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은 삶이 황량해지는 계절입니다. 풀과 나무들의 초록이 짙어지는 춘삼월에서 유월까지, 농사하는 농사꾼들은 온몸의 뼈가 무르도록 혹독한 노동에 자기를 내몰아야 합니다. 소처럼 일만 하며 살아온 농사꾼 중에 간혹 멜랑콜리한 이들이 “왜 사냐?”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이 유월입니다. 그 물음은 공허하고 황량합니다. 그래서 젊은 아비들은 외상술에 취해 그 허무를 온몸에 칭칭 감고 달을 보고 짖는 개처럼 큰소리로 꺼이꺼이 울기도 합니다.
그래도 해가 뜨면 지난 밤 온몸을 감고 있던 삶의 허무를 툭툭 끊어내고 헤라클레스처럼 일어나 다시 밭으로 가야 합니다. 아침 이슬의 싱그러움을 지나 다시 해가 정수리를 향해 가는 땡볕 가운데 설 때, 온몸의 근육은 고무줄처럼 늘어지고 태양은 허기를 더욱 부채질합니다. 이 때가 무어라도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시간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생의 벼랑 끝에 허기가 걸리면 먹고 사는 일이 짐승과 다름없는,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먹어야 합니다. 화려한 밥상, 풍요로운 밥상을 상상하는 것조차 사치가 되는 가난한 농사꾼은 그래서 여물을 먹듯 밥을 먹습니다.
이제 막 수확한, 시커먼 겉보리 밥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반찬은 마늘과 고추장이 전부였습니다. 밥 먹는 시간을 아껴 노동에 더 많이 투자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먹고 허기를 속일 수 있는 패스트푸드가 보리밥에 마늘과 고추장이었습니다. 시커먼 보리밥 한 술에 마늘을 고추장에 푹 찍어 아작아작 씹어 먹는 것, 그것이 유월 농사꾼 최상의 식사였습니다. 매운 마늘과 매운 고추장이 입안에서 만나는 것은 가난한 인생이 팍팍한 돌밭에 비지땀을 섞는 것만큼이나 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달한 마늘의 매운 맛 뒤에 숨은 은근한 향은 오래 함께 묵어 깊어진 여인네처럼 아름답습니다.
단군신화는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늘은 곰을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보았던 게지요. 그런데 그것은 마늘 자체의 신비한 효능이 아니라 마늘을 통해 새롭게 열리는 깨달음의 세계에 있습니다. 곰은 삼칠일(三七日) 동안 빛이 없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완전성을 상징하는 3x7일과 빛이 없는 동굴은 시각이 차단되고 미각과 후각이 새롭게 열리는 시공간이었습니다. 곰은 시각만으로 사물과 세계를 단순하게 인식하는 편협한 동물성에서 맛과 냄새를 통해 새로운 인식 체계를 갖게 되는 인격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늘은 새로운 인식체계, 새로운 자아, 새로운 세계의 문이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지식과 정보가 넘쳐흐르는 현대사회는 오히려 동물적 단순성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고대나 중세에 비해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이 시각적으로 단순화되고 다른 감각기능들은 무디어졌습니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감각 도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은 시각적인 단순성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시각화된 세계는 이미지가 지배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인식체계도 시각적 단순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집, 좋은 차, 명품 같이 시각적 정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단순하게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곰이 된 것입니다.
곰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동물적 경쟁으로 사람을 내몹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비정한 야수의 세계가 됩니다. 이런 세계에 선한 양심이라고 갖게 되면 세계는 황량하게 보이고 존재는 우울해 집니다. 그래서 삶이 멜랑콜리할 때는 생마늘을 먹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진실인 양 하는 사회,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 황량하기 그지없는 곰들의 세상에서 나를 인간으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선 생마늘을 먹어야 합니다. 혀의 돌기에 위에 내리는 눈꽃 같은 매운 맛과 후두를 넘어 코끝으로 흐르는, 달콤한 마늘의 향연(香煙)을 통해 깨어나야 합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세상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그대여, 눈을 지그시 감고 생마늘을 먹으라. 그리고 깨어나시라. 다시, 사람으로......
첫댓글 저는 생마늘과 고추장 대신 풋고추와 된장을 먹어볼랍니다ㅎㅎ
가난한 농사꾼의 밥상을 생각하며 힘겨운 하루도 버퇴낼 힘을 얻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