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해당화 필 때(2)
동혁은 조바심이 나리만치나, 영신과 약혼한 남자와의 사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궁금하였다. 아무리 저에게는 가림새 없이 모든 것을 터놓고 말하는 터이지만, 남녀 간의 관계에 들어서면 자연 은휘(꺼리거나 감추어 숨김)하는 일이 있을 것이 의심스럽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남자에게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인이나 붙잡어다 앉혀놓고 심문을 하는 것처럼, 빡빡하게 물어보면 실토를 하지 않을 듯도 해서, 일부러 농담을 하듯 하며 능청스러이 상대자의 속을 떠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영신이가 정말 입을 다물어버려서, 형세가 불리하니까,
“그건 다 웃음읫 말이구요…..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말이지, 그럼 그 사람은 장차 무슨 일을 허구 싶다는 거예요?”
하고 점잖게 묻는다. 그래도 영신은 성적(혼인날 신부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는 일)한 색시처럼 눈을 꼭 내리 감고는, 입을 열려고 들지를 않는다.
“허어, 이거 정말 화가 나셨군요. 그러지 말구 어서 말씀허세요. 달이 저렇게 기울어가는데……”
하고 동혁은 얼더듬으려고(이 말 저 말 뒤섞이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다)든다.
“금융조합에서 한평생 늙을 작정이야 아니겠죠.”
영신은 그제야 조금 풀린다.
“암, 그야 그럴 테지요.”
“돈이 좀 모이면 장변(장에서 꾸는 돈의 이자)이래두 놔서 늘려가지고 잡화상을 하나 내구서, 생활 안정을 얻자는 게 그이의 고작 가는 이상이야요. 돈벌이를 허는 것밖에 우리루선 헐 노릇이 없다는 게, 일테면 그이의 사상이구요.”
“그만허면 짐작허겠세요. 요컨대 어머니께선 그런 착실헌 사람을 데릴 사위처럼 얻어서, 늙으신 몸을 의탁허구, 인젠 딸의 재미를 좀 보시겠다는 게지요?”
“그런 눈치야요.”
동혁은 무엇을 궁리할 때면 으레 하는 버릇으로, 두 눈을 꿈벅꿈벅하고 있다가, 신중한 어조로,
“그럼, 워낙 주의나 이상은 맞지 않드래두, 그 사람헌테 혹시 애정을 느껴보신 적은 있기가 쉬울 듯헌데…..”
하고 가장 중요한 대문을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은, 뻗었던 두 다리를 오그리고 치마를 도사리며,
“어려서버텀 봐오던 사람이니까, 딱 마주치면 무조건허구 반갑긴 해요.”
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그렇지만, 난 누구헌테나 입때까지…..저어 동혁 씨를 만나기 전까지두……”
하고는 저고리 고름을 손가락에다 돌돌 감았다 폈다 한다. 동혁이도 자리를 고쳐 앉더니, 영신의 얼굴을 면구스럽도록 똑바로 들여다보며,
“영신 씨는 어머니를 위해서, 사랑이 없는 남자에게 한평생을 희생해 바칠, 그런 봉건적인 여자는 아니겠지요?”
하니까,
“그런 말씀을 물어보실 필요두 없겠죠.”
하고 영신은 자존심을 상한 듯이 자신 있는 대답을 한다.
“그럼 앞으로 어떡허실 작정이세요?”
“그이허구는 단념허겠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미련은 남겠단 말씀인가요?”
“아아뇨.”
“그러문요?”
“………”
동혁은 영신이가 경솔히 대답하지 못하는 속중을, 약빨리 눈치채지 못할 만치 미욱하지 않았다.
“그럼 내 태도를 보신 뒤에, 좌우간 결단을 하시겠단 말씀이지요?”
동혁이도 자신 있게 다져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의 입에서는 분명히,
“네!”
하고 한마디가 서슴지 않고 떨어졌다.
동혁은 불시에 그 무엇이, 마음속에 뿌듯하도록 꽉 차는 것을 느꼈다. 그 만족감은 물에 불어 오르는 해면처럼, 또는 한정 없이 부풀어 오르는 고무풍선처럼 당장에 터질 듯 터질 듯하다.
동혁은 벌떡 일어섰다. 팔짱을 꽉 끼고 달빛에 뛰노는 바다를 바라다보고 섰노라니, 그 바다의 물결은 커다란 용광로 속에서, 무쇠가 녹은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보인다. 바다 위가 아니라 바로 저의 가슴 한복판에서, 용솟음치는 정열을 눈앞에 보는 듯하였다.
한 십 분 동안이나 동혁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영신의 눈앞에서 조각돌만 탁탁 걷어차면서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다가 사기 단추와 같이 손 집는 데가 반짝거리는 손풍금을 집어 들더니,
“아까, 그 곡조 한 번만 더 타주세요.”
하고 영신의 치마 앞에다 떨어뜨린다.
영신은 마지못해서 풍금을 받아 들면서도,
“얘기를 허다 말구 이건 뭘요?”
하고 뒤설레는 마음을 진정하느라고, 몸 둘 곳을 몰라 하는 동혁을 쳐다 본다.
“글쎄 특청이니, 두 말씀 말구 타주세요.”
이번에는 반쯤 명령하듯 한다. 영신은 그만 청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서 풍금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면서,
“아까 그건요, 되나 안 되나 함부루 타본 건데, 나도 무슨 곡존지 잊어버렸어요.”
하고 고개를 외로 꼬더니,
“왜 우리가 다 아는 훌륭한 곡조가 있지 않어요. 난 어딜 가서든지 동혁씨와 한곡리 생각이 나면, 이 곡조를 탈 테야요.”
말이 끝나자, 영신은 찬찬히 팔을 폈다 오므렸다. 한다. 그 곡조는 시작만 들어도 <애향가>다. 그러나 조기회 때에 부르는 것과는 딴판으로, 느릿느릿하게 타는 그 멜로디는, 가늘게 떨며 그쳤다. 이었다 하는 것이 무엇을 호소하는 듯이 몹시 애련하다. 이 밤만 밝으면 기약 없는 길을 또다시 떠나는, 그 애달픈 이별의 정을, 조그만 악기 속에 가득히 담았다 흩었다 하기 때문인 듯.
허공에 얼굴을 쳐들고 두 둔을 딱 감고 섰던 동혁은, 듣다 못해서,
“그만 집어칩시다!”
하고 외친다. 그래도 얼른 그치지를 않으니까, 와락 달려들어 손풍금을 빼앗더니, 백사장에다 동댕이를 친다. 영신은 어쩐 영문인지를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입을 조금 벌린 채, 동혁의 눈치만 살핀다.
동혁은 술이 몹시 취한 사람처럼 잎을 가누지 못하더니, 그 유착한(몹시 투박하고 크다) 몸이 푹 엎으러지자, 영신의 소담한 손등은 남자의 뜨거운 입김과 축축한 입술을 느꼈다.
영신은 온몸을 달팽이처럼 오므라뜨리고는, 눈을 사르르 내리감고 있다가,
“참 이 바닷가엔 왜 해당화가 없을까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살그머니 손을 빼어내려고 든다. 그러나 그 손끝과 목소리는 함께 떨려 나왔다.
동혁은 두 팔로 영신의 어깨와 허리를 버쩍 끌어안으며,
“해당화는 지금 이 가슴 속에 새빨갛게 피지 않었세요?”
하더니, 불시의 포옹에 벅차서 말도 못하고, 숨만 가쁘게 쉬느라고 들먹들먹 하는 영신의 젖가슴에, 한 아름이나 되는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영신은 생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과,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도록 근지러운 육체의 감촉에, 아찔하게 도취되는 순간, 잠시 제정신을 잃었다.
동혁은 숨결이 차츰차츰 가빠오고, 두든두근하는 심장의 고동까지, 입술이 닿은 손등과 그의 얼굴에 짓눌린 가슴을 통해서 자릿자릿하게 전신에 전파된다.
영신은 조심스러이 손 하나를 빼어, 목사가 세례를 주는 것처럼 부스스하게 일어선 동혁의 머리 위에 얹으며,
“고만 일어나서요. 네?”
하고 달래듯이 가만히 흔들더니,
“나두요, 동혁 씨의 고민을 말씀허지 않어두 잘 알구 있어요. 동혁 씨가 내 맘을 잘 이해해주시는 것처럼 —그러기에 이태 동안이나 그닥지 그리워하던 당신께 제 사정을 하소연허려구 일부러 온 거야요. 이 세상에 다만 한 분인 동지헌테, 제 장래를 의논허려구요…..”
동혁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지독하게 마취를 당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눈물에 어린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영신 씨를 언제까지나 동지로만 사귈 수가 없세요. 그것만으로는 만족헐 수가 없세요!”
하고는, 또다시 그 돌굉이(돌로 만든 공이)같은 팔로 영신의 허리가 끊어져라고 껴안는다.
영신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서, 손에 힘을 주어,
“이러지 마서요. 이렇게 흥분허시면 못써요. 우리 냉정허게시리 얘기를 허십시다.”
하면서, 허리에 휘감긴 동혁의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러고는,
“어쩌면 저 역시두 동지로 교제허는 것만으룬, 만족헐 수가 없는지두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 문제를 백 번 천 번이나 생각해봤는데…..”
“어떻게요?”
동혁은 머리를 숙인 채 매우 조급히 묻는다. 영신은 조금 떨어져 앉아서, 잠시 머릿속을 정돈시킨 뒤에 입을 연다.
“연애를 허는 데 소모허는 정력이나 결혼생활을 허느라구, 또는 개인의 향락을 위해서 허비된느 시간을, 온통 우리 사업에다 바치구 싶어요. 난 내 몸 하나를 농촌사업이나 계몽운동에 아주 희생허려구, 하나님께 맹세까지 헌 몸이니깐요.”
“그러니까 그렇게 굳은 결심을 허구, 실지로 일을 해나가는 사람끼리, 한몸뚱이루 뭉쳐서 힘을 합허면, 곱절이나 되는 효과를 얻지 않겠세요? 백지장두 마주 들면 낫다는데…..영신 씨를 만난 뒤버텀 나는 줄창 그런 생각을 허구 있었는데요. 어느 기회에 나를 다러와 주실 줄을 나 혼자 믿구 있었던 것두 사실이구요.”
“왜 낸들 그만 생각이야 못해봤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교제가 이버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필경은 결혼 문제가 닥쳐오겠죠?”
“그럼 언제꺼정 독신생활을 허실 작정이신가요?”
영신은 그 말대답을 주저하고, 손풍금을 집어 들고 어루만지며,
“이걸 나헌테 선사헌 미스 필링스란 서양 부인은, 미개헌 남의 나라에 와서, 별별 고생을 다 해가면서 우매한 백성을 깨우쳐줄 양으루, 오십이 넘두룩 독신생활을 허구 있어요. 그런 여자의 생활이야말루 거룩하지 않어요, 깨끗허지 않어요?”
“그 사람네와 우리와는 환경이 다르구 처지도 다르지요. 영신 씨가 그런 사람의 본을 떠서 독신생활을 해보겠다는 건, 우리의 현실이 허락지 않는 아름다운 공상에 지나지 못헐 줄 알어요.”
“그러니깐, 남몰래 살이 내리두룩 고민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두 못 허고 저렇게도 헐 수가 없으니깐…..”
“그런 경우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허지 말구, 양단간 결단을 내야만 허지요.”
“그만헌 결단성이 없는 건 아니야요. 그렇지만 난 청석골을 떠날 수가 없어요. 나를 낳어준 고향버덤두 더 정이 들었고요. 나 하나를 무슨 천사처럼이나 알어주는 그 고장 사람들을, 그 천진난만헌 어린이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요!”
“저엉 그러시다면 당분간 내가 청석골 천사헌테 데릴사위로 들어갈까요? 나 역시 이 한곡리에다 뼈를 파묻으려는 사람이지만…..”
하고 시꺼면 눈을 끔쩍끔쩍한다. 영신은,
“호호호, 그건 참 정말 공상인데요.”
하고 동혁의 무릎을 아프지 않게 치며, 별 하늘을 우러러 명랑히 웃었다.
“……….”
“………”
동혁이도 덩달아 웃는 체하다가, 속으로는 갑갑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다시금 벌떡 일어선다. 한참 동안이나 신부리로 바위를 툭툭 걷어차기도 하고, 돌멩이를 집어 팔매도 치면서도,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비장한 결힘을 한 듯이 다시 돌아와 영신의 앞에 가 바싹 다가앉으며, 손가락 셋을 펴 들더니,
“자, 앞으로 삼년만 더!”
하고 부르짖으며 영신의 턱 밑을 치받치듯 한다.
“인제 삼 개년 계획만 더 세우구 노력허면, 피차에 일터가 단단히 잡히겠지요. 후진들헌테 일을 맡겨두 안심이 될 ㅁ나치 기초가 든든히 선 뒤에, 우리는 결혼을 허십시다. 그러구는 될 수 있는 대루 좀 더 공부를 허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허십시다!”
하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영신 씨!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테지요. 네? 꼭 기다려주실 테지요?”
하고 영신의 두 손을 잡고, 으스러지도록 힘을 준다.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래두……이 목숨이 끊…….”
하는데, 별안간 영신의 입술은 말끝을 맺을 자유를 잃었다.
지새려는 봄 밤, 잠 깊이 든 바다의 얼굴을 휩쓰는 쌀쌀한 바람이, 쏴—하고 또 쏴—하고 타는 듯한 두 사람의 가슴에 벅차게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