사했다. 임춘애는 달렸다. 이를 악물고 가장 먼저 골인했다. 우승 직후 “라면을 즐겨 먹는다”고 임춘애는 말했다. 이것이 ‘인생 드라마’에 과몰입한 어느 기자의 욕심으로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로 와전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춘애는 은퇴 후 용인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해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판매 1위, 딱 세 번 바뀌다
2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달리던 삼양라면이지만, 1989년 ‘우지(牛脂) 파동’이 운명을 바꿨다. 공업용 소기름을 라면에 썼다는 이유로 관계자가 검찰에 구속된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까지 철저한 수사를 촉구할 정도의 대형 스캔들이었다. 삼양은 당시 유통 중이던 100억원어치의 라면을 수거·폐기해야 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13일 후, 식품위생검사 소위원회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이었다. 1997년 대법원 판결도 무죄였으나, 삼양의 시장 점유율은 곤두박질친 뒤였다.
농심이 기회를 잡았다. ‘안성탕면’으로 1987년 판매 1위에 올라 1990년까지 왕좌를 지켰다. 한국인의 혀는 더 뜨거운 것을 원했으니, 그 결과가 1991년부터 1위를 놓치지 않은 ‘신(辛)라면’이다. 우주선에서 먹는 ‘우주 신라면’ 등 별별 파생 상품이 쏟아졌다. ‘신라면’은 농심 신춘호 사장이 지은 이름이다. 단순하고 명료하지만, 표지에 넣을 큼지막한 글자 ‘辛’이 골치였다. 당시 식품위생법은 “식품 상품명 표시는 한글로 해야 하고 외국어를 병기할 때에는 한글보다 크게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 농심은 비합리적인 규정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건의를 받아들여 1988년 법 조항을 개정했다. 라면이 법을 이긴 것이다.
◇라면이 쌀을 위협하다
대한민국 주식(主食)도 변화를 맞이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이후 라면 소비가 쌀 소비를 위협한 것이다. 1998년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99.8㎏을 기록, 처음 100㎏ 이하로 떨어졌다. 반면 그해 국내 라면 매출 실적은 1조966억원으로 전년 대비 16.5% 늘었다. 라면 가격은 변동이 없었으므로, 1인당 라면 소비도 16.5% 증가했다는 게 업계의 추정이다.
이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쌀 소비량은 56.7㎏이었다. 2030년(45.4㎏)에는 이보다 10㎏ 넘게 줄어들 것으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전망했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한국 1인당 라면 소비량은 73개, 전 세계 2위 규모다.
◇편의점에서 융프라우까지
용기(容器)가 생겼다. 1972년 국내 최초 컵라면 ‘삼양 컵라면’이 출시된 것이다. 봉지면보다 비싸 초기에는 인기를 못 끌었다. 삼양은 홍보를 위해 1976년 ‘자동판매기’까지 설치할 정도였다. 후발 주자 농심이 1981년 ‘사발면’을 출시했고, 이듬해 내놓은 ‘육개장 사발면’은 지금도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컵라면은 1990년대 편의점 열풍을 타고 훨훨 날았다. 전체 라면 판매 비중의 40% 수준까지 올라선 컵라면의 기세는 여전히 뜨겁다. 올해 인기 요리사 백종원이 자기 이름으로 승부를 건 ‘백종원 고기 짬뽕 컵라면’은 편의점 CU에서만 한 달 만에 판매량 100만개를 돌파했다. 역대 가장 빠른 속도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융프라우 전망대에서는 1999년부터 신라면 컵라면을 판매하고 있다. 세계 최정상급 고지에 깃발을 꽂은 ‘K푸드’ 성공 신화로 곧잘 소개되곤 한다. 스위스 마터호른 전망대는 2016년부터 오뚜기 ‘진라면’을 판매하고 있다. 간편하지만, 맘 편치 않은 구설의 음식이기도 하다. 2014년 세월호 사고 당시 현장을 찾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의전용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다가 ‘황제 라면’ 논란으로 면직된 것이 대표적 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19세 청년의 가방에는 채 뜯지 못한 컵라면이 들어 있었다. 지난해 5월 추모 현장에는 컵라면이 놓였고 “천천히 먹어”라고 쓴 쪽지가 붙어 있었다.
◇구봉서, 강부자, 소녀시대, BTS
라면 광고는 당대의 스타만 거머쥘 수 있는 영예다. “아우 먼저~ 형님 먼저~”로 유명한 농심 라면 광고는 1975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 구봉서·곽규석 콤비를 섭외해 대박을 터뜨렸다. 국민 음식인 만큼, 정겹고 푸짐한 이미지가 중요했다. 농심의 얼굴은 그 후로 오랫동안 강부자였다. 1981년부터 13년간 내리 활약한 역대 최장수 모델이었다. 199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불가피하게 광고에서 하차했지만 “농심 라면 외에는 사본 적이 없다”는 절개는 변치 않았다.
점차 젊은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2009년 삼양라면의 얼굴은 걸그룹 ‘소녀시대’였다. “10~20대 젊은 층에게 더욱 친근한 친구처럼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2019년 신라면은 스페인 화가 에바 알머슨과 손잡고 가족애를 자극하는 애니메이션 CF를 제작했는데, 이 때 캐치프레이즈는 “오빠 먼저~ 동생 먼저~”로 바뀌었다. 지난해 오뚜기는 주력 상품인 ‘진라면’ 모델로 방탄소년단 멤버 진, 팔도는 ‘틈새라면’ 모델로 국내 최초 가상인간 모델 ‘로지’를 발탁해 어린 입맛을 공략했다.
◇전국 제패 신라면… 경남만 놓쳤다
전국 최강 ‘신라면’이 제패하지 못한 지역이 딱 한 곳 있으니, 바로 경상남도다. 지난해 닐슨IQ코리아 발표 자료에 따르면 신라면이 1위를 놓친 곳은 경남뿐이었고, 이곳 판매 1위는 ‘안성탕면’(9%)이었다. 경남 출신 천하장사 강호동이 가장 애정한다는 안성탕면. 부산에서도 신라면(8.2%)과 안성탕면(7.8%)은 치열한 1·2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식품업계에서는 된장맛을 좋아하는 이 지역 소비자들이 된장을 기반으로 개발한 안성탕면 특유의 구수한 국물을 즐겨 찾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최전방 강원도에는 유일하게 컵라면이 3위권에 포진했다. ‘육개장 사발면’(3위)이다. 군인 정신으로 언제 어디서나 흡입할 수 있는 전투식량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물 없이 세계를 호령하다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는 게 한국인이라지만, 서서히 판도가 바뀌고 있다. 1984년 등장한 ‘팔도 비빔면’과 ‘농심 짜파게티’의 무서운 기세 때문이다. 특히 짜파게티는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적 인지도를 획득했는데, 극중에서 짜파게티·너구리를 섞어 끓이는 ‘짜파구리’ 덕분이다. 이 영화가 2020년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을 휩쓸면서 이제는 짜파게티보다 짜파구리가 더 유명해졌다. 게다가 짜파구리를 끓이려면 최소한 라면 두 봉지를 사야 하는 일타쌍피 효과까지. 기세를 놓칠세라 농심은 유튜브에 짜파구리 조리법을 11개 언어로 소개하는 영상을 올려놨다.
불을 토하는 극도의 매운맛, 2012년 출시된 ‘불닭볶음면’은 괴식(怪食)이다. 동시에 삼양을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해 삼양의 해외 매출은 처음 6000억원을 넘어섰는데, 이 중 80%가 ‘불닭볶음면’에서 나왔다. 동남아시아 시장의 열기를 중심으로 최근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K컬처 확산으로 라면의 인기도 핫해지고 있다”고 했다.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 일본도 홀딱 넘어갔다. 닛신식품이 최근 ‘불닭볶음면’을 그대로 베낀 컵라면을 내놓은 것이다. 바야흐로 라면 강국 한국, 올해 1분기 라면 수출액(2억800만달러)은 사상 최대치였다.
◇'먹방’이 불지른 라면의 진화
한국산 유튜브 트렌드 ‘먹방’(Mukbang)은 라면의 진화를 주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라면 15봉지를 한끼에 해치우는 유튜버 쯔양처럼, 대식가들이 매일같이 라면 먹방 영상을 올리고, 라면에 우유를 섞는 ‘우유 라면’에 이어 우유에 콜라까지 섞는 ‘우유 콜라 라면’에 이르기까지 온갖 변종 레시피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운 라면을 겁없이 먹어치우는 대회 ‘파이어 누들 챌린지’는 라면을 놀이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한 입에 라면, 한 입에 용암…. 고통과 환희가 공존하는 이율배반의 눈물을 흘리며 군침을 자극하는 영상은 지금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 라면 평가 블로거 ‘라멘레이터’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매운 라면 1위는 ‘핵 불닭볶음면 3배 매운맛’이었다. 라멘레이터 측은 “매년 불닭은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며 “맛도 좋고 아주 아주 뜨겁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물론 매일 먹다간 위벽이 다 헐어버릴 것이다. 라면에 대한 일반적 인식도 건강에 안 좋다는 것. 그러나 의외로 라면 마니아 중에는 장수한 사례가 많다. 젊은 시절 장 질환을 앓은 뒤 30년 넘게 세끼 ‘안성탕면’만 먹어 TV에도 나왔던 고(故) 박병구 할아버지는 92세까지 사셨고, 일본 닛신식품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는 컵라면을 발명한 1971년부터 2007년 세상을 뜰 때까지 매일 라면을 먹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당시 그의 나이는 9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