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었죠. 영화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살고 있는데,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안되겠다 싶었어요. 노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제 막 미성년을 벗어나는 애들만 데려다 재미만 좇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나이 든 김지미를 써 줄 리가 있나요.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티켓’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 주제를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이 ‘길소뜸’ 촬영을 할 때였어요. 속초에 가서 여관을 잡고 1박을 하게 됐죠. 상의를 하느라 다방에 커피를 시켰더니 배달이 안된대요. 티켓을 끊어야 된다는 거지.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건 그 때 처음 알았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정일성 촬영기사하고 송길한 작가, 임권택 감독, 저까지 네 사람이 귀가 번쩍 뜨였어요. 티켓이 15분짜리가 있고 밤을 새면 얼마고 어쩌고 해서 한참을 설명하더라고요. 좀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싶어 계속 티켓을 끊어가며 아가씨들한테 이야기를 들었죠.
‘이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회고발성 영화를 만들자고 의기투합은 했는데 제작자가 없잖아요. 그러니 그냥 내가 한 거죠. 그랬는데 영화를 만들고 나니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상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때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코앞이라 안 된다는 거였지요. 결국 공윤에서 열두 군데가 잘렸어요.”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연기인생을 통틀어 (김지미씨가) 처음으로 옷을 벗었다는 거죠. 그 장면이 상당기간 인구에 회자됐습니다.
“벗기는 걸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었어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벗는다고 흥밋거리가 되겠어요? 작품의 흐름상 그 장면이 꼭 필요하니까 벗은 것뿐이죠. 지금에 와서 얘기지만 저는 감독에게 자꾸 끊으라고 했어요. 괜스레 선정적인 걸 노린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감독이 계속 가더라고요. 솔직히 나는 별 감정도 없고 감각도 없었어요.”
“모든 작품은 나의 분신”
-수많은 출연작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혹은 가장 중요한 작품을 꼽는다면 어떤 영화였을까요. 또 함께 일한 감독 중에서는 누구를 최고로 꼽으시겠어요.
“글쎄요, 출연한 작품은 전부가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나는 아무리 바빠도 개봉 날에는 꼭 극장에 갔어요. 물론 그 중에는 ‘내가 그걸 왜 했나’ 싶은 영화도 있죠. 그렇지만 결국은 모두 내가 내 일부를 나눠준 작품들이니까요.
그래도 참 잘했다 싶은 영화는 역시 ‘티켓’이에요. 자기 스스로 세상을 개선하기에는 힘겨운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어서 좋았고, 알려지지 않았던 그늘을 사회에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죠. 작품성이나 흥행 여부를 떠나 잘했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다들 유형이 달라서 누가 낫다 못하다를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죠. 단 배우의 내면에서 뭔가를 굉장히 섬세하게 끄집어내는 능력은 김기영 감독님이 탁월했죠. 임권택 감독도 훌륭했고요.”
맞지 않는 퍼즐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만, 김지미씨는 지금까지 있을 수 있는 모든 남성상과 살아보거나 연애해 봤습니다. 연상의 남자 홍성기 감독, 연하의 남자 나훈아씨, 유부남이었던 최무룡씨, 똑똑하고 지적인 이종구 박사. 그 가운데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이던가요.
“다 좋지 않으니까 이혼했겠죠.”(웃음)
-예를 들어 딸이나 후배가 있는데 결혼을 하겠다 한다면 어떤 남자랑 살아보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어떤 남자라는 게 따로 없어요. 딱부러지는 답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맞춰가면서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서로 노력해 맞춰봐도 안 맞는 수가 있어요. 퍼즐을 맞출 때도 안 맞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포기해야죠. 안 맞는 퍼즐은 밤새도록, 며칠을, 몇 년을 해도 해결이 안 되죠.”
-퍼즐처럼 딱 맞는 커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없죠. 말하자면 얼마만큼 근사치로 맞춰가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성간에 순간적인 호감은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걸로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리 관찰해봐야 모르는 건 평생을 살아도 몰라요. 그러면 왜 그렇게 여러 사람하고 연애하고 데이트하고 결혼하고 다 했으면서 성공을 못 했느냐? 결국 내가 부족한 거죠. 내가 적응을 못했다고 볼 수 있죠.”
(계속)
-팝스타인 마돈나가 출연한 영화 중에 ‘진실 혹은 대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누군가가 마돈나한테 질문을 던지죠. 누구를 가장 사랑했느냐고. 그러니까 마돈나는 딱 잘라서 그래요. ‘숀펜.’ 자기 전 남편인 숀펜을 사랑했다고 아주 대담하게 말합니다. 김지미씨도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습니까?
“마땅한 사람이 없네요. 굳이 누구를 꼽자고 한다면 그래도 자식을 같이 낳은 최무룡씨. 그 분 인간성이 참 좋아요. 대신 맺고 끊고 자르는 부분이 좀 부족하죠. 그런 부분을 내가 제일 싫어했거든요. 성격 좋고 동료애 많은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요즘에는 ‘인간성 좋다’는 말이 남의 말 거절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죠. 거절 결핍증 걸린 사람이지.”
-최무룡씨가 작고하기 전에 한국일보에 연재를 하신 게 있어요. 굉장히 자세히, 솔직히 연재해서 깜짝 놀랐어요. 김지미씨하고는 홍콩에서 첫 밤을 보냈다, 이런 것까지 쓰셨거든요.
“아니에요. 서울이었어요. 여기서 처음 남녀관계가 이루어졌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홍콩에서 만났다는 건 그 사람 얘기고, 제 기억은 달라요.”
1963년 김지미는 유부남인 최무룡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최씨의 아들민수씨가 백일무렵의 일이었다. 이미 최무룡에게는 10년 동안의 결혼생활에 세 딸과 아들이 있었다. 당시 부인이던 강효실씨보다도 장모이며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던 배우 전옥씨가 더 진노했다고 한다. 1962년 10월31일 김지미 최무룡 두 사람은 간통죄로 구속되었고, 수갑을 찬 손을 맞잡고 그 유명한 ‘악마의 미소’를 흘린다. 훗날 최무룡씨는 당시의 미소가 회심의 미소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만 서면 흘러나오는 ‘습관성 미소’였다고 술회했다.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결합을 위해 그때 가진 모든 것을 강효실측에 주었다. 그들의 이혼과 재혼은 언론의 커다란 화젯거리였고, 간통에 대한 비난 여론 못지않게 솔직한 이들의 사랑을 지지하는 팬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14년이 지난 1976년, 당시 36세의 김지미와 20대 후반인 나훈아의 결혼은 다시 한번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고의 인기가수이자 연하남인 나훈아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 언론은 ‘돈과 육체와 섹스로 합성된 것’이며 부도덕의 대표적 케이스라는 맹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김지미의 사랑이야기’라는 특집호를 찍었던 것도 바로 언론이었다.
-촬영이 있을 때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셨어요?
“경제적으로 여유로웠으니까 유모를 두긴 했지만 아이들이 외롭게 컸어요.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주 잘해요. 예전에 못했던 부분을 이제라도 하려고요. 가족들한테 영화배우 티를 안 내는 것도 그 때문이죠.”
매맞을 각오를 하고
-상당히 이른 나이에 첫 결혼을 하셨는데, 왜 그러셨어요?
“열일곱 겨울에 데뷔해서 열여덟에 영화가 흥행했고 그 다음해에 홍성기 감독하고 ‘산너머 바다 건너’부터 일을 같이 했죠. 1959년, 한국 나이로 스무 살 때죠. 그때 그 사람은 완전히 한국 영화계에서 군림하고 있는 감독이었고 나는 신인배우였어요. 그가 끈질기게 결혼하자 그러니까 결혼해야 되는 건가 보다 했겠죠. 스무 살이라고 못 하란 법은 없잖아요, 성인이니까. 너무 일찍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왜 결혼했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때 만남이 잘못된 거겠죠. 너무 일찍 만났다는 것, 그거겠죠.
솔직히 나는 지금 결혼식에 관한 기억도 안 나요. 너무 경황 없이 바쁜 상황에서 했기 때문에, 결혼도 이게 촬영인지 진짜 결혼인지 혼동할 정도였어요. 아마 그때 결혼식 끝나고 그 예식장에서 바로 영화촬영을 했을 거예요.”
-최무룡씨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이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무렵 내가 접하는 남자는 온 세상에서 최무룡씨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여기서 촬영이 끝나면 같이 이동해 저기서 다시 촬영하고, 저기서 끝나면 또 그 다음 장소로 같이 가는 거예요. 가족보다도,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를 제일 많이 이해했고 나도 그 사람을 많이 알게 됐죠. 좁은 활동반경 속에서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내다 보니까, 컴컴한 촬영소 안에서 밤낮없이 얘기하고 러브신하고 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친해졌던 것 같아요.”
(계속)
“싫으면 싫다고 해야죠”
초반에 한 시간으로 못박았던 인터뷰는 어느샌가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밖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손님이 앉아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고를 시간이다.
예전에 그녀는 어느 인터뷰에서 “평생 매 맞을 각오하고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결혼도 이혼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에는 언제든지 실행에 옮겼다. 젊었을 때나 나이든 후나 마찬가지였다. 고민의 시간은 길어졌을지 몰라도 언제나 결론은 한결같았다.
-김지미씨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왔습니다. 감정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았고요.
“나는 나 자신에 충실해요. 처음에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행동이나 말이나 거짓이 없어요.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에요. 참고 속이고 위선 떨고, 나는 그런 것 못 해요. 인간으로서 가장 나쁜 게 위선이거든요. 나는 그걸 제일 싫어해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싫으면 싫다고 해야죠. 많은 사람이, 많은 남녀가 적당히 살면서 위선적으로 구는 거, 이거 속 울렁거리는 일 아닌가요? 확실하게 자기가 책임져야죠. 책임 못 지면 손 들어야 하는 거고.”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감히 누가 저렇게도 도도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누가 그렇게 마음껏 살 수 있단 말인가. 열일곱 살에 데뷔해 수십 년 동안 숭배의 시선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여배우, 김지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심 영 섭
● 1966년 서울 출생
● 서강대 생명공학과 졸, 고려대 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 제3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등단
● 고려대·상명대 영화학 강사
● 저서 : ‘영화 내 영혼의 순례’ ‘심영섭의 시네마 싸이콜로지’
그녀는 최무룡씨와 헤어질 때,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얼마 전의 인터뷰 기사에는 그녀가 몇 달 전 한 언론인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아주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는 구절도 있다. 결혼도 한 번만 하고 아이도 적게 낳고, 편안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고만고만한 스트레스를 받는 동네 아줌마로 살고 싶다고…. 문득 전혀 다른 두 캐릭터가 함께 담겨 있던 영화 ‘장희빈’ 속의 그녀가 떠올랐다. (끝)
첫댓글 올려주신 글, 덕분으로 잘 읽었습니다... 선샛대로- 노역의 그로리아 스완스이 생각납니다만, 스타의 아류에서 당당히 독립한 영화인 김지미씨가 더 현명하고 폭넓죠.
역시 이시대 최고의 여인입니다 왜 ? 대한의 여인들은 제 감정에 솔직 하지못할까 ? 누구에 삶에 내인생을 짜맛추고 사는건지 부럽기만 합니다 ...너무도 당당한 김지미씨 ...자기 감정에 충실할수있는 사람 ...올려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가슴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