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순례(孝昌公園巡禮)
지난 금요일(21일) 아침에 일어나니 왠지 "효창공원" 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때 가보곤 지금껏 가보지 못했던 곳 이기에 궁굼 하기도 하고 가족들은 모두 출근하고
나홀로 특별히 할일도 없는 것 같아서 카메라 만 챙겨 전철을 타고 용산 으로 갔다.
효창공원(孝昌公園)은 원래 정조대왕 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 와
그의 어머니 의빈성씨의 무덤으로 효창원(孝昌園)이었으나,
두 무덤은 서삼릉으로 이장을 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으로 바꾸었다.
현재는 백범 김구선생 의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이동녕, 군사부장 조성환, 비서부장 차이석의 墓所와, 尹奉吉義士· 李奉昌義士·
白貞基義士의 묘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지와 安重根義士 유해(遺骸)가
봉환되면 묻힐 장소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지금의 공원형태가 아닌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인적도 드물었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효창원' (孝昌園)이라 불렀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300여명이 요창원 앞 송림 내의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였던 만리창이 있던 곳에 야영을 하며 숲이 파헤쳐지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제에 의해 '구(舊)용산고지' 라 불리며 일본군이 숙영목적과
독립군 토벌 및 소탕작전 등을 펼쳤던 비밀작전지 로도 사용되었고, 문효세자 의
릉침이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전하면서 1940년 조선총독부고시 제208호에
의해 '효창공원'이 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되어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 및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등의 3인 유해가, 1949년 7월에는
백범 김구의 유해가 이 공원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989년 사적 330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에는 주변에 백범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또한 원효대사 동상, 반공기념탑,
효창운동장 이 자리하고 있다.
1956년 정부에서 독립운동가 들의 묘(墓)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 을 建立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6월9일 大韓民國 國會에서 김두한 의원은 "선열에 대해서는 물질보다
추모의 정신으로 보답해야 하는 만큼 우선 정부는 분묘에 대한 모든 절차를 결정한 후에
運動場 설비공사에 착수했어야 할 것이라." 말하고 "효창공원의 先烈墓地는 聖墓이다.
이 성묘를 함부로 파서 헐어 트리는 것은 생명을 조국광복에 바친 선열에 대한
도리(道理)가 아니다."라고 성토하였다.
그후 공사중지건의안은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효창운동장의 공사는 강행되었고 1960년에는 운동장이 준공되기에 이르렀다.
1961년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대통령 역시 골프장을 만들려는 공사를 시도하다
저지당하고 1969년에는 효창공원에 반공투사 위령탑 1972년에는 김구선생 의 묘 옆에
노인회서울시연합회와 대한노인회중앙회 시설을 세웠다.
露傘 以善勝之
효창공원 입구에 어느 노인이 참새들과 놀고 있다
다른새 와 달리 참새는 영리하고 사람을 따르지 않아 포획하기도 어려운데 이곳 참새들은
사람을 무서워 하지도 않고 노인의 정성으로 사람과 많이 친해진것 같다.
참새들이 노인의 손에도 가득 모여드는것이 너무나 신기하기만 하다.
시골에 살때 보면 절대로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이 길을 걸어갈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내가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말,,인데.., 김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효창공원 들어가는 門 이다.
연못
초정(草亭)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감동의 "편지전문" 올려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抗訴)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日帝)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때 安重根義士 나이가 31살 이였고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48세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위대한 어머님 이시다.
나는 예전에 이글을 읽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이곳에 안장될것 이라 한다.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잠을 어이지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안중근-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首傀)를 도륙(屠戮)하기를 맹세 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 봉 창
이때 이봉창 의사 나이가 31살이다.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 동포 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 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번의 가장좋은 기회를 포착 하였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윤봉길-
윤봉길 의사 는 이말을 남기고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 하셨습니다.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설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 하여 출옥한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례의 영예 를
위하여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 으로 매진하기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위에 놓아 주기 바랍니다.
백정기 의사 가 이시하마 감옥에서 운명하기 며칠전 같은 감옥에 같혀있던
동지 이강훈, 원심창 의사 에게 남긴 유언(遺言)이다.
이때 백정기 의사 의 나이가 38세 젊은 나이다.
이곳에는 護國義士 들의 愛國愛族의 恨 이 서려 아직도 無窮花가 싱싱하게 피어나고 있는것 같다.
백범 김구선생님 묘소
김구 선생님 의 비문(碑文) 이다.
엉청나게 큰 팽나무가 거기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것이 없는것 같다.
金九先生 墓域 에서 筆者
독립군가(獨立軍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