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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 15코스 성지순례 묵상집
제6차 성지순례 코스 - 마원성지, 진안리, 연풍성지, 감곡성당
박용순 바오로 엮음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천주교 성지 15코스
성지순례 묵상집
제 6차 성지순례 코스
마원성지․진안리․연풍성지․감곡성당
박용순 바오로 엮음
천주님을 섬기는 행복을 알고서
형벌이 두렵다고
천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 오종례 야고보 -
제 6차 오늘코스 : 서울→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IC→마원성지→
최양업신부선종지→연풍성지→감곡성당→서울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성지순례자의 마음자세
1. 기쁜 마음으로 조용히 묵상하면서 성지를 참배한다.
1. 순례도중 다른 사람이 묵상하는데 방해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1. 피정하는 마음으로 성지를 참배하고 즐겁게 미사를 드린다.
1. 성지를 조성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힘껏 돕는다.
1. 진정한 성지 순례를 위해 간단한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1. 성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쑥이나 나물을 채취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박해
을사추조적발 1785년. 신해박해 1791년. 을묘박해 1795년.
신유대박해 1801년. 을해박해 1815년. 기묘박해 1819년.
정해박해 1827년. 계사박해 1833년. 병신박해 1836년.
기해대박해 1839년. 병오대박해1846년. 경신박해 1860년.
병인대박해 1866년. 무진박해 1868년. 신미양요 1871년.
우리나라 방인 사제 명단
첫 번째 신부 金大建 안드레아 1845년 8월 17일
두 번째 신부 崔良業 도마 1849년 12월 3일
세 번째 신부 姜聖參 라우렌시오 1896년 4월 26일
세 번째 신부 姜道永 마르코 1896년 4월 26일
세 번째 신부 鄭圭夏 아우구스티노 1896년 4월 26일
성지순례 전례시작
◉ 성지순례 전례
◉ 103위 한국 성인 호칭 기도
◐ 오늘 순례 할 성지와 관련된 한국 교회사 설명
◉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선종지, 연풍 성지, 감곡성당.
1801년 신유박해로 이승훈, 정약종, 강왕숙, 황사영 등 200명 순교하고 400명 귀양갔다. 동정부부 유중철, 이순이도 이때에 순교하였다.
1839년 1월 18일 대왕대비 김씨가 五家作統法을 발표하여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 기해박해로 불란서 사제 3명 등 70위성인품에 올랐다.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자 김대건 신부 등 9위 성인품에 올랐다.
1866년 9월 30일 프랑스 함대가 한강을 올라와 양화진까지 왔다가 돌아갔고 다음달 10월 15일 강화도를 점령하여 병인대박해가 일어났다.
마원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 등 30여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곳이다. 문경의 한실, 여우목, 문경, 건아기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던 교우촌이다. 천주교 신앙이 전해진지 80여 년 후인 1866년 병인박해가 불어닥쳐 교우 30여명이 상주, 대구, 충주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하였다.
병인박해 때 두 명의 주교와 열 명의 신부 중 세 신부만이 살아 남았다. 특히 박상근 마티아는 출중한 신앙심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깔래 강 신부를 자신의 자기 집에 은신시켰던 그는 1866년 12월 21일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는 문경이다. 최 신부는 무더운 1861년 6월 문경에서 장질부사로 말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시었다. 신부를 모시고 다니던 마부이며 복사인 조화서는 “너무나 불편하신 모양이오니 이 문경읍의 평창 이씨라는 교우 집이 패약(薬局)을 하고 있사오니, 그 집으로 들어가셔서 치료하심이 필요한 줄로 아옵니다. 그 집으로 가십시다.” 하고 간신히 이씨 집으로 들어가 치료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증세가 날로 위중하셨다. 제천 배론에 신 푸르티에 신부께 병보를 알려서 병자 성사를 받고, 1861년 음력 6월 10일에 편안히 선종 하셨다.
연풍성지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가 성인의 고향이다. 연풍은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백화산 등이 험난하여 서울과 경기도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의 교우들이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선 곳이다.
다블뤼 안 주교는 황석두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성서 번역과 사전편찬에 종사토록 했고,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위앵 민 신부, 오메트로 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갈매못에서 참수 당했다.
1979년 20년 간 연풍 공소회장이셨던 봉원균 회장이 평해 황씨 문중 선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했다. 여기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5인의 성인상과 오성바위와 똑같은 바위를 만들어 놓았고 순교 현양비도 건립되었다.
감곡성당은 본당 초대 임 가밀로 신부가 1893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 해 한국에 입국하여 미리내에 잠시 머물며 언어 교육을 받고 부엉골 신학당에 있다가 괴산 충주로 가면서 감곡을 지나다가 동산 밑에 커다란 기와집 한 채를 보았다. 그는 그 터가 성당 터로써 최적지임을 직감했다. 그 집은 민비의 6촌 오빠로써 당시 충주목사로 있던 민응식의 소유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피신했던 곳이며 109칸의 대궐 같은 집이 있었다. 임 신부가 이곳의 성당터의 적지임을 깨닿고 성모님께 기도한 후부터 1년 4개월만에 이 터를 사게된 것이다. 임 가밀로 신부님이 감곡성당을「매괴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1896년 9월 17일 부엉골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여 본당을 건립하였다.
제 6차 코스
마원 박상근 순교자 묘
성지 설명
성지 054-571-5687
회장011-9883-1670
소재지 : 경북 문경군 문경읍 마원1리
해발 1,017m의 문경 새재 고개 근처에는 옛날부터 박해를 피해 산으로 깊숙이 숨어들어야 했던 교우들의 슬픔과 탄식이 서려있는 곳이다.
마원 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 등 30여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지역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여우목, 문경, 건아기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던 교우촌이다. 천주교 신앙이 전해진지 80여년 후인 1866년 병인박해가 마원까지 불어닥쳐 교우 30여명이 상주, 대구, 충주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하였다.
특히 문경 토박이 아전이었던 박상근 순교자는 신유박해 때, 이곳으로 숨어든 충청도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게된 것으로 추측된다. 병인박해 때 두 명의 주교와 열 명의 신부 중 세 신부만이 살아 남았다.
깔래 강 신부의 기록을 보면 배고하산 중턱에 자리잡은 한실에 서너 집씩 신자들이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출중한 신앙심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깔래 강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켰던 박상근은 1866년 12월 21일 순교했다.
그는 깔래 강 신부를 피신시키기 위하여 같이 산으로 피신하여 끝까지 따르려 했으나, 강 신부와 산길에 다니다가 박상근의 발에 상처가 너무 깊고 몸이 허약함을 보고, 돌아가라고 했으나 그는 끝까지 신부님을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상처가 너무 깊어 강 깔래 신부는 박상근에게 순명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신부님 말에 순명하고 헤어졌다. 박상근은 12월에 체포되어 평소에 친분이 있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히 물리치고 순교의 칼을 받았다.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박씨 문중 선산에 치명 일기에 나타난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인 것이 1985년 9월에 확인되었다. 또 여기서 문경새재 제 1관문으로 가다보면 진안리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에 다다른다.
성가 50. 야훼는 나의 목자
안동교구 시복시성 선정 제출자 (1명)
박상근 (마티아).
리델․깔레 신부 입국
說明
리델 이 신부와 깔래 강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려다 두 번이나 실패하고 세 번째 시도에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 조선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이 각각 구역을 맡아 선교 지역을 담당하였다. 이 구역이 조선교회의 제도로써 본당의 역할이 가시화되어 가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번에 묵상할 내용은 홍 랑드르 신부와 오 죠안느 신부가 1859, 1860년에 두 번이나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리델 신부와 강 깔래 신부와 합류하여, 4명의 신부가 드디어 1861년 3월 21일 백령도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321-325)
우리는 지부(芝罘)에서 쉽게 중국 배 한 척을 빌릴 수가 있었습니다. 1861년 3월 19일 우리 포교지의 주보이신 성 요셉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2일 동안 무사히 항해한 뒤 약속 장소인 메린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4일 동안을 기다렸는데, 25일 성모 영보 축일에 조선 배 한 척이 우리 배 앞을 빨리 지나가면서, 선원들이 우리 돛대에 달려 있는 파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발견하고 커다랗게 십자성호를 긋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우리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선창으로 전해 왔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감사의 찬가를 부르고, 배가 밤에 우리를 데리러올 것을 확신하고 서둘러서 간단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우리의 인내심을 단련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룻밤, 이틀 밤, 사흘 밤이 지났는데도 배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배의 중국인 사공들은 불평하며 돌아간다는 말까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배들이 메린도 근처에 하루나 이틀 이상 머무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그것을 어기면 매우 중한 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착한 조선 사람들에게 사고가 발생해서 이처럼 예기치 않게 늦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둘러서 배를 고치며 걱정을 했답니다. 그들의 십자성호는,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달고 있는 우리 배 사람들의 종교를 알게 되어 교형들에게 보내는 인사로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중을 기하느라고 우리 배가 보이는 산꼭대기에 망보는 사람을 세웠고, 그 사람은 계속 십자성호로 반복해서 신호를 했습니다. 그들의 뜻은 좋았지만 좋은 만원 경을 가지고도 우리가 그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손짓을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28일 성체를 세우신 성목요일 날 밤 9시에 그들의 작은 배가 메린도 바위 뒤에 있는 우리 배에 바싹 다가왔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우리 배에 올라 베르뇌 주교님의 편지를 내놓았습니다. 진짜 우리 안내자들이 알아보기로 되어 있는 표시였습니다. 책임자는 서울의 착한 신자로 이미 순교한 김효임(金孝任) 골롬바와 김효주(金孝珠) 아네스 두 동정녀의 오라비였습니다. 그들은 이내 우리를 조선 배에 옮겨 태우고 소리나지 않게 돛을 올린 후 선수를 조선의 수도 쪽으로 돌렸습니다. 우리 4명은 높이 한자 가웃 너비와 길이가 대여섯 자 되는 선실에 숨어서 조선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얼굴 모습을 그렇게 쉽게 변형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줄곧 방안에 서로 포개지다시피 있었고 우리가 들어간 구멍을 짚과 거적 더미로 막고 있었습니다. 때없이 우리 배에 다가오는 외교인 배들이 끊임없이 왕래하기 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어부들은 음악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음악은 통박이나 바가지를 물동이에 띄어 놓고 힘껏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자꾸 반복하는 후렴으로 판단하면 그 노래는 그리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린 고기를 많이 잡을 걸세, 우린 고기를 많이 잡을 걸세. 얼시구 좋다, 얼시구 좋다.”
십여 년 전에 영광스럽게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가 잡혔던 무시무시한 요새를 통과하기 전에 선장이 배에 있는 자리란 자리는 모두 우리가 있는 선실 구멍에 쌓아 놓고 나서 선원들과 함께 묵주의 기도를 드리며 마리아의 힘있는 보호를 믿고 과감하게 전진했습니다. 우리를 소리쳐 불러 세운 관리들은 우리 선원들이 밀수를 할 수 없는 단순한 어부로 인정하고 대수롭지 않은 말로 몇 마디 주고받은 뒤 그들의 초소로 되돌아갔습니다. 우리는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8일간을 항해한 뒤에 서울로 가는 강어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선원 중 한 사람이 뭍에 내려가 산길을 통해 우리의 도착을 베르뇌 주교께 알려 드리려고 달려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사람이 없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곳이 우리가 상륙하기로 되어 있는 장소였습니다. 주교님이 서울에서 보내신 신자 2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백주일 전날 토요일 저녁에 아주 작은 거룻배로 갈아타고 강물을 거슬러 5시간 동안 노를 저어간 후에 뭍에 내렸습니다. 자정이 지났었는데 서울까지 가려면 30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짚신을 신는데, 조선 신발에는 발가락을 들여보내는 구명이 있어 거기에다 솜씨 있게 발가락을 집어넣고,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를 쓰고 안내인들을 따라 갔습니다. 산길은 좁고 가팔라서 나란히 꼬리잡이를 하며 걸었는데, 우리 중 여럿이 배를 죽 깔고 땅에 미끄러졌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안내인들이 길을 잃었습니다. 그때문에 우리는 한층 더 피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많은 위험을 겪은 뒤 새벽 4, 5시경에 어떤 회장 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맛있는 국과 술 한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손님 접대로 내놓은 담배 한대를 피우고 나서 주교관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변두리의 좁은 골목길에서 좋은 인상을 주지 않는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 안내인 중의 책임자 되는 사람이 걸음을 느리게 걷는 것이 슬기로운 일이라고 판단하고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걸 생각이 들지 않게 하려고 회장과 말을 많이 주고받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감히 기침도 못하고 눈도 쳐들지 못했습니다. 약 10분 후에 그 사람은 인기척이 없는 길로 들어가서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순찰 중인 포교였습니다.
얼마 후 우리는 서대문을 지나 더럽고 꼬불꼬불한 길을 몇 개 지나서 어떤 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에는 급히 닫았습니다. 곧 신자들이 가까이 와서 우리 짚신과 짚 모자를 벗기고, 꽤 수수한 깨끗한 방에 잠시 머무르게 했다가 안마당을 거쳐 들어갔습니다. 숱이 많은 수염을 기르고 나이보다는 오히려 피로한 늙은 얼굴 모습을 한 두 사람이 기다리는 방으로 인도했습니다. 이분들이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보좌 주교였습니다. 우리는 그분들 발아래 엎디었고 문과 창문을 꼭꼭 닫고 낮은 목소리로 한동안 대화를 나눈 뒤, 우리가 무사히 도착한 것을 천주께 감사하고, 새로 파견된 4명의 선교사가 오래지 않아 참다운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청하기 위해 다블뤼 주교님이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15일 동안 공경하올 주교님들과 함께 즐겁게 지낸 후, 이 편지를 쓰는 이 시간 1861년 10월에는 주교님께서 우리들에게 각자의 구역을 지정해 주실 참이었습니다. 조선 포교지는 최근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성모께 바쳐졌고, 각 구역이 성모의 축일 중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구장이 계신 수도 서울과 황해도는 성모 무염시태(聖母無染始胎=축일12월8일/원죄없이잉태되신동정마리아대축일) 지역이고, 다블뤼 주교님의 성모 성탄(聖母聖誕=축일9월8일/복되신동정마리아탄신축을) 구역은 충청도 홍주지방 상부 내포이고, 페롱 신부의 구역은 성모 승천(聖母昇天=축일8월15일/성모승천대축일) 지역으로 경상도 서북부 지역이고, 지금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성 요셉 신학교가 있는 배론 지역입니다. 우리들은 아래와 같은 차례가 왔습니다. 리델 신부의 성모자헌(聖母自献=축일11월21일/그리스도왕대축일) 구역은 충청도 동북부 지역이고, 조안느 신부의 성모영보(聖母領報=축일3월25일/주님탄신예고대축일) 구역은 공주와 근처 지역이고, 랑드르 신부의 성모왕고(聖母往顧=5월31일/복되신동정마리아방문축일) 구역은 충청도 서부 내포 지역입니다. 그리고 깔래 신부의 성모취결례(聖母取潔礼=주의봉헌축일2월2일/주님봉헌축일) 구역은 경상도 서부 지역입니다.
성가 452. 위험에 빠진 자에게
강 깔래 신부의 체험
說明
1866년 그 무서운 박해 중에 살아남은 리델 이 신부(66,6,29탈출), 깔래 강 신부(66,10,26탈출), 페롱 권 신부(66,10,26.탈출) 등 세 선교사 중에 제일 큰 위험을 여러 차례 겪은 깔래 신부의 사연이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449-451)
세 선교사 중에서 깔래(Calais) 신부가 가장 큰 위험을 겪은 신부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외교인들이 많이 사는 문경 읍내로 피신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에 별안간 기침이 나는 바람에, 내가 거기에 숨어 있다는 것을 그 집에 있던 외교인들에게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날 밤으로 떠나 내게 피신처를 제공했던 신자의 인도로, 돌아가는 길로 해서 얼마 전에 성사를 주었던 하우실 마을에 다시 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오정 때가 되어서야 십 리 가량 되는 곳에 하우실이 보였습니다. 나는 길잡이를 돌려보내고 하우실 신자 집에 당도하니 그 집은 외교인 들에게 유린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짐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길을 계속했습니다. 전날 저녁 이래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세시 경에 교우 집이 몇 채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여인 몇이 어떤 오두막집 문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포졸 4명이 그들을 체포하는 길이었습니다. 내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포졸들이, 나를 붙잡고 내 보따리를 빼앗으면서누구냐.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을 하면서 내가 서양인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여 교우중 한사람이 다가오면서 포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이분은 제 시아버님이십니다. 이분은 귀머거리라는 것을 아시지 않아요. 여러분이 어떻게 하시라는 건지 말씀하세요. 제가 알아듣도록 할 테니까요.포졸들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포졸과 협상을 하고 산에 숨어있던 남자 신자들을 불러 가지고 합의를 하려고 했습니다. 나를 지키던 자는 내게 말을 시켜보려고 했습니다. 여러 번 주먹으로 때리면서 내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들려, 말 좀 해.신자들은 신부가 잡혔다는 말을 듣고 꽤 많은 사람이 내려왔는데 그들은 돈을 달라며 종교는 문제삼지 않는 것을 보고, 무슨 속임수가 있지 않나 의심해서 자칭 포졸이라는 그들이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신자들은 그들을 혼내주고 쫓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사람의 고해를 더 들을 수 있었고, 부활 축일에 성체를 영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포졸들이 곧 하우실에 올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그 다음 목요일에 신자 유 도마를 데리고 다음 마을로 가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연풍읍에서 주막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누군가가당신은 누구요. 어디를 가는 거요?하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그저 걸음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심이 났던 터라 우리는 오래지 않아 포졸 5명에게 붙들렸습니다. 포졸들은 나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앞뒤로 곰곰이 살펴보기 시작하더니 내가 서양인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불빛이 있는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유 도마가 어떻게나 사납게 시비를 걸었던지 내 곁에 있던 포졸들이 자기 동료들을 거들어 주려고 유 도마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나는 곧 그 기회를 이용해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한 놈이 도망친다하고 소리지르더니 몇 명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힘을 다해서 뛰고 있을 때, 엽전 몇 백 닢이 들어 있던 내 전대가 찢어져서 길바닥 돌 위에 떨어 졌습니다. 귀에 익은 그 소리를 듣고 포졸들은 그 노획물에 달려들어 그것을 주우면서 싸우느라고 내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전에는 길을 갈 때 내 몸에 돈을 지니고 다니는 일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언제나 내 동행자 중의 한사람이 내 돈주머니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나를 몹쓸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 주시려고 그 날은 내가 직접 돈주머니를 지니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어떤 신자마을에 닿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그 곳에 머무르지는 못하고 자발적으로 나선 두 사람을 데리고, 산 가운데 거의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우거진 숲 속으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은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일 주일간이나 나무 밑에서 지냈습니다. 나중에 순전히 외교인들 만이 사는 고장을 가로질러 길가의 주막에서 6명 내지 8명의 외교인들 곁에서 잠을 자고 솜바골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천주께서는 일체 사고를 당하지 않게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 솜바골에서 나는 연례적인 성직을 수행하고 성사를 주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기들이 천주교인이라고, 공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외교인 어른 몇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위안까지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내 라틴어 신약성서를 가지고 있다가 발각된 유 도마는 2, 3 차례 신문과 장형을 당했으나, 마침내 그에게서 나에 대한 밀고를 조금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석방하였습니다.
5월에는 박해가 약간 누그러졌습니다. 여전히 선교사들을 찾고 있었으나 신자들은 잡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정은 나라 안에 그와 같이 큰 불안을 그대로 둠으로 모내기에 지장을 줄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게다가 가뭄이 심하였고 여름 동안에 주식이 되는 보리가 밭에서 마를 기미가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외교인들까지 천주교인들에게 행한 잔인한 짓이, 하늘의 분노를 사서 비가 오지 않게 되었다고 사방에서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원수들은 그들의 계획 실천을 가을로 미루었습니다. 페롱(Feron) 신부와 리델(Ridel) 신부는 함께 네 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로 가서, 아직 나이가 어린 여섯 자녀를 가진 가난한 과부 집에 피신하였습니다. 피신처는 안전하였고, 또 이 여인은 몹시 가난하기도 하지만 신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 위험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받아들여 너무나 헌신적으로 지켜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에서 거의 2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가 121. 한 많은 슬픔에
제 3기 끝나는 조선교회
說明
1866년 박해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다가 항복하고 배교하면 즉시 석방하려는 것처럼 끌어내 관청 문 앞에서 죽였다. 박해자들의 처형은 망나니들이 칼과 도끼로 죽이는게 아니고, 대들보가 떨어지면서 한꺼번에 여러 명의 머리를 으스러트려 죽이는 단두대로 처형했다. 또 깊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천주교인을 죽이고 묻어 버리는 일을 한꺼번에 해 치우는 것을 생매장이라고 한다.
1801년 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선교사 없는 1기 교회가 되었고, 1839년 앵베르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가 사형됨으로 선교사 없는 2기 교회가 되었고 1866년에는 아홉 분의 선교사가 순교했고, 나머지 세 선교사는 조선을 떠남으로써 이 나라 교회는 선교사 없는 셋째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조선과 접경한 만주와 요동에서 일하며, 황폐한 조선에 잠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리델 주교는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상속자이다. 그는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필립보 뽈리스 주교이며, 조선 제 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l870년 6월 5일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는 조선 국경을 넘어 들어올 시도를 다시 시작할 것이고, 그들이 쓰러지면 그들의 후계자들이 다시 들어올 것이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479-484)
불란서 원정대의 귀환 후에 선교사들의 암담한 예측은 너무나도 적중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데 성공하여 국내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들이 신부들을 만날 희망으로 미국 배에 왔던 신자 9명이 로저스(Rodgers) 제독에 의하여 상해에 보내졌는데 그 신자들이 새로운 사실들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것을 요약하면 마음과 같다.
「상황은 참담하였다. 천주교인들은 반역자, 조국을 배반한 자, 외국인의 지지자로 몰려 쫓겨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이제는 그 전처럼 다른 도(道)로 이사하여 자기들의 신앙을 숨기며 살 방도까지 없어졌으니, 새 법에 의하여 관장 앞에 먼저 출두하지 않고는 어떤 고을에도 자리잡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신자 집단이 파괴되었고,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 겼다. 많은 고아들이 외교인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천주교에 대한 증오 속에서 길러질 것이며, 덜 불행한 고아들은 저주받은 족속의 아이들 모양으로, 길 위에 내버려져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것이다. 박해 자들은 배반자들에게 정보를 얻어서 박해를 했다. 열심하고, 지식이 있고, 경험이 많고, 재산으로 신자들의 의지가 될 수 있었을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천주교 신자에 대하여 서울과 대도시 관청에서는 기소를 생략하여, 현재 천주교인이거나 전에 천주교인이었다는 것이 인정된 모든 사람은, 가장 가까운 옥으로 끌려가서 즉시 교수형을 당한다. 교묘한 악마적 잔인성으로 천주교인들을 사형에 처하기 전에 배교를 시키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외교인들은 천주교인들이 순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증거자가 흔들리지 않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무섭게 보이기 위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고, 만일 고문으로 기진맥진하고 사지가 부러진 채 살려 달라고 청하고 배교한다고 말 한마디를 하면, 즉시 석방하려는 것처럼 끌어내 가지고 관청 문 앞에 가서 죽인다. 몇 군데 처형지에서는 망나니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무 느리게 작용하는 칼과 도끼를 집어치우고, 새로운 사형 도구를 사용했다. 그것은 들보 두 개를 포개서 만든 단두대 같은 것으로, 위에 있는 들보가 밑에 있는 들보 위에 떨어지면서 한꺼번에 10여명의 목을 으스러뜨린다. 어떤 곳에서는 굉장히 깊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살아 있는 천주교인의 무리들을 몰아넣고 그 위에 흙과 돌 따위로 산채로 묻어 버리는 일을 한꺼번에 해 치운다. l868년 9월에 벌써 박해에 희생된 사람이 2천 명이 넘었는데, 그 중에 5백여 명은 바로 서울에서 죽였다. l870년에 조선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산에서 굶주림과 곤궁으로 죽은 모든 사람을 빼고도 희생된 사람의 수가 8천에 이르렀다.」
물론 이 숫자들을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이 숫자들이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흥선대원군 자신이 말한 약속을 지켜 10년도 안되어 천주교의 흔적을 지워 버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l866년 말 이래 조선에는 신부가 없었다. 선교사 9명의 영광스러운 순교와 나머지 세 선교사의 망명과 더불어 조선 천주교회의 세번째 시기는 끝이 난다. 그것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조선이 교구로 설정된 이래, 이 포교지에는 5명의 주교가 있었는데 그중 3명이 순교하였다. 선교사는 23명이 있었는데, 그중 13명이 순교하였으며, 조선인 신부 2명중에서 1명도 순교하였다. 여항덕 신부는 귀국했고, 중국으로 탈출한 3명의 선교사, 병으로 죽은 이가 6명이 있었다. 이 모든 복음의 일꾼이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입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고, 교회 서적의 수를 늘리며, 끊임없는 박해로 생긴 피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줄곧 싸우고,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연례 보고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이런 성공으로 그들의 노력을 보상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받는 영혼과 개종하는 미신자, 죽을 위험에 있는 외교인 자녀들의 세례의 수효가 끊임없이 증가하여 갔다. 복음은 온 나라에 점점 더 잘 알려져 매일같이 그 정복지를 넓혀 갔고, 그때까지 영향을 받지 못하던 마지막 지방에까지 침투한 길이었으며, 모든 것이 가까운 장래에 진리가 오류에 대하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 대하여 혁혁한 승리가 거두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었는데, 헤아릴 수 없는 길을 택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지옥으로 하여금, 최후의 노획을 해 오도록 허락하셨다. 이리하여 조선 천주교회는 그 목자들과 신자들이 깨끗한 피를 흘린 것이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그 원수들이 영원히 봉해 놓았다고 믿고 있는 무덤에서 나올 것이다. 항상 당신 제자들의 품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실 것이다. 순교하신 선교사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지금 조선과 접경한 만주와 요동에서 일하며, 황폐한 그들의 포교지에 잠입할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리델 신부에게는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영광이 상속되었다. 교황에 의하여 필립보 뽈리스 주교이며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그는 공의회에 즈음하여 로마에서 l870년 6월 5일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조선 국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넘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 불란서의 원정대가 돌아온 뒤로 여러 차례 조선에 잠입하려고 해 보았으나 헛된 일이었다. 1867년에는 깔래 신부가, 1869년에는 리델 신부(후에 주교) 자신이 매우 큰 위험을 겪었다. 그들은 순교자들의 땅의 산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 주교와 그의 선교사들은 이 시도를 다시 시작할 것이고, 그들 자신이 하다가 쓰러져서 다시 조선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면, 그들의 후계자들이 들어갈 것이며, 쓰러진 십자가는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고, 잠시 중단된 영혼들의 구속 사업이 최근의 재난으로 이전과 같은 더 큰 성공을 거두면서 계속될 것이다. 그때에는 이 역사의 제 4기가 시작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시작될 것인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그 시대가 언제라는 것을 예측할 수가 없다. 그 시기에는 어려울 것이지만 폐허를 잘 정리하고, 상처를 잘 고치고, 해(害)입은 것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또 피를 흘리고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승리를 거두고 있는 마귀가 먹이를 쉽게 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영광스럽게 구원의 열매를 풍부하게 맺은 것은 틀림없다. 순교자들은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았고, 외방전교회 회원들의 기도와 온 카톨릭 교회의 간구가 자비의 하느님 옥좌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교황께서 친히 그것을 우리에게 보장하신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하여 생긴 불행의 소식을 들으시고 조선의 신입 교우들을 위로하고, 이 무서운 시련의 섭리에 의한 목적을 설명하고, 정의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싸움에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편지를 보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이 말씀은 조선 천주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영광의 칭호가 될 뿐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부활하리라는 보증이 되는 것이다.
교황 비오 9세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에게 인사와 교황 축복을 보냅니다.
올해의 기쁜 정초에 여러분에게 연이어 밀어닥친 불행한 소식을 듣고, 또 주의 포도밭에 왕성하게 뻗어나는 포도 그루와 새순들을 숲 속의 멧돼지가 어떻게 짓밟아 버렸는지를 보고 눈물이 흐르도록 슬펐습니다. 확실히, 만일 숭고한 신앙의 힘이 내 마음속에서 연약한 인성의 감정을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목자를 잃고 흩어져 생활에 필요한 것을 모두 빼앗긴 채 황량한 곳을 헤매거나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자녀들의 고통과 고뇌와 학살 등, 신자 여러분을 짓누르는 이 모든 불행이 내 어버이다운 애덕에서 탄식과 눈물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깊은 슬픔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시적인 재산과 생명까지도 바친 강한 사람들의 승리와 영광으로 인하여 가라앉았을 뿐 아니라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교회 안에 다시 생겨난 순교의 영광, 순교자들의 피에서 거두어진 새롭고 더 풍성한 수확,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여러분에 대하여 하느님이신 우리 스승과, 그분의 제자들의 합당한 동반자가 된 여러분의 행복에 대하여 거룩한 질투를 느끼게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이 세상을 다만 십자가로만 이기고자 하신 그분의 군사가 아닙니까. 세계 만방에 전파한 복음의 교리를 피로써 확증한 그분들의 자녀가 아닙니까. 우리도 그분들과 같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을 때에 기뻐하고,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박해를 받고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에 기뻐 용약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늘에서 큰상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그러므로 슬픔을 잊고 눈물을 거두며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고, 당신을 온전히 여러분에게 주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여러분의 목숨으로 갚을 수 있게 하여주신 것을 기뻐하시오. 여러분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위하여 태어났음을 기억하고 승리자들에게 준비된 저 찬란한 옥좌를 보며, 이 잠시 지나가는 하찮은 고민이 영원한 무게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생각하시오. 나는 비록 여러분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여러분의 싸움에 정신적으로 참여하며, 끊임없는 기도로써 내 약함이 허락하는 한 가장 큰 도움을 마련하여 주겠습니다. 또한 너무 오랫동안 목자를 가지지 못하여 마치 흩어진 양들과 같이 되어, 더 큰 위험을 당하게 되지 앓을까 두려워 이미 자기 일에 알맞게 빛나는 상을 받은 그분 대신으로, 같은 열심과 기력을 가진 사람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뜻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도 가혹하게 시련을 주신 하느님께 여러분의 모든 불행을 물리쳐 주시고, 고요한 평화를 돌려주시어 여러분에게 그분을 섬길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시고, 여러분이 당한 모든 해를 아주 풍부한 모든 이익으로 보상하여 주시기를 하느님께 빌고 또 빕니다.
로마 성 베드로 성전에서, 교황 재위 제21년
1866년 12월 12일 교황 비오 9세
성가 286. 순교자의 믿음
최양업신부 선종지
성지 설명
054-572-0532
소재지 : 경북 문경군 문경읍 진앙리 문경관문 입구
진안리 최양업신부 선종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무더운 1861년 음력 6월 10일 문경에 오시어 점심은 못 잡수시고 약주만 몇 잔 하시었는데 잘 준비되지 못한 고기를 잡수시고 체하여 말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모시고 가던 조화서 베드로(성인)복사는 민망하여 “너무나 불편하신 모양이오니 이 문경읍의 평창 이씨라는 교우 집이 패약(역국)하고 있으니 그 집에 들어가시어 치료하심이 필요한 줄 아옵니다.” 하고 말하여 승낙을 받고 이씨 집에서 치료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증세가 날로 위중하시었다. 그래서 제천에 신 신부께 연락하여 즉시 오시어 병자성사를 받으시고 1861년 음력 6월 10일 선종 하시어 배론 성지 뒷동산에 안장하고 최 신부의 둘째 야고버가 상경하여 장 베르뇌 주교에게 애절한 사연을 아뢰었다. 장 주교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녀도 슬프냐? 나는 주인을 잃었다.” 하시며 몹시 슬퍼하시었다.
연풍 성지
성지 설명
☏ 043-833-5064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6
연풍 성지는 경북 문경에서 충주 쪽으로 해발 1.017m의 험준한 문경새재를 넘으면 고갯길 좌측으로 연풍이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黄錫斗) 루가 성인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연풍은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백화산 등이 험난하여 서울과 경기도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의 교우들이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선 곳이다. 연풍으로 몰려든 교우들은 여차하면 험준한 산 속으로 문경 땅을 넘나들며 박해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였다. 여기도 1849년부터 12년 간 최양업(崔良業) 신부가 신앙의 꽃을 피운 곳이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성인품에 오른 황석두 루가는 부유한 양반집 셋째 아들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중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고 서학에 심취되었다. 나라에서 금하는 서학에는 훌륭한 진리가 담겨 있음을 알게되어 과거를 포기하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천주교를 배척하기 때문에 2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지내다가 아버지를 포함해서 가족 모두를 입교시켰다.
페레올 고 주교는 정결(貞潔)을 지키는 그를 사제로 서품 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성서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고,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위앵 민 신부, 오메트로 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갈매못에서 참수 당했다.
그 후 1979년 20년 간 연풍 공소 회장이셨던 봉원균 회장이 평해 황씨 문중 선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 성지로 이장했다. 여기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5인의 성인상과 오성 바위와 똑같은 바위를 만들어 놓았고 순교 현양비도 건립되었다.
성가 187. 천사의 양식
연풍에서 출생한 성인
○ 황석두 루가 성인님. (연풍. 갈매못. 1866. 3.30. 53세. 회장)
청주교구 시복시성 선정 제출자 (14명)
최양업(토마스), 김사집(프란치스코), 김원중(스테파노), 박 (프란치스코), 배관겸(프란치스코), 송(베네딕도), 송(베드로), 오(마르가리타), 오반지(바오로), 원시보(야고보), 이국승(바오로), 이(안나), 이성례(마리아), 장(토마스).
황석두 루가의 생애
說明
황석두 루가는 연풍에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는데, 자기의 희망은 높은 관직을 원했다. 이렇게 큰 포부를 가지고 있던 그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개종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파산 위협을 당하는게 겁이 나서 황석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작두로 목을 자르려고까지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하느님에 대하여 모독적인 언사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황석두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2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다가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은혜를 내려 주시어 아버지를 비롯해 온 가족이 개종하였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428-430)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메트로(Aumaitre) 오 신부는 근처 마을들을 샅샅이 뒤지는 수색을 모면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만 그의 일을 도와주던 신자 중 아무도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만을 하였다. 따라서 신부는 거더리로 가는 길을 잘 물어본 다음 모든 사람을 돌려보내고 혼자서 길을 떠났다. 오 신부는 마을에 도착하여 어떤 교우 집으로 들어가 다블뤼 주교가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날 아침 주교는 위앵 신부가 말한 오 신부를 포졸들이 요구한다는 말을 듣고 자수를 권유하기 위하여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를 지닌 사람들이 다른 길로 해서 갔기 때문에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들이 돌아오니 세 선교사가 숨어 있는 방에 모여 있었다. 포졸들은 자기들의 원정과 서양인들이 순순히 굴복한데에 만족하고 그들에게 매우 정중한 대우를 하였다. 그들을 결박하지도 않고 마을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또 그들의 청을 들어 붙잡았던 신자들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신자들은 위앵 신부의 하인 외에 송 니꼴라오, 신학생 박 필립보, 다블뤼 주교의 복사 황석두(黄錫斗) 루가였다. 그러나 황석두 루가는 떠나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스승인 동시에 아버지인 분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였다.
황석두 루가는 꽤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자기의 재산을 물려주어 잘 보존케 하려고 그에게 기대를 걸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키웠다. 황석두 루가 자신이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그때 자기의 희망은 꽤 높은 관직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결국 그는 그보다 더 나은 일을 하였으니, 그의 한문 선생의 권고에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고 집안 식구 몇 사람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자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파산의 위협을 당하는게 겁이 나서 아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학대를 하고 작두로 목을 잘라 죽이겠다고 하였다. 황석두 루가는 그것을 훌륭한 인내심으로 참아 받다가 입을 열기만 하면, 아버지가 하느님께 모독적인 언사를 하게되는 것을 보고, 하늘에 대하여 폭력을 쓰는 아버지의 개종을 얻기 전에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2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였다. 집안에서는 그가 병든 것으로 생각하고 별의별 약을 다 써서 그때문에 죽을 뻔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견디어 나갔고,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그가 청하는 은혜를 내려 주셨다. 마침내 아버지의 개종으로 온 집안이 모두 개종하게 되었다. 때는 l839년 기해 후였다. 페레올 고 주교가 도착하자 황석두 루가는 포교지의 일에 전념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그를 신부로 만들 생각을 하였다. 그의 아내도 그와 헤어져서 절제 생활을 하기로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정식으로 세워진 수녀원이 없으므로 교황청에서는 페레올 고 주교의 신청을 적당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형이 서투른 재산 관리로 오래지 않아 재산을 탕진하여 곤궁에 빠지고 말았다.
1858년에 페롱 신부는 그를 한문선생으로 채용하였다. 그런 다음 차례로 죠안느 신부와 베르뇌 주교의 회장이 되었다가 마침내 책의 저술과 교정을 도우라고 다블뤼 주교에게 소속시켰다. 황석두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를 떠나려고 하지 않고 죽음에까지 따라갔다. 그는 나이 52세에 갈매못에서 순교의 영관을 받았다.
성가 34.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푸르티에 신부의 편지
說明
푸르티에 신 신부가 그의 사촌이며 라보르 소신학교 선생인 부떼이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뇌 주교의 조선 입국 과정과 사목관계 이야기를 써 보냈다. 푸르티에 신부는 홍봉주(洪鳳周)에 의해 베르뇌 주교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같이 상해에서 1856년 1월에 조선에 입국했다.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 일인지 묵상해 봅시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237-248)
지금 상해를 떠나는 선교사 4명이 작은 배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첫째 분은 저희 새 주교이신 베르뇌 주교님이신데, 주교님은 포교 전선에 계신지가 16년이 되었으므로 포교지의 고참이십니다.
처음으로 배가 저희들의 희망대로 물결을 가르고, 3월 19일 성지 주일날 조선 신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는 그 날의 아름다운 교송(交誦)을 반복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저희를 조선에 맞아들이기로 되어 있는 조선 배가 약속 장소로 지정해 준 섬 바로 근처에 닻을 내렸습니다. 우리 배 돛대에는 흰 바탕에 파란 십자가를 커다랗게 그린 깃발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암호 표지입니다. 저희들 앞을 내왕하는 많은 조선 배들은 서양 여러 나라의 깃발들이 왜 여러 가지 색갈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여져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배의 깃발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 배들은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까지 포함해서 외국인과 연락을 했다는 의심을 받기만 해도 조선 사람은 당장 사형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저희가 바라는 배가 오지 않으므로, 저희들은 이 정박지에서 저 정박지로 두루 돌아다니고 배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수로에도 모두 돌아다녔으나 허사였습니다. 6일 동안 헛되이 찾아다닌 탓으로 저희 선원들이 벌써 피로했고, 저 자신도 더 찾아보아야 쓸데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참이었는데, 예수께서 수난 하신 날 저희가 아직 가보지 못한 항구를 찾아가던 때에 저희 선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누군가가 대포 몇 발을 쏩니다. 대수롭지는 않지만 심상치 않은 이 포성으로 조선 사람들이 해안에 모여들자마자, 바다에서 배 한 척이 힘겹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배는 슬그머니 우리들 쪽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오래지 않아 8명으로 된 승무원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많이 움직이며, 빠르고 쾌활한 몸짓을 많이 합니다. 바다는 풍랑이 없고 잔잔한데도 그 배는 먼 거리를 저어 와서 의심받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저희들 가까이 지나가며 그중 한사람이 은밀히 저희 안내인 중 한사람의 이름을 부르니, 안내인은 서둘러 대답을 했습니다. 천주는 찬미 받으실 지어다! 이제 저희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희 안내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조선 사람들은 급작스런 조작으로 돛을 펴서 그들과 해안 사이를 막고 모두 함께 커다랗게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 앞에 합장을 하고 엎디어 그들이 주교의 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몸을 일으켜 몇 가지 기쁨을 나타내는 표시를 하고 저희들을 데리고 갈 수 있기까지 때를 기다리며 육지를 향해 갑니다. 그러나 야음이 되어서야 저희 계획을 실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조선은 옛날 사람들이 플류페모스의 동굴에 대해서 말하던 그것을 1856년에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나라의 법률은 반도 안에 잠입하는 외국배나, 외국인들을 나라 안에 이끌어 들이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망 부활날 밤 자정쯤 그 조선 배가 해안을 떠나 우리가 볼 수 있을 만큼 저희 배 곁을 꽤 가까이 지나 바다로 향해 갑니다. 중국 배도 지체하지 않고 그 배를 따라 갔습니다. 바다에 풍랑도 없이 잔잔한데도 불구하고 두 배의 선원들이 많은 노력한 뒤에 저희는 서로 합쳤습니다. 한시간도 못 걸려 모든 짐이 옮겨졌고 저희는 중국 배에 하직을 하고 새 처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 가엾은 신자들은 날이 샐 때에 밀수가 행해진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 위하여 힘껏 저어 갑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육중하고 투박하게 만든 배를 어떻게 빨리 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중국 배와 서양 배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능가하는 것만큼이나 중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비 지방에서 따른강을 건너는데 사용하는 나룻배 정도의 배를 상상해 보십시오. 약간 더 높고 초라한 갑판에 돛 두 폭, 이것이 그 차이점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 돛이라니! 네모지게 짚으로 짠 것을 역시 짚으로 된 참 바로 동여맨 것입니다. 다른 밧줄들, 닻줄까지도 모두 짚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틈 메우기 기술을 몰라, 잘 들어맞지 않는 널판때기 이은 틈으로 물이 어떻게나 많이 스며드는지 선원 한 명은 바가지로 끊임없이 선창의 물을 퍼내야 할 지경입니다. 이제는 저희 방에 소식을 들으시렵니까. 앉아 있을 만큼 넉넉히 높지도 않고 누워 있을 만큼 넉넉히 길지도 않은 초라한 작은 방에 꼭 끼어 있어 상륙할 때 까지는 다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끔 저희를 거적으로 덮고 그 위에 짚을 두껍게 까는 등 조심을 하는데 이것은 다른 배들이 곁을 지나거나 관원에게 임검 당할 때에 그 양반들이 자주 배에 불쑥 나타나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으깨진 큰 짚더미 밑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묻혀 있으리라고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장비로 저희가 가는 서울까지 아직 남아 있는 480리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거리는 좋은 배라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것인데, 이 배는 저희를 찾아오는데 20일이 걸렸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다행스럽게 4일만에 서울에서 1백 리 떨어진 도시가 있는 강까지 왔습니다.
저희들은 이 은신처에서 나갈 시간이 가까워 옵니다. 우리는 각각 상제가 입는 조선옷을 걸칩니다. 약간 다갈색이 도는 거친 천으로 만든 이 옷의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대나무 가지로 짠 엄청나게 큰 모자. 그 모양은 꼭 우리 집에 조절 등의 종이 갓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나 큰지 원뿔 모양의 꼭대기가 머리 위로 올라가는데 밑 가장자리는 어깨와 가슴을 감싸고 내려옵니다. 그래서 저희들 서양인 모습을 기막히게 잘 감추어 줍니다. 게다가 조그만 막대기 두 개에 달린 천 조각을 가지고 있는데 포선(布扇=부채) 모양으로 되어 있어 그것을 얼굴 앞에 갖다 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조심성 없는 사람이 저희 모습을 보려고 하면 서둘러 천 조각인 포선을 대고 얼굴을 감쌉니다. 자기를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는 이런 조심성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할수록 이 나라에서는 엄격하고 신성한 의무로 되어 있는 부모상을 더 잘 치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배는 강 한가운데의 제법 한적한 곳에 닻을 내렸습니다. 조수가 우리 배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오후 5시입니다. 저희들의 귀중한 램프 갓을 뒤집어쓰고 노 젓는 사공 2명이 강으로 저어 갈 작은 배로 갈아탑니다. 저희는 길을 떠나 밀물 덕택으로 빨리 전진하는데, 늘 강기슭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져서 갑니다. 밤이 되면 저희들은 더 안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조수가 저희를 도와주기를 거부하므로 노 젓는 사공들은 썰물과 싸우느라고 공연히 애만 씁니다. 저희는 강의 깊은 골짜기에 갇혀 있어, 강기슭에 접근할 곳이란 깎아지른 듯한 매우 높은 기슭밖에 없는 지점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밤이 으슥하여 강변이 어둡고 조용하므로 용기를 얻어 강변으로 뛰어내려 논두렁으로 접어듭니다. 처음에는 걷기가 꽤 고생스럽습니다. 길이 나 있지 않았으므로 저희는 물이 잔뜩 고여 있는 도랑과 수로를 건너지르고 절벽과 늪을 끼고 돌며 손과 발이 걸려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서울로 가는 길이 나올 때까지 저희는 기어올라가고 껑충 껑충 뛰고 어떤 때는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밤새껏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도 잘 해치워서 새벽에는 이 도시의 성문 앞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원정(遠征)의 종말에 이르렀고, 또 어쩌면 매스트르 신부에게서 주교님을 맞이하라는 위임을 받은 다블뤼 신부가 침대 노릇을 하는 돗자리에 누워 있을 때, 들이 닥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이 계엄령은 임금님이 서울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의 임금님이 서울에 부재중일 때에는 일체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비상 경계를 폅니다. 통행이 어렵게 되고, 왕래하는 행인들이 더 엄중한 조사를 받고, 해가 뜰 때까지 성문이 닫혀 있으며 프랑스 어릿광대들의 공연대와 비슷한 단을 네 군데에 마련해 놓고, 그 위에는 조선 사람들이 볼 때에는 위압적으로 많은 군인과 포졸과 밀고자를 거느리고서 각양각색의 무기를 갖춘 장군 4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왕이 환궁하면 일체 이런 경계는 하지 않습니다. 이 위대한 전제군주의 존재가 모든 음모의 희망을 버리게 하고 일체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문들이 꼭 닫혀 있으므로 저희들의 계획에는 약간의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변두리에 있는 어느 신자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길을 떠나 그 장소에 들어갔는데, 그때 마침 대신들이 상당수의 문무 관리를 거느리고 많은 포졸과 군인의 호위를 받으면서 서울로 돌아오려는 그들의 왕을 영접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인들이나 관리들이 행진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파리 연병장이나 또는 쭐르즈의 포사격 연습장의 행진 따위까지는 상상하지 마십시오. 말 한 필이 길 한가운데를 속보로 걸어가는데, 조선말은 칭찬할 만한 습관으로 그렇게 펄쩍 펄쩍 뛰지도 않는데 하인이 고삐를 잡고 끌고 갑니다. 말에는 관리가 올라앉아 있는데 침착하고 장중한 부동의 자세로 허수아비처럼 꼿꼿이 앉아 있습니다. 그의 주위를 무장하고 혹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싸고 차례로 줄도 없이 뒤범벅이 되어 달려갑니다. 이 호위는 악사의 역할도 합니다. 악장이 앞서가며 5분마다 악사들을 향해 돌아서서 장중한 우우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필하아모니 악단은 합창을 해서 이 듣기 좋은 단절음 같은 음조로 각자의 폐가 허용하는 한 길게 뺍니다. 이 훌륭한 합창 소리에 맞추어 저희는 시내로 살짝 끼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백성이 굉장히 많이 몰려오기 때문에 군중이 하도 빽빽해서 동행들이 있는 데로 가려고 가진 노력을 하며, 군중 속에서 꼼짝할 수가 없게 되어 지나가는 길에 도보로 가는 하급관리와 부딪치고 그 반동으로 포졸이나 군인의 어깨를 덮치며, 이 모든 낭패에 대해서 그들이 들을까 봐 작은 목소리로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너는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치기만 하지 않을 거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희들의 안내인과 우리가 들어갔던 집주인인 신자는 길을 가르쳐 주느라고 저희 앞장을 서서 갑니다. 저희는 그들 뒤를 바짝 따라가지만, 오리들처럼 한 줄로 서서 갑니다. 저희는 진짜 양반과 같이 상중이라는 표시를 움직이지 않도록 점잖게 하라는 당부를 받았었습니다. 저희가 쓴 굉장히 큰 모자는 저희 모습을 어떤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찌나 저희 시야를 가려 놓는지 기껏해야 저희 인도자들의 발 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들은 모두가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혼잡 속에서 그만 제 앞에 가는 다른 조선 사람 두 명의 뒤를 따라가면서 일을 든든하게 한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바짝 따라가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새로운 인도자들을 따라 여러 거리를 가로지르고 골목길로 들어가고 한 끝에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어떤 집으로 들어가려고 제 쪽으로 돌아섭니다. 모자를 젖히고 그들을 바라다보았더니 그들의 얼굴 모습이 전혀 생소한지라, 그제야 저는 동행들과 안내인들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빨리 빨리 모자챙을 내리고 이웃집들을 살펴보는 체하면서 서둘러 뒷걸음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처음 발을 들여놓는 서울 한복판에서 가혹하고 인정머리 없는 법률의 저주를 받으며 조선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몸으로 혼자 떨어져 있으니 누구에게 말을 건네 보겠습니까. 하지만 저의 반 토막의 말 첫마디에 벌써 저를 잡아가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무슨 말로 물어 보겠습니까. 교우 집을 어떻게 물어 보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파리 시내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인간 정의에 쫓기는 그 악당들의 소굴을 묻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제 머리에 우선 떠오르는 생각들을 체험했기 때문에 저는 짧은 기도로 그 섭리의 품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천주께서 제게 허락해 주셨지만, 지금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천하 태평한 마음으로 가던 길을 되돌아와 다행히도 제가 동행들과 헤어졌던 큰길을 도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일행이 갔으리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가던 도중에 몹시 당황하여 저를 찾아 달려가는 안내인을 붙잡았습니다.
만일 집에까지 들어가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를 보지 못한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들이 얼마나 걱정했을 것인가! 그것은 상상에 맡겨 드립니다. 다행히도 약 15분간 불안이 계속되다가 제가 도착해서 그 걱정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리고 포교지 본부에서 저희를 기다리던 다블뤼 신부와 합심해서 이웃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무서워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 원정의 다행한 결말을 축복했습니다.
성가 490. 십자가에 가까이
강 깔래 신부 훈계
說明
강 깔래 신부는 프랑스에서 1833년에 태어났다. 1860년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866년까지 6년 간 경상도 서부 지역의 교우들을 맡아보았다. 강 신부는 병인박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 중에 한사람으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 신부의 이 글은 1860년에서 1866년 사이에 작성한 강론의 일부일 것이다. 그가 강론 준비로 적어 놓았던 원고가 교우들 사이에 전사(轉寫)되어 오늘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강 신부의 훈계요지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가 다 천주의 것이라는 전제 하에, 영혼과 육신을 위시하여 모든 것이 다 천주께서 주신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모든 것을 본 임자인 천주께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평상시의 일을 잘하는 것이 요긴하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천당에 가기 위해 수도자들처럼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아도, 예수님처럼 평상시 행동과 신공을 소홀히 하지말고 충실히 이행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순교자와 증거자들 241-248)
바오로 종도가 전교 하실 때에 항상 말씀하시기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자나깨나 쉬거나 일을 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다 천주를 위하여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영혼과 육신이 다 천주의 것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아무 사람이나 다 자기가 세상에 나고 싶은 마음으로 난 것이 아니다. 백 년이나 오십 년, 또는 몇 해 전에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아무 공부(준비)도 없이 영혼과 육신을 얻어 세상에 태어난 것이며, 부모의 뜻대로 낳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사람 육신을 부모의 마음대로 낳을 수 있다면, 모두 절묘하고 얌전한 모양이어야 하련만 세상에는 도리어 눈멀고 귀먹고, 그 밖의 병신과 못난이가 많은 것으로 보더라도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도 온전히 부모의 임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영혼을 부모의 마음대로 낳는다면 모두 다 재주 있고 영리한 사람이련만, 도리어 미련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이 많은 이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영혼도 또한 온전히 부모의 임의로 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미 너희들이 세상에 나고 싶은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오, 또 부모들의 임의도 아닌즉, 너희들의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천주께서 내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너희들의 영혼 육신이 온전히 천주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제 힘으로는 아무 좋은 생각이나 말을 한가지도 못한다.”하시고, 또 “너희들에게 있는 것이 천주께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하였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라. 혹 영혼의 삼사(三思)나 육신의 오관(五官)이나 지위가 좋은 듯한 것이 있거든, 그것은 다 천주께서 주신 것으로 알 것이요, 만일 천주에게서 남보다 더 받은 것이 있거든 천주께 더 많이 돌려 드릴 것을 생각하여라. 그 영혼과 육신은 다 천주께 돌려 드려야 한다. 내 영혼과 육신과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천주의 것이니, 본 임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마치 농부가 김매기를 자기의 의식(衣食)을 위해 하는 것과 같이, 천주가 나를 내신 것도 다 당신을 위하여 하신 일이니, 생각이나 소원이나 말이나 행실을 마땅히 천주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공을 할 때에는 마음에는 없이 입술만으로 주를 공경하지 말라. 대개 영혼은 주인 같고 육신은 종 같으니, 만일 입으로만 공경하고 마음으로 공경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종을 보내어 임금을 공경하게 하고 주인은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천만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조 만과나 매괴경(玫瑰經)이나 첨례할 때에는 다 마땅히 천주를 관상(대월=對越)하고 입에 외는 말을 따라 그 마음을 내는 것이 제일 좋으나, 그것이 조금 어려우니 입으로 정성껏 염하고 마음으로는 주를 사랑하고 주를 공경하는 마음이나 그 밖의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으니, 이렇게 힘써 공경해야 할 것이다. 온갖 신공을 다 천주께 돌려 드리지 아니하면 주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되느니라.
신자들이여 조심하라. 대개 영혼이나 육신이 다 천주의 것이니 만큼, 어떤 일이라도 천주를 위하지 아니하고 남의 눈을 위하면 그것은 천주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 만과는 남이 보는데서 조심하여 단정히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잘 하고, 혼자 있을 때에는 혹 편히 앉아서 하거나, 손을 들어 잡손질을 하며 혹은 웃으며, 혹은 눈을 들어보며, 그렇지 않으면 혹 졸며 아무 정성 없이 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혹 애긍이나 대 소재 같은 신공 할 때에 남의 칭찬만을 위하여 한다면 공을 세울 길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이런 공부는 다 헛된 공부라 이미 상을 받았다. 하였으니 만일 이렇게 신공을 하였다면 천주 앞에 이르러 심판 받을 때에, 마땅히 천주께 바칠 것을 남에게 주었으므로 꾸중하시는 말씀을 면치 못할 일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좋게 지내고 착한 사람같이 살았어도, 바른 뜻으로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 앞에 빈손 뿐이요 원통함이 될 것이다. 오늘 이 말을 들었으니 명심하고 마음을 고칠지니라. 사람이 세상에서 공을 세워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한다면, 불가불 부지런히 천당의 길을 청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은 둘이 있으니 하나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별일로 영혼을 구원함이니 별일은 광야에서 은수하며, 혹은 굴속에서 살며, 원의에서 동정을 지키며, 또 혹은 몸을 괴롭히고 채찍질하는 것이다.
또 하나도 실행하기 어려운 길이니 예사로운 일을 잘함이다. 예사로운 일이란 자고 깨고, 마시고 먹고, 일하고, 뛰는 따위의 집안과 집 밖에서 누구나 일상 하는 일들이다. 이런 일이 비록 예사로운 일이지만 소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도 세상에 계실 때에 겸비(謙卑)와 인내로써 행실을 잘 닦아, 은수와 편태(鞭笞=채찍, 회초리) 일을 하신 일이 없으시고 오직 평상시의 일을 하셨으니 어찌 귀히 여기지 않을 것이냐?
비유컨대 장사하는 사람이 일 푼 일리의 적음을 버리지 아니하였으므로 능히 큰 부자가 되고, 농사하는 사람이 한줌 흙의 적음을 탓하지 아니하므로 능히 큰 밭을 얻는 것이다. 영혼의 사정도 이와 같아서 평상시의 작은 일이라도 부지런히 잘 하였으면 천주 앞에 큰 부자나 같은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별다른 일 하기를 일삼지는 못할 것인즉 예사 일이나 잘해야 할 것이다. 만일 별일도 못하고 예삿일도 아니하면 영혼 구원하기를 어찌 바라리요? 날마다의 예사 일을 잘 하여야 할 것이다.
아침에 깨었을 때에는 누워서라도 먼저 네 가지 일을 할지니, 하나는 성호를 그어 몸과 행실을 축성하고, 둘은 예수․마리아․요셉을 불러 입과 말을 축성하고, 셋은 영혼 육신과 오늘 할 일을 다 천주께 드리나이다 하면 낮에 생각하지 못하더라도 공로가 될 것이요, 넷은 무슨 나쁜 습관을 오늘 정개 하기를 정지하되, 어떤 습관이든지 주장되는 제일 나쁜 습관을 생각하여야 하니라.
이 네 가지 법이 조그마한 듯 하나 과하다고 여기지 말라. 대개 아침은 제일 중요한 때이니 만큼 아침에 잘 시작하면 낮에 유감도 물리치기 쉽고, 잘 지내기가 쉬우니 정지할지어다. 옷 입을 때는 “주여 내 육신을 이같이 호위하고 보존하여 주시니 내 영혼도 이같이 호위 보전하소서.” 하고 또 세수할 때에는 “주여 내 얼굴을 깨끗하게 하시니 내 영혼도 이같이 깨끗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라.
조과나 만과나 다 통경하는 것이 좋으니, 이는 성교회의 본디부터 하는 법이요, 또 예수 말씀이 “몇 사람이 모여 한결같이 빌면, 내가 너희들 가운데 있겠다”고 하셨으니 힘써 할지니라.
조과 할 때에는 세 가지 법을 실행할 것이니, 하나는 육신을 단정히 하고 공손히 합장하여 대월함이니, 대월이란 하느님을 관상해야 하는 것이니, 대개 육신이 먼저 대월하면 영혼이 대월하기가 쉬우리라. 그러므로 성교회에서 처음에는 신덕이 많아 두 발을 들어 마치 천주께서 놓은 탁자에 앉아 계심을 보는 것같이 향하여 대월하더니, 이제는 신덕이 적으며 이렇게 하는 이가 적으니라. 또 아이가 있는 이는 아이를 안지 않는 것이 좋다. 만일 아이를 안으면 눈과 마음을 아이에게 주고 다만 입으로만 공경하게 될 것이다. 묵주나 고상이나 상본이 있거든 벽에 모셔 놓고 하면 더욱 좋은 법이니라.
둘은 천주가 곳곳에 계신다는 것을 생각함이니, 나 대 죄인이 천주의 앞이라 하여 임금 앞에 있는 것보다도 더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만일 졸거나 마음속에 잡념이 생기거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임금 앞에 있다면, 감히 졸거나 방심하지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주 앞이라 하여 다시 대월하면 자연히 졸고 방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셋은 위자(爲者=목정)를 생각함이니, 혹 예수의 고난을 위하거나 성모를 위하거나 주교․신부로 뜻을 정하여 하면 또 한가지 열심을 내기 쉬우니라. 조 만과는 본디 제일 귀중한 공부이니, 우리말과 같이 입으로만 하지말고 좋은 마음을 힘써 내어야 한다.
삼종은 아무리 때가 늦을 지라도 하는 것이 좋으니 늦다고 아니하면 버릇되기가 쉽다. 궐하는 것은 비록 죄는 아니지만 영혼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요, 또 삼종은 천하 만국이 다 삼 시로 하는 것이니, 매우 좋은 신공이라 힘써 하는 것이 좋다.
여 교우는 밥을 장만할 때마다 내가 천주께서 잡수실 진지를 장만한다고 생각하면 밥도 잘될 것이요, 남편도 나무라지 않을 것이며, 또 심판할 때에 주의 말씀이, “네가 세상에서 나를 위하여 밥을 많이 해 주었으니, 이제 너는 나의 상생의 음식을 와 먹어라” 하실 것이니, 기쁘고 다행하도다. 이 말씀이여!
또 불을 보거든 지옥의 불을 생각하되, “이 불에도 제 손가락도 태울 수 없거든, 이보다 만 배나 더한 지옥 불에 어찌 온몸을 태울 수 있으랴” 하여 놀라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밥 먹을 때에는 식전 식후에 염경을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켜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이가 나에게 이렇게 음식과 반찬을 주어 기르시거늘, “나는 자식된 본분을 어떻게 다하여야 할 고?” 할 것이요, 욕심으로 정신을 잃고 허겁지겁 바삐 먹지 말라. 그렇게 하면 탐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천주께서 분부하시기를, “일을 하여 먹고 입고 살라” 하셨으니 아무 일이든지 다 주의 일로 알아야 한다. 일을 할 때에는 내가 천주의 품꾼이라 생각하고, 힘이 들고 땀이 나거든 천주께 삯돈을 후히 받으리라 생각하고, 만일 게으른 마음이 나거든 주께서 내려다보신다고 생각하기를, 마치 주인이 품꾼을 밭에 보내고 와서 보살피는 것 같이 여기면, 자연히 게으른 마음이 없어져 일도 잘되고 공도 많을 것이다. 길을 떠날 때나, 일하러 나갈 때나, 들어올 때에는 성호를 긋고 천주경이나 성모경이나 아무 경이나 마음에 좋은 대로 외면, 마치 길 다니는 사람이 길에 떨어진 돈을 자주 얻는 것처럼 영혼이 천당의 보배를 자주 얻고, 또 혹 잠시라도 대월하면, 그 신공이 마치 화살 같아서 천주의 성심을 통할 것이니, 누가 이런 신공을 버릴 이가 있겠는가?
자식과 며느리 되는 사람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며, 나를 낳아 젖먹이고 수고로이 길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온갖 명을 천주의 명령으로 알아 고분고분 하고, 또 부모 된 이는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천주께서 나에게 잘 기르고 가르치라고 부탁한 아이로 보아 잘 가르쳐 기르면, 주께서 상을 주실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벌을 받을 줄로 생각하라. 아내는 남편을 주인같이 보아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벗같이 보아 사랑하고 화목하여라. 화목은 천당 길이요, 불화는 지옥 길이니라.
저녁에 만과 할 때에는 아침에 조과하는 법과 같이 하고, 또 많은 일을 다 마친 뒤에 할 것이 아니라, 일찍 하는 것이 좋으니 만일 늦게 하면 졸기 쉬우니라. 조 만과는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행할 것이니 천주의 명령이며 성교회의 명령이요, 저 다른 신공과 같지 아니하니 결코 궐하여서는 안 된다.
또 아침에 무슨 죄든지 한가지라도 얻지 말라 하여 잘 반성하여, 범하지 않았거든 감사하고 범하였거든 뉘우치고 고치어라. 만일 저녁에도 반성하지 안으면 모병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잘 때에는 예수․마리아․요셉을 부르고, 성호를 긋고, 호수 천신 송 “천주의 사신 나를 거느리고 지키시는 자여…”를 외우고 예수의 품에서 자라.
이 평상시의 일들을 힘써 행하면 쉬울 것이요, 천주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될 것이니 힘써 해보아라.
성가 502. 주의 빵을 서로 나누세
박해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說明
우리나라 박해의 원인은 유교 국가이며, 반상 계급, 군주제도, 당파싸움 등 여러 가지 사회적인 박해의 이유가 있었지만, 한영익(韓永益), 김여삼(金汝三), 김순성(金順成), 이선이(李仙伊) 같은 배교자의 고발로 인하여 전국적인 큰 박해로 이어졌다. 그러나 배교자들은 그들의 정보 제공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발에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주문모 신부가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조선에 입국 한지 5개월만에 진사 한영익(韓永益)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벽의 형 이석에게 밀고하였다. 이석은 바로 채제공에게 고발하였고, 채제공은 정조 임금에게 고발하고, 정조 임금은 양력 6월 27(음력5월 12일)일 밤에 채제공에게 주 신부를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정조 왕의 명령을 받은 채제공은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오늘 중으로 잡아 드리라고 명령하였다. 조규진은 20명의 포졸을 데리고 유진길의 집을 포위하였다.
이 고발로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인도하였다는 죄목으로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1795년 6월 28일 잡히던 그 날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한영익은 그의 배반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였다. 그 해 가을 그는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런 거짓 신자들 때문에 박해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중 특히 김여삼(金汝三)의 배반으로 1801년 조선교회는 200여명의 순교자와 400여명의 신자들이 귀양을 갔다.
또 김여상이라 부르던 김순성은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신자를 자처한 자인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신자들에게 최대의 재난을 초래하였다. 그의 고발로 포교들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북경에 15․6회를 다녀온 조신철(趙信哲) 가롤로와, 북경을 9번이나 왕래하고 변문을 2번 왕래한 정하상 바오로, 사신의 수행원으로 북경을 8번이나 왕래한 역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띠노는 그들의 전 가족들과 함께 붙잡혔다. 해마다 왕래하여 중국과의 관계에 그렇게도 큰 공헌을 하던 유진길 아우구스띠노는 오래 전부터 고발되어 있었다.
가장 열심한 모범으로 위장했던 배교자 김순성(김여상)의 고발로, 앵배르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검거되면서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앵베르 주교 체포의 공으로 김순성은 오위장(五衛將)의 관직을 얻었으나, 1840년 죄인으로 몰려 신지도(新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특사로 풀려났다. 김순성은 그 뒤 덕흥대군(德興大君) 이하전(14대선조의부)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하여 대역부도 죄인으로 참수되어, 그의 시체는 여섯 토막으로 잘려 썩지 않게 소금에 절여져서(달레교회사하권 339) 전국에 끌려 다녔다. 그 앞에는 세 가지 죄목이 달렸다. “이놈은 영신의 스승 앵베르 주교를 배반했고, 임금님께 모반했으며, 제 아비에게 손을 댈 정도로 불효했다.”
그는 양반 출신으로 20세 때 아내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처음에는 천주교회의 법규를 충실히 준수하였다. 그는 한때 신앙 때문에 부모로부터 가혹한 박해를 받았으나 잘 견뎌냈다. 결국 가족 전체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그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아버지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김순성은 30세가 되었을 때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면서 지극히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악한 생활태도 때문에 마음이 변하여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그 후 1838년 11월경에 그는 포졸에게 가서 몇몇 신자를 고발하여 돈을 받고 팔아 넘겼다. 그 다음 그가 알고 있던 신자들의 이름을 적은 수첩을 포졸에게 갖다 바쳤다. 그때 제 2재판소인 포도청 판관인 김영(金煐)과 구신희(具信喜)는 어디서든지 포졸들이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명을 내렸다.
1866년 병인박해 때도 배신자 때문에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했다. 열심한 신자인척한 이선이는 베르뇌 주교의 하인으로 자신이 모시고 있던 주교와 선교사들 그리고 지도급인 평신도들을 고발하였다. 나라에선 선교사를 먼저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침입 사건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궁지에 몰렸던 대원군은 주교들을 만나길 원했었다.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그 소식을 듣고 서울에 올라와 대원군이 불러 주기를 조용히 가다리고 있었는데, 1866년 2월 14일 포졸들이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집에 나타났다. 그들은 대원군이 짓고 있는 대궐을 짓기 위한 추렴을 거두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두 번에 걸친 이 조사에 홍봉주 도마는 겁이 나서,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보내 준 재산과 가장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해 둘 은밀한 장소를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주교는 자신을 위하여 더 안전한 은신처를 고르기를 거절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나를 찾고 있으니 만일 내가 숨으면 전국을 수색할 것이고, 그러면 전반적인 박해가 또 일어날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2월 22일부터 이틀에 걸쳐 밤에 포졸들이 또 와서, 사다리를 놓고 담 위에 올라가 주교 집 내부 구조를 샅샅이 살폈다. 그 사다리는 베르뇌 주교의 하인인 배신자 이선이가 제공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기 주인을 넘겨주는데 그치지 않고 어디 머무르는지를 알고 있던 다른 선교사들까지도 밀고하였다. 2월 23일 하오 4시에 포졸 한 떼가 집에 침입하여 곧바로 주교의 방으로 달려가 오라로 묶었다. 그러다가 주교가 도무지 저항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을 보고 즉시 포송을 풀고 각기 그의 옷소매를 붙잡은 두 병정이 좌우에서 호송하는 가운데 포청으로 압송하였다. 집에 있던 신자 6명도 동시에 체포되었고 이 소란통에 2, 3명은 빠져나가는데 성공하였다. 포졸들을 따라나서기에 앞서 베르뇌 주교는 포졸 두목에게 자기 집에 있는 돈에 대하여 대원군 앞에서 그의 책임을 묻겠노라고 엄명하였다. 과연 꽤 많은 돈이 있었으니, 그렇게도 가까운 것같이 보이던 신앙의 자유에 날이 온다면, 성당과 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얼마 전부터 저축하던 것말고도, 포교성성(布敎聖省)과 영해회(嬰孩會)에서 해마다 주는 보조금을 받았던 돈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포교는 모든 문에 봉인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4일 후에 대원군은 사람들을 보내 그 집을 약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주교 집은 부서져서 네 벽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성가 199. 예수 마음
감곡 성당
성당설명
☏ 043-881-2808
소재지 :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2
감곡 성당의 임 가밀로 초대 신부는 1893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 해 한국에 입국하여 미리내에 잠시 머물며 언어 교육을 받고 부엉골 신학당에 있다가 괴산 충주로 가면서 감곡을 지나다 동산 밑에 커다란 기와집 한 채를 보았다. 그는 그 터가 성당 건립지로써 최적지임을 직감했다. 그 집은 민비(閔妃=明成皇后1851-1895)의 6촌 오빠로써 당시 충주 목사로 있던 민응식(閔應植)의 소유였다.
감곡성당
또한 그 집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피신했던 곳이며 109칸의 대궐 같은 집이 있었다.
1895년 10월 12일 민비가 시해되고 민응식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곳에 의병들이 그 집을 사용하였기에 일본군이 습격하여 주위의 집들과 함께 불질러 버렸다.
임 신부가 이곳의 지형을 처음보고 성당터의 적지임을 깨닿고 성모님께 기도한 후부터 1년 4개월만에 이 터를 사게된 것이다. 우연하게도 성모 성월인 5월에 이 일이 이루어졌으니 임 가밀로 신부님이 감곡 성당을「매괴성모」를 주보로 모심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1896년 9월 17일 부엉골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여 본당을 건립하였다.
명동성당의 축소판과 같은 인상을 주는 감곡 성당은 프랑스인 시잘레(Shizallet)신부가 설계하고 중국인들이 공사를 하였다. 공사를 시작한지 10년만인 1930년에 성당이 완공되었다. 감곡성당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88호로 지정되었으며, 길이 40미터, 넓이 15미터, 종탑 높이 36.5미터의 고딕 양식으로 내부 천정이 돔으로 중앙 제대와 옆면에 각 2개씩 4개의 소 제대가 있다. 내부 정면에 모셔진 매괴 성모상에는 6. 25전쟁 중 인민군이 쏜 7발의 총탄 자국이 지금도 뚜렷하게 보인다. 그 당시 많은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끌고 가기 위하여 성당에 감금하였을 때 갑자기 성수 대가 넘어지는 사건으로 인하여 장정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총 맞은 성모님의 도우심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성당 옆 소 제대에는 순교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가슴뼈와 앵베르 범 주교님, 모방 나 베드로, 샤스탕 정 야고버 신부님의 머리털이 모셔져 있다.
성가 41. 형제에게 베푼 것
베르뇌 장 주교의 편지
說明
순교자인 제 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1858년 8월 14일에 쓴 편지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신자들의 신심과 기적을 보면서 기뻐하였다. 날 때부터 불구자인 황이라는 아이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팔꿈치와 무릎으로 밖에는 다닐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걸어다닐 수 있었던 기적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베르뇌 주교는 동료인 매스트르 신부의 임종을 보고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278-282)
작년에 편지를 보내드릴 시기에는 우리의 전망이 어두웠습니다. 전반적인 박해 이야기가 나오고 이미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겨울에 이곳 저곳에서 신자들이 붙잡혀 갇혔습니다. 아꼰 주교(다블뤼) 구역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포졸들의 추적을 면하기 위해 집과 논밭을 버리고 산골로 피신했는가 하면 그 근방의 다른 가족들은 살길을 찾아 먼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해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잡혔던 사람들은 산골에서 내려오고 역시 도피했던 보좌 주교도 자기 은신처로 돌아갔습니다. 몹시 슬퍼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렇게도 여러 번 혹독한 시련을 겪어온 이 작은 양떼에 연민의 눈길을 돌리셔서 폭풍우가 별안간 가라앉았던 것입니다. 붙잡혔던 신자들은 놓여 나왔는데, 1백 여명의 세대주인 신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관장과 암행 어사에게로 갔던 고발자 중의 한 사람은 결박을 당하고 투옥되고 매를 흠씬 맞았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이 승리는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다만 공포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외교인들을 안심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멀리 이사가는 가족들은 몹시 곤궁하게 되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시련을 동정하면서도 거기에서 초래될 이익에 대한 희망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이 이주자들은 복음의 빛이 아직 비치지 않은 지방에 그것을 가져다주어 거의 언제나 약간의 외교인들을 끌어들입니다. 이것은 폭풍에 날아간 씨앗이 불모지에 떨어져서 이내 그 땅을 기름지게 만듭니다.
개인 영세자의 수효가 올해는 작년 숫자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더 배울 것과 더 오랜 시험 기간을 요구하기로 결의 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예비 신자의 수는 거의 3배로 증가하였습니다. 내 명단에 오른 사람이 근 1.200명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천주께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온 교구 안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을 주시했습니다. 특히 서울에서 많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교리를 배우려고 놀라운 노력들을 하고,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열성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신자들의 이 움직임이 미신자들에게로 옮아가고 서울 밖으로 넘쳐흐릅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양반가 중의 하나가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임금님의 가까운 친척 한 분의 장인인 이 집 가장은 겨울 동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만일 이 집안이 열심 해지면 이 집안에서 많은 개종이 뒤따를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읍내에서는 수단 좋고 열성 가득한 예비 신자가 한사람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관할구역에는 교우촌이 8개소가 생겼고 또 다른 7개소가 내년에 신설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듯 개종은 많은 성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왜냐하면 천주의 뜻이 거기에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년 뒤, 전에 조선 배 한 척이 폭풍에 밀려 광동 해역에 이르렀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허기로 굶고 있었는데, 그때 어떤 영국 배에 발견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만이 구조될 수 있어서 우리 조선 학생들 중 한사람이 있던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 어린 학생이 건강을 회복하라고 페낭에서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섭리는 한 영혼을 구하고, 또 그 영혼과 함께 아마도 다른 많은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서 그를 이용하려고 하셨습니다. 룻세이 신부의 지도아래 난파자인 이 학생은 교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행히 금년에 조선에 돌아와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그에게 책을 주면서 나와 연락을 취할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영리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겨자씨를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비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감동을 주는 신앙과 끈기를 보여주어서, 그중 몇 가지 행위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즐거움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행위들은 여러분에게 유익할 것이고, 또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할 것입니다.
15세 된 어떤 소년이 신자가 되고 싶어서 몇 달 동안에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그 결심을 알고 갖은 방법을 다 써서 결심을 꺾으려고 합니다. 발각되는 날에는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그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줄 것이므로 그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심하게 매질을 합니다. 그는 잠자코 매를 맞다가 아버지가 매질에 지치면 몸을 일으켜 가지고 신자가 되겠다고 항변을 합니다. 이 소년은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께서는 이 신입 교우들의 신앙에 감동되시어, 이 땅에서 피를 흘려 신앙을 용감하게 증거한 이들을 영광스럽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페롱 신부가 내게 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강원도 만산에서 성사 집행을 하고 있던 중에, 날 때부터 불구자인 황이라는 12, 3세 된 아이를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팔꿈치와 무릎으로 밖에는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점으로 본다면 신심이 있고 교리를 꽤 잘 배웠습니다. 그의 처지가 너무나 가엾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전구로 천주께 그를 고쳐 주시기를 청하라고 종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제안이 일종의 불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엄명한 까닭으로 제가 떠나던 날인 11월 30일에 9일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기억나는 대로 중요한 순교자 40명의 명단을 주고 9일기도가 끝나는 날인 성모 원죄 없으신 잉태 대 축일(孕胎 大祝日)에 미사 성제를 드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만산 신자들의 편지에 의하면 그 아이의 병이 바로 그 날 나았다고 합니다. 그가 회복된 시간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도무지 모릅니다. 제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교우촌에서 그 아이의 삼촌이 말한 것으로는 기도문을 외고 신자들이 일어날 때에 그 아이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 그 원인을 조사하고 평가할 수 있으실 한 가지 상황을 말씀 아니 드릴 수 없으니, 그 아이가 아직 지팡이를 짚고야 걸을 수 있다는 점으로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나는 아직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내 관할 구역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병이 나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문서가 충분하고 정확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그 자세한 내용을 적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께서 우리들에게 마련해 주시는 위안입니다. 그러나 시련도 없지 않습니다. 천주께서는 올해에 우리 모두를 몹시 슬프게 한 시련을 보내셨으니 매스트르 신부가 별세한 것입니다. 이 사랑하는 동료가 작년 3월말 성사 집행을 마치고 나를 보러 왔었습니다. 몹시 피로했지만 건강은 좋은 것 같았습니다. 8월중에는 내가 2백 리 떨어진 그에게 가서 함께 하루를 지냈는데 그의 건강은 좋았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지난번 성사 집행으로 인해 피로했다는 것을 알고 좀 덜 고생스러운 구역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11월초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2월 18일 나는 이 사랑하는 동료가 중병이 들어 내가 포교하고 있던 마을에서 80리 떨어진 곳에서 임종하고 있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 나는 급히 떠나 밤에 그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과연 그의 병세는 매우 걱정스러웠습니다. 너무 쇠약해져서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나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잡았습니다. 밤을 넘기지 못할까 봐 염려가 되어 사죄경과 성체를 영해 주고 종부 성사를 주겠다고 했더니 손짓으로 아직 위험이 급박하지 않았으니 기다리고 싶다는 것을 알리며 거절했습니다.
그 이튿날 19일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20시간을 계속 걸어서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그 날 하루를 병자의 방에서 지내며 우리가 마련해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었습니다. 병세가 때로는 약간 희망의 빛을 나타내는 듯 하다가는 이내 사그라지곤 했습니다. 12월 20일 날이 밝기 전에 나는 노자 성체를 영해 주고 종부 성사와 전대사를 주었습니다. 그 동안 병자의 방에서 물러가게 하려고 내가 명령을 했는데도 듣지 않고 있던 많은 신자들이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와 같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던 분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고 성인의 죽음을 지켜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가 혼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오래지 않아 모시게 되었던 천주와 대화를 나누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아침 10시, 11시께 경본을 읽고 있는데,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간다고 알리러 왔습니다. 프티니콜라 신부와 나는 병자의 방으로 가서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움직이지 않고 숨결은 짧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침 정오에 거칠지 않게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 같지 않고 평온하게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 내가 이 소식을 마당에 모여 있는 신자들에게 알렸을 때 진실한 고통을 나타내는 통곡은 그들이 아버지를 잃었음을 온 마을에 알렸습니다. 12월 20일 이날 조선 신자들은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사도를 잃었고 선교사들은 모든 사도적 덕행의 귀감을, 그리고 나는 이 포교지에서 여러 번 유익한 조언을 해준 친구를 잃었습니다.
마침내 12월 25일 밤 9시에 프티니콜라 신부의 보좌를 받고 3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산꼭대기에 마련한 무덤에 시체를 장사 지냈습니다. 매스트르 신부는 우리 신자들 사이에 큰 성덕의 명판을 남겼는데, 그 명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교화가 된 그의 모든 덕행의 근본은 천주의 뜻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는 데 있었으니, 그는 선교사직에 입문한 때부터 천주께 자기를 남김없이 바쳤습니다. 그가 이 포교지에 들어오고자 10개성상을 끊임없이 무익한 걸음걸이를 하는 동안 고통을 얼마나 겪었는지 천주만이 아십니다. 그렇게도 많은 고통을 오랫동안 당하는 중에도 그의 온유함에 어긋나는 일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렇게도 많은 덕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조선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지경이었습니다. 매스트르 신부의 전 생애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내게 말한 한마디 말로 요약됩니다. “천주께 기꺼이 목숨을 희생으로 바치느냐”하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얼마 남아 있지 않는 힘을 다 모아서 “주교님, 저는 첫날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기회에 신자들의 청을 들어 그의 취미에 맞지 않을 것 같은 임지를 그에게 주었더니, 그는 거룩한 선교사다운 이런 말을 내게 써 보냈습니다. “모든 것을 기꺼이 했습니다.”
성가 55. 착하신 목자
회장과 교우들은 함께 보아라
說明
모방 나 신부와 샤스탕 정 신부가 자수하기 전 교우들에게 보낸 하직 편지이다. 두 신부는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전교하고 있었다. 수원에 피신 중이던 범 주교가 교우들의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모방 나 신부와 샤스탕 정 신부에게 자수를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자수의 권고를 받은 신부들은 주교의 명령을 따르기로 하고, 자수하기 전에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와, 부모 친척과 그들이 맡아보던 교우들에게 일일이 하직하는 서한을 보낸 다음 포졸에게 자수하고, 서울로 이송되어 주교와 함께 새남터에서 1839년 9월 21일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자와 증거자들 154-157)
탁덕(羅鐸徳) 모방 나 신부
성경에 천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사랑할 사람이 될는지 못될는지 스스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시니 그러므로 죽을 때 천당으로 갈는지 못 갈는지, 연옥으로 갈는지 안 갈는지, 영복을 누릴는지 못 누릴는지, 영고를 받을는지 안 받을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나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셨으니, 천주를 공경하기 위해서 순교하는 사람은 반드시 즉시 천당으로 가고 즉시 영복을 누릴 것임을 의심하지 말기 바란다. 또 비록 칼 아래 죽지 않고 옥에서 몇 달 몇 해 만에 죽을지라도 마찬가지로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성 시브리아노가 가르치신 의리를 논의하자면, 비록 칼 아래 죽지 아니하나 옥에서 천주를 공경하다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칼 아래 순교한 사람같이 마찬가지로 영복을 얻을 것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실망하지 말고 주를 배반하지 말기 바란다. 무릇 군난(窘難)을 받을 기회를 만나는 사람은 이런 도리를 생각해서 “오늘 나는 의심 없이 천당 참 길로 들어가고 이제 천주를 공경해서 죽으면 천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신과 성인 성녀들과 한 가지로 천주의 영광 가운데 무한한 영복을 누릴 것이며, 형벌을 많이 받을수록 영광이 더욱 많을 것이고, 형벌이 적으면 영광이 적을 것이다.” 하고 군난 당한 이들은 형벌 받을 때와 받지 아니할 때에 이런 생각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며, 또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살 때 받으신 군난을 생각해서, “우리 지극히 인자하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신과 성인 성녀들은 우리를 위해서 전처럼 천주께 구할 것이며, 또 자기와 모든 교우를 위해서 평안히 보호하시기를 기구하여라.
천주의 은혜를 입어서 큰 죄가 없는 사람은 이런 은혜를 보존하고 도리를 배우고 천주와 성교회의 규약을 잘 지킬 것이며, 성총을 잃어버리고 죄를 짖고 지옥으로 내리는 것을 무서워 할 것이며, 만일 불행히 죄를 범했거든 바삐 진실하고 간절한 통회를 하고 천주의 성총을 다시 얻도록 힘써서 천당 길로 돌아오게 하고, 만일 범죄 할 기회를 만나거든, 우리 주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시게 하며 천당을 잃고 지옥에 내리는 이런 해를 생각하면, 어찌 차마 해로운 이런 일을 하겠는가?
신부가 안 계실 때에 교우들이 자녀를 혼인시키려 하거든, 마땅히 두 사람이 다 세례 받은 이와 혼인할 것이며, 만일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세례를 못 받았거든 먼저 요긴한 도리를 가르쳐서, 온전히 예비하게 하고 회장을 청해서 대세(代洗)한 뒤에 고상대전(苦像台前)에서 규례(規礼)대로 혼인 시켜라.
정탁덕(鄭鐸徳 : 샤스탕신부)
천주의 특별하신 은혜로 삼 년을 너희들과 함께 지낼 때 마음의 수계(守誡)를 온전히 하는 것을 기뻐했더니, 지금 이러한 때를 당해서 너희들 환난을 대신해서 당하고 싶으나 법이 없고, 아무쪼록 간신히 숨어서 위로 주의 명령과 주교의 명을 기다리고, 아래로 너희들 목자를 잃는 외로움을 불쌍히 생각했다. 이제 주교의 부르시는 명이 있어서 부득불 상경하니, 너희들은 부디 실망하지 말고 주의 안배 섭리하심을 의지해서 수계를 온전히 하고 주의 명을 기다려서 함께 본향으로 모이기를 바란다. 회장들은 혼배 사정을 돌볼 때 하나가 영세를 못했거든 모든 요긴한 도리를 밝히고 상등 통회(上等痛悔)를 하게 하고, 대세를 받은 뒤 고상 대전에서 규례(規礼)대로 혼배하게 하여라. 할말 못다 한다. 나를 위해 주께 간절히 기구해 주기 바란다. 김 베드로를 시켜서 환난 당한 교우를 위해서 애긍을 청했더니, 너희들이 십분 애덕을 발휘해서 많이 애긍했으므로 주교․신부들이 마음에 심히 기뻐 감사했다. 그것은 서울 옥중에다 요긴히 썼다. 서울서는 꿋꿋이 굴복하지 않은 이가 많으니, 주의 도우시는 은혜에 감사한다. 너희들은 모든 성인들의 표양을 지금 당장 따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 신부 함께 하신 말씀
모든 교우들은 다 함께 돌려보아라. 지금 사정이 할 수 없어 우리들마저 들어가니, 너희들은 순명, 인내해서 수계를 온전히 하고, 또 모든 군난 당한 교우와 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구를 하고, 주교․신부를 위해서 천주께 간절히 기구해라.
이제는 주교와 신부들에게는 육신의 은혜를 베풀 수가 없게 되었으니, 우리 복사하던 사람들에게 우리를 생각해서 각별히 돌보고 서로 의논해서 지내라. 곧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말은 다 못한다.
성가 498. 예수여 기리리다
미사와 제사 문제
說明
유교는 효의 종교라고 할 만큼 효를 중시하여 부모의 생시뿐 아니라 사후에도 제사를 통해 효도를 계속하였다.
예수회의 마태오리치 신부는 중국에 와서 선교할 때 주로 지식층을 상대로 하였다. 뒤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침을 비난하면서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을 반대하였다. 그때 윤유일이 북경에서 받아 온 구베아 주교의 교서대로 유교의 제사를 배척하여 진산 사건이 발생했다. 구베아 주교가 보낸 교서의 가르침에 따라 어머니의 신주를 모시지 않은 윤지충(尹持忠)이 관아에 제출한 공술 내용이다.
미사와 조상 제사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교 문화와의 조화를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창립자인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복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각 민족의 고유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여, 그리스도교를 그 민족 안에 토착화해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선교의 양면성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어느 때는 그 일면만이 강조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 조화를 통해서만 교회는 본연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은,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 사상의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유교는 효의 종교라고 할 만큼 효를 중시하여 부모의 생시뿐 아니라, 사후에도 제사를 통해 효도를 계속하였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질적인 유교식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1세기 동안 논쟁을 벌렸고, 교회에서는 마침내 제사 의례를 미신적인 행위라고 판단하여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한국, 중국, 일본 등 유교 문화권의 극동지방의 선교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약 200년 간 이 금령을 엄격히 준수하여 오다가, 1900년대에 들어서며 교황청의 선교 정책의 변화에 따라 상당히 완화되었다.
유교의 조상 제사의 근본 의미는 복을 구하기 위함이지 다른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녀로서 자기 생명의 근본인 부모와 조상에게 보본(報本)과 보은(報恩)의 효를 계속 실천하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예수회의 마태오 리치는 처음 중국을 선교할 때 주로 지식층과 높은 수준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였다. 조상과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나 존경 의식에 대해서도 그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여, 자녀나 제자가 부모와 스승에게 드리는 효도와 존경의 표현이라고 해석하여 허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예수회의 적응 주의적 선교 방침을 비난하면서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을 미신적 행위라고 반대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데에는 선교 방침의 차이도 있었지만,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코회가 접촉한 중국 사람들은 예수회와는 달리, 주로 서민층이었으므로 그들의 제사에는 민간신앙의 영향으로,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는 점이 다르게 작용하였다.
의례 논쟁의 발단은, 1643년 도미니꼬회원 모랄레스가 예수회 선교 방침에 반대하여, 17개항의 문제를 교황청에 제기함으로써 일어난다. 1645년에 인노첸시오 10세 교황은 모랄레스가 제기한 행위들을 금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어 양편에서 논쟁이 계속되다가 글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칙서를 통해 제기된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이로써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을 금하며, 또한 조상의 위패도 금하였지만 다만 신위(神位)라는 글자 없이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것은 허용하였던 것이다.
1784년에 마태오 리치의 예수회 신부들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조상 제사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790년 윤유일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도미니꼬회의 북경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와 필담(筆談)을 나눔으로써 이해 부족에서 생긴 일이다. 윤유일은 북경에 가서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하는 조상에 대한 봉사를 문의했다. 사사여사생이란 말은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사람과 똑같이 한다는 뜻인데, 조상에 대하여 정성껏 제사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고, 천주 공경의 위반된 행위가 아니었는데도 이 말을 잘못들은 주교는 “그러면 죽은 사람에게 밥을 주면 먹느냐? 술을 따라 주면 마시느냐?” 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니 그런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 후 140년 뒤인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강력한 만주국이 일어났다. 이 신생 만주국은 국민의 단결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공자 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했으며 이로 인해 천주교도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황한 교회 당국은 공자 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만주 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민적 예식일 따름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는 1935년 공자 존경 의식을 허용하였다. 또한 1년 후인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허용하면서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혼인, 장례, 그 밖의 사회 풍습 등에 대해서도 폭 넓은 허용 조치를 취함으로써, 마태오 리치의 적응주의 원칙이 교회의 확고한 선교 정책임을 드러냈다.
193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는, 훈령을 통해 공자 존경 의식에 대해서 그 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존경 의식을 행할 수 있다고 전면적으로 허용했으며, 선조 공경 의식에 있어서는 시체나 죽은이의 상, 또는 단순히 이름이 기록된 위패 앞에 머리를 숙임과 기타 민간적 예의를 표시함이 마땅하고, 타당한 일이라고 함으로써 비록 전면적인 허용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풍속과 사람들의 정신도 변해서 과거의 미신적이던 예식이, 현재에 와서는 존경과 효성을 표하기 위한 민간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한국 주교단은 상례와 제례에 대한 지침으로, 시체나 무덤,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하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는 허용하였지만 지금도 금지하는 예식은, 제사의 축문과 혼령이 제물을 흠향 하도록 잠시 문을 닫는 예식인 합문(闔門), 장례의 혼을 다시 불러 드리는 예식인 고복(皐復), 죽은 이의 혼을 고이 모시고 저승으로 가라는 뜻으로 밥과 신발을 상에 차려 놓는 사자의 밥, 죽은이의 입에 쌀, 조가비, 구슬 등을 넣는 예식인 반함(飯含) 등은 금하고 있다.
미사의 뜻은 빵 나눔, 감사 기도, 제사, 봉헌, 집회 등으로, 미사 용어는 라틴어의 Missa에서 중국어 미살(弥撒)이 한국어로는 ‘미사’라고 발음한 것이다.
5세기부터 서방 라틴 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를 재현하며, 최후 만찬의 양식으로 그리스도 친히 당신 교회 안에 물려준, 카톨릭 교회의 유일한 만찬 제사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신자들은 미사 성제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무한한 구원의 은총에 있으므로, 이제 하느님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희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사는 카톨릭 교회의 거룩한 제사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든 간에 제사를 지내왔다. 제사란 인간이 종교의 본질적 요소인 신, 또는 어느 초월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주 만물과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나 자신을 만드시고 생사 대권을 갖고 있는 하느님이나 어떤 초월자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온전히 바치는 종교 심성을 표현하는 행위가 제사인 것이다.
야훼 하느님은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완전 무결한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그뿐 아니라 지상에서, 우리가 미사 성제인 이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함께 나눌 때에, 우리 순례자의 목적지인 천상에서 이루어질 영광과 승리의 축제를 미리 맛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에서 말씀의 전례가 강조되어 3년을 주기로 신자들이 성서의 중요한 부분을 읽도록 구성되어 있고,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성찬의 잔치를 베푸는 미사 성제는 카톨릭 신자들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며, 원동력인 미사 성제로 하느님 아버지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미사 중에 부모나 죽은 이를 위하여 제사와 잔치의 성격을 조화시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토착화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성가 283. 순교자 찬가
조선교구 제 6대 교구장
리델 이복명 주교
1866년 6월 29일 탈출하여 7월 7월 지부(芝罘)에서 리델 신부는, 천진으로 가서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교회 구제책을 세워 줄 것을 부탁하고, 청국과 일본에서 조선교회 구제를 위해 맹활약을 하고 있던 때인 1869년 4월 27일, 조선 교구 제 6대 주교로 임명되었고, 1870년 6월 교황청에서 주교로 성성되었다. 주교님은 곧 상해로 와서 조선 입국울 계획하던 중, 최지혁 요한이란 조선 교우를 만나 거듭된 박해 소식을 듣고, 조선 입국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청국에 머물면서 ‘한불 자전과 한어 문전’을 편찬하는데 힘쓰며 때를 기다리다가, 1877년 9월 청국 배를 이용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선교회의 책임을 진 리델 이 주교는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산산이 깨진 조선교회를 재건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파괴된 조선교회의 형편을 프랑스와 청국에 알리기 위하여, 그 해 연말에 교우 최지화. 오치옥 등에게 만주에 있는 코스트 고 신부와 뮤델 민 신부에게 편지를 전하려 했는데, 불행히 밀사는 국경에서 잡혀 편지를 압수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리델 이 주교는 밀사들이 국경에서 잡혔다는 소식을 집주인 최 요한에게 듣고, 잡힐 각오를 하고 있으며 이 사실을 블랑 백 신부와 다른 여러 신부들에게 알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78년 1월 28일 예상한 대로 포졸들에게 잡혀 옥에 갇힌 리델 이 주교는 모든 일을 천주께 맡겼다. “예수 만세! 머지 않아 나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하고 사형 선고를 기다렸으나 어찌된 일인지 조선 정부에선 주교님을 좋게 대우하였으며. 예상외로 집주인 최지혁 등과 같이 한방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주교는 약 5개월 간 옥중 생활 끝에 청나라 요청으로 조선 정부에서 1878년 5월 11일(양력 6월 11일) 리델 이 주교를 죽이지 않고 청국으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주교와 같이 옥에 갇혔던 충실한 주교의 안내자인 최지혁은 70세 나이로 그 해 7월에 옥사했으며, 다른 여러 교우들과 그의 아내 이애기 루시아도 옥사하였다. 리델 이 주교는 추방된 그곳 만주에서 편찬이 끝난 ‘한불 자전과 한어 문전’을 일본 요꼬하마로 보내 간행하였는데. 이 두 가지 책은 우리의 한글 자전과 문법책으로써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 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주교는 출판을 끝마친 1881년 3월 중풍에 걸려 일본 홍콩 등지에서 치료를 받다가, 조선 교구의 총 책임을 블랑 백 주교에게 맡기고, 본국으로 귀국하여 1884년에 선종 하였다.
조선교구 제 7대 교구장
블랑 백규삼 주교
리델 이 주교가 밀사 사건으로 감옥 생활 5개월만에 석방되어 청국으로 추방된 후 중풍 병에 걸려 재생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1882년 조선교회의 총책임자를 블랑 백 주교로 선정하여 주교 직분을 맡기고 그를 주교로 선정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정식 임명장을 블랑 백규삼 신부에게 내렸으며, 1883년 7월 8일에는 일본 나가사끼로 가서 주교품을 받고 조선으로 되돌아온 블랑 백 주교는 1884년 6월 리델 이 주교가 선종 함으로써 조선교회 제 7대 교구장으로 교회를 맡게 되었고 황폐해진 교회를 재건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블랑 백 주교는 1866년 12월 22일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서품을 받고 이듬해 2월 15일 파리를 떠나 만주로 갔다. 이때 병인박해로 두 주교를 잃고 중국으로 피신한 리델 신부를 만나 조선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년 동안 리델 주교을 도와「한불 자전」의 편찬을 도왔다. 드디어 1876년 5월 8일 리델 주교는 드게트 신부와 함께 입국하였고, 용인지방에서 전교에 힘쓰면서 방인 사제 양성에 노력하고 있을 때인 1878년 1월 리델 이 주교가 밀사 사건으로 체포되고 그 해 6월에 석방과 동시 청나라로 추방되는 사건이 일어나 부주교로서 조선교회를 이때부터 이끌어 가기 시작하였다.
1882년 5월 한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블랑 백 주교는 머지 않아 종교 자유가 올 것을 예견하고, 1883년부터 종현 언덕에 땅을 교우 김 가밀로의 명의로 부분적이나마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또 한편으로 페낭으로 유학간 조선 신학생들이 그곳 풍토에 맞지 않으므로 어려움이 많아 1885년부터는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 양성에 힘썼다.
또한 같은 해 주교님은 5년 간 이 땅에서 전교 활동을 하면서, 조선 실정을 잘 알고 있는 뮤델 민 신부를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으로 전임시키고 본국 정부와 손을 잡고 한불 수호조약을 맺도록 일을 추진하게 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 하에서도 신념을 가지고, 성당 건립 터를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종현 언덕에 있던 윤 대감 댁도 사고, 수십 칸의 기와집을 개수하여 종현 학당을 개설하면서 좀 더 땅을 사들인 것이 지금의 명동성당 터를 마련한 것이다.
1886년 6월 마침내 한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자 주교님은, 이듬해 겨울부터 성당 건립을 위한 정지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성당건립 문제로 인한 조선정부와의 마찰이 생겨 장기간의 교섭 끝에 매듭을 짖고, 건축 허가를 받아 냈다.
1890년 2월 2일에는 성모님께 감사의 장엄미사를 드리고 주교관부터 짓기 시작하였지만, 거듭되는 격무로 주교님은 중병에 걸려 애석하게도 2월 21일 46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 하였다. 주교님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 하셨고, 사제 양성을 위해 용산 함벽정(지금의 원효로 4가)에 성심 신학원을 세웠고, 성당 건립에 필요한 대지를 확보하였다. 성서 출판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진출 등 교회 백년대계의 주춧돌을 세웠다. 주교님은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 되셨다.
조선교구 제 8대 교구장
서울교구 초대 교구장 뮤델 민덕효 대주교
블랑 백 주교의 뒤를 이어 조선교구 제 8대 주교로 임명된 뮤델 민 주교는 1880년 이 땅에서 전교 하다. 1885년 초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어, 본국 정부와 한불 수호통상조약을 맺도록 추진하였던 조선 사정에 정통한 분으로, 1890년 8월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자 기쁨을 금치 못 하였다. 주교님은 그 해 9월 21일 파리 신학교에서 주교품에 오르셨고, 후임 교장으로부터는 ‘활짝 피어라 순교의 꽃’이란 표어를 받으시고,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진 이 땅에 1891년 2월 22일 다른 두 신부와 합께 입국하였으며, 새로 세워진 명동의 2층 벽돌집인 주교관으로 입주하였다. 뮤델 민 주교는 6년 만에 조선 땅을 다시 밟고 보니, 교회는 박해의 그늘에서 벗어나 햇빛을 보고 큰 발전을 하였으며, 1만 8천여 명이란 교우를 이끌어야 했다. 주교님은 전임 블랑 주교가 계획했던 성당건축 등 많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우선 그 해에 준공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의 축성식을 올리고, 1893년 9월 25일에는 우리나라 첫 번째 성당인 약현성당(중림동 성당)을 축성하시고, 1892년 5월 8일 많은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동성당 머릿돌을 축성하시고, 기공식을 본 명동의 종현 성당은 워낙 힘든 큰 공사인데다, 1894년에는 동학난으로 인한 청일전쟁까지 겹쳐 전후 6년이란 세월이 걸려,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 축일에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뮤델 민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올렸다. 뮤델 민 주교는 조선교회의 순교의 꽃이 만개 되기를 기원하면서, 믿음과 계속된 노력으로 차츰 교세는 원산과 평양, 멀리 간도지방까지 전교의 손을 뻗쳐 복음을 전했으며. 고종의 어머니(대원군 부인)에게 민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또한 주교님은 병인박해로 숨져간 순교자들의 목격자 담을 전국적으로 모으고, 8백 76명의 순교자 약전이 수록된 책 치명 일기를 1895년에 발간하였다. 뮤델 주교가 이러한 뜻깊은 일을 할 때,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압력을 받기 시작하고, 시민평등의 제도를 쓰기 시작함으로써 조선 정부는 특사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명예회복과 노비로 입적된 가족들을 풀어 주는(순교자들의 가족) 특사였다. 이런 과정에 문서도 정리하게 되었는데, 구문서 정리 중 교회박해 때의 문서들이 많이 나왔다. 주교님은 아는 사람으로부터(교회 박해 때) 이 문서들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안에는 1801년에 순교한 황사영의 「황사영 백서」라는 비밀문서까지 입수하게 되었다.
주교는 이것을 영인본으로 만들어 학계에 나누어주고,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때 참석한 뮤델 민 주교는 ‘황사영 백서’ 원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쳤다.
교황께서는 조선에서 전교의 공을 세운 뮤델 민 주교에게 1926년 1월 11일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대주교의 칭호를 내렸다.
그런데 이때에도 오점은 있었으며, 한때 안중근 도마 의사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외면한 점, 빌렘 홍 신부가 여순 감옥에서 어렵게 종부 성사를 줌과 1919년 3․1 운동 때 교회의 태도, 신사 참배 등의 오점도 많았으나. 민족의 아픔보다 현실로 교회의 보호에 역점을 둔 것은 외국인 주교의 산물이었다.
조선교구는 전국의 신자 수가 8만여 명에다 예비 신자도 날로 불어나고 있었는데, 교황 비오 10세는 1911년 4월 8일자로 조선 교구를, 서울 교구, 대구 교구로 나누고, 뮤델 민 주교에게 서울 교구를 맡게 하고, 대구 교구는 드망즈 안 신부를 그 해 6월 11일자로 주교품을 주고 다스리게 하였다.
그 후 1920년에는 서울 교구에서 원산 교구가, 1927년에는 평양 교구가 분리되었고, 1909년에는 성베네딕도 수도회가 뮤델 민 주교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하는 등 눈부신 교회의 발전이 있었다.
1933년 1월 23일 다사다난했던 43년 동안 전교와 빛나는 교회의 발전을 이룩한 서울 교구장 뮤델 민 대주교는 80세로 선종 하였고, 현재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 되셨다.
군란 중에 주거생활
窘難中에 敎友 避身
공소회장 이 안드레아는 이 신부를 모시고 깊은 산에 들어가 생계를 위하여 숯가마를 만들고 숯을 굽기 시작하였고, 틈나는 대로 짚신을 삼아 팔기도 하였다. 그래도 밤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하다. 이 신부는 안심이 되지 않아 낮에는 박쥐처럼 윗방 구석에 가만히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어야 마당에 나와 거닐며 신선한 공기를 힘껏 마신다. 이 안드레아는 날마다 숯을 굽고 짚신을 삼기에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그의 부인 마리아는 남편이 하는 일을 거들면서 틈나는 대로 부지런히 나물을 뜯어 온다. 될 수 있는 대로 양식을 늘여 먹기 위해서이다.
끼니때가 되면 윗방에 리델 신부 앞에는 조밥이 반 그릇이 담긴 귀 떨어진 사발 한 개와, 나물국이 담긴 표주박 한 개, 나물 무친 것을 담은 작은 뚝배기 한 개가 방바닥에 놓여있고, 그 위에는 나무 회초리를 꺾어 다듬은 젓갈이 놓여진다. 그래도 이것은 특별한 대우이다. 아랫방 이 회장 식구들은 곡식알이 희끗희끗 보이는 멀건 나물 죽을 바가지에 담아놓고 훌훌 들이마시고 마는 것이다. 식구는 이 회장 내외와 그의 열살 된 딸 점순이 안나와 이제 겨우 일곱 살 된 복순이 데레사와 신부까지 모두 다섯 식구다. 포졸들이 마을에 불을 질러 갑자기 쫓겨 나왔으니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이 안드레아 내외의 큰짐이 되었다.
회장 내외는 자기들도 신부와 다름없이 밥과 나물국을 똑같이 먹는다고 말하였으나 이 신부는 차차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회장 내외가 산에 간 다음, 신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복순이를 보고얘, 너희들 죽 먹기 싫지? 밥 먹고 싶지 않으냐?
하고 물어 보았다. 복순이는 대답을 않고 점순이 얼굴을 쳐다본다. 만일 신부가 너희들도 밥을 먹느냐고 묻는다면예, 우리들도 밥 먹어요.”
하고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얼른 대답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묻지 않고 이렇게 묻는데는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으냐고 언니의 뜻을 살피는 얼굴이 천진스럽기도 하다.
괜찮아요. 우리도….
하고 점순이가 대답하려 드는 것을 신부는 가로막으면서
얘, 참 아까 짜게 먹었더니 목이 마르다. 가서 물 좀 떠오너라
하여 점순이를 내보냈다. 그리고 나서
그래 언제 밥해 준다고 하던?
하고 복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저 숯 다 구어서 팔면 밥해 준다고 그랬어요.
하고 복순이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다. 신부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점순이가 바가지에 냉수를 떠가지고 들어왔다. 그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살피는 눈치다. 신부는 목이 마르기나 한 듯 냉수를 벌떡벌떡 들이켰다.
그 날 저녁 신부는 밥 한 그릇이 들어온 다음, 아랫방에도 음식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기침을 한번하고 아랫방 문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하고 회장 부인 마리아가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여쭈었다. 신부는 아무 말도 없이 방바닥에 놓인 죽 그릇을 살펴보더니
글세, 이게 무슨 짓이냐! 굶으면 같이 굶고 먹으면 같이 먹는 것도 내게는 과하거늘,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밥을 주고, 너희는 어린것까지 저렇게 멀건 죽만 먹다니. 어서 내 밥을 갖다가 모두 섞어 한 그릇 주면 먹고, 그렇게 안하면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 차라리 포졸에게 잡혀가서 마음 편히 있을지언정 이런 괴로운 생활은 하기 싫다.”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성지 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제 2차 단내성지, 어농,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성지.
제 3차 치명자산성지,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성지.
제 4차 배론성지, 묘재, 부엉골신학당, 세종대왕 능.
제 5차 갈매못성지, 다락골줄무덤성지, 홍성읍성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선종지, 연풍 성지,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성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숲정이성지, 천호산성지, 성거산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골배마실.
제12차 초남이 유항검 생가, 나바위 성당.
제13차 해미성지, 솔뫼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성지, 이승훈묘성지, 남양성지.
제15차 대구 관덕정성지, 한티성지, 신나무골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및 도착 : 아침 8시 신청한 성당에서 출발 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저동 1가 2-3 평화빌딩 3층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