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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우님의 글 江南강남이 어데메뇨에서 별건곤 최남선의 소설 속의 이야기인데, 女眞族여진족으로 말하면 本來본래가 朝鮮種族조선종족과 한가지로 大扶餘族대부여족이며 高句麗族고구리족이 아닙니까..별건곤 사설 제 2호에서는 청이라는 나라자체가 배달국 조선의 별종이네요. 결론은 한족의 자존심 중화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역사 조작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잡지명 | 별건곤 제2호 |
발행일 | 1926년 12월 01일 |
기사제목 | 中國의 一代風雲兒 - 孫文, 黃興의 처음 握手 |
필자 | 金振九 |
기사형태 | 논설 |
中國의 一代風雲兒 - 孫文, 黃興의 처음 握手
金振九
自尊, 自大, 傲慢, 頑强 그것이 스스로 그네의 國民性이 되어 잇서서 自國을 中華라 칭하야 그의 문화와 그의 역사를 絶對崇奉 하는데 따라서 그 반면으로 혈통이 다른 他種族에게는 이대까지든지 輕蔑하고 배척하야 『오랑캐』(五*犬)라는 一種 侮辱的 용어를 써서 一言之下에 남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罵倒해 버리는 것이 과거 中國人의 특성이엿섯다.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 조다 中國人의 自尊心에서 나온 排他的 侮辱語이다.
그러나 최근 1000여년 동안에는 그네의 역사의 全面이 거의 이 『오랑캐?』에게 汚點을 찍혀버렷다.
漢族은 倍達族인 遼 金 淸과밋 蒙古族인 元에게 여지업시 迫害되고 유린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이 漢族으로는 切齒痛恨할 一大恥辱인 것도 또한 속힐 수 업는 사실일 것이다.
愛親覺羅氏의 천하가 300년 동안이나 나려오는 사이에 漢 滿兩族間에는 쉴새업시 규탄, 軋轢, 암투가 계속해왓다. 그 말로에 잇서서 興中會를 비롯하야 簇生疊出한 각종의 비밀결사 단체는 필경 淸朝顚覆의 목적에 不外한 것만으로 보아서도 알 것이다.
그리하야 이 排淸 즉 排滿思想에 얼켜서 가장 뿌리깁흔 革命運動을 닐으키게 된 것은 近世 革命思想의 산물인 동시에 이 革命運動의 선구자이며 그의 元勳인 中山 孫文先生의 공로를 推賞하지 아니할 수 업게 될 것이다.
孫文은 廣東香山縣 農家의 産으로 幼時에 그 형의 布哇出遊를 따라서 그 곳의 학교에서 修學하는 사이에 不知中 米合衆國流의 정치사상에 감염되여 그 때부터 民主共和論을 唱導하게 되엇다 한다. 그 뒤에 廣東으로 도라와서 醫藥을 개업 하엿스나 일즉이 저 유명하든 長髮賊巨魁 洪秀全에게 私淑하엿든 바로는 『人命을 醫하는 것 보다는 國命을 醫하는 것이 급무이다.』 하는 각성으로 광서<28> 18년 壬辰(日本 明治 25년)에 斷然히 이것을 廢業하고서 가만히 동지 18명과 한가지 興中會라는 단체를 結黨한 후에 廣東省城과 및 香港을 중심으로 혁명주의를 선전하면서 한편으로는 당시에 벌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잇는 廣東의 三合會, 哥老會와 서로 기맥을 통하고 잇엇다.
그리하야 孫 일파의 조직한 흥중회는 純全한 폭력단의 형상으로 출현되엿다. 그리하야 光緖 21년 (乙未)에 광동에서 극히 소규모의 작전계획으로 제1차 운동을 試하엿스나 衆寡不敵의 형세로 一敗塗地의 참상을 당하엿다. 그러나 그때의 滿天下志人 義士의 心胸을 激勵*動 식히는데 이것만으로도 充分하엿다 한다.
孫文은 일시 英國에 망명하엿다가(滯英中淸公使館에 포로 되엿스나 恩師의 救원으로 재생된 사실은 여긔 생략함) 光緖 24년(戊戌) 3월에 日本으로 轉到하야 橫濱에 滯留하엿다.
日本人과 交結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의 일이라 하며 孫이 頭山滿 等 日本浪人의 後援을 바다서 革命事業을 한층 더 대규모로 계획한 것도 이 때에 胚胎하엿다 한다. 당시 日本에 滯在中인 康有爲(淸國의 정치개혁을 꾀하다가 西太后에게 敗積되고 日本으로 망명한 지사인데 우리나라의 甲申政變 당시의 金玉均등 지사와 그의 사업과 인물이 比等하다.)를 孫文과 製携식혀서 이 2개세력을 합하야 中國革命運動을 달성식히려고 副島(種臣)頭山등 소위 日本志士의 극렬한 비약을 인한것도 이 때이라한다. 그러나 엇지함인지 康有爲의 搖頭不應으로 이때의 康孫의 握手만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앗다 한다.
孫文은 동지의 전청을 접하야 그해 바로 香港으로 건너가서 櫛風沐雨의 활동을 계속한 결과 翌年 光緖 25년 己亥에 香港에서 孫의 인솔할 興中會와 三合, 哥老의 3회 합동을 보게 되엿다. 그리하야 새로 興漢會라 改稱하고 孫文은 그의 두령에 추대 되엇스며 그 회의 會員分布範圍는 廣東, 廣西, 湖南과 밋 安南 섬라등지를 포용하야 벌서 그 회의 세력은, 업수히 보지 못 할것이 잇섯다.
中國天地를 들어 震憾할 그때에 孫文은 『好機不可逸』 이라하야 廣東省 惠州에서 재거를 기도하다가 이것도 또한 실패에 돌아가고 말엇고 여긔 항응하야 각처로서 努濤*浪의 형세로 듸려미럿스나 『時不利兮』여! 악가운 전도유위의 청년들만 몰리야 虎口魔窟에서 살어지고 달엇다. 그 중에 도 湖南의 英傑之士 唐才常가튼이는 湖廣總督 張之洞을 暗殺하려고 음모하다가 발각되여서 도로혀 多數同志로부터 絞首臺上의 이슬로 화해버리고 마럿다.
이 때 孫文은 간신히 亡命하야 歐米各國으로 流離間關 하다가 光緖 30년 甲辰 冬에 다시 日本에 至하얏다. 당시 淸國은 義和團事變에 엄청나게도 자극을 바다서 교육을 大興코자 靑年 英才를 多數 擢拔하야 해외로 곳 遊學을 보내는 판<29>에 日本遊學生은 날을 따라 격증하얏스며, 때마츰 日本은 大國 露西亞를 격퇴하고 국위를 해외에 발휘하얏다고 滿天下가 한참 喜悅踴躍하는 그 때 임으로 발랄한 개혁정신과 격노된 義慣心이 온 몸의 혈관을 뜯어내는 南方靑年 자제들은 猛然히 깨닷고 일제히 奮起하야 손목을 마조잡고 日東島國의 싹트는 新文化와 戰勝후의 膽勇氣風을 본뜨러 건너갓다. 저 黃興, 宋敎仁 가튼 사람은 그 때 留學生중에도 優秀卓拔한 인물이엿섯다.
孫文의 이때의 동행은 뜻이 여긔(延攬英雄)잇섯다 한다.
黃興은 湖南 長沙人인데 성이 果敢 독실하야 臨事不苟하는 기개와 百折不屈의 勇斷이 잇다한다. 일즉이 湖南書院에서 業을 畢한 후에 民族主義를 唱道宣傳 하기에 열중하다가 光緖 26년 庚子에 湖南唐才常의 실패를 보매 黃은 그 謀事에 참예 하얏슴으로 翌年 辛丑에 日本으로 망명하야 東京師範學校에서 修學하면서 당시의 유학생을 綱羅하야 拒俄團이라는 것을 조직하야 또한 民族主義를 高唱하더니 졸업귀국후에 革命主義에 趨赴하는 자 日多함을 본 黃은 맛츰내 革命思想 鼓吹에 노력하얏다.
光緖 29년 癸卯에 靑年急進派 陳天華, 宋敎仁, 劉一揆로부터 華興會를 병설하고 그의 수령이 되어 回回敎 領釉와 廣西毅軍과도 서로 聲息을 통하야 翌年 甲辰 10월에 西太后의 萬壽節을 기회로 일대동란을 닐으키려고 획책하다가 그의 軍機가 張之洞에게 偵知한배되어 謨事는 전부 와해되고 黃은 몸을 僅免하야 上海로 도피하엿다.
그러나 다시 니어서 黃福華가 廣西巡撫使 王之春을 암살한 사변이 닐어나매 黃興도 이사건에 관계가 잇슴으로 一時 被捉되엿스나 교묘히 변명하야 天幸으로 석방 면화하엿다. 元名軫을 興으로 개칭한 것은 이 때의 일이라한다.
그리하야 黃은 바로 日本으로 亡命하야 學籍은 宏文學院에 두고소 留學生간에 원만 간곡한 결문를 계속하며 한편으로 革命主義를 고취하고 各省 학생의 사상통일과 연락기관을 설치하기에 盡力하엿다.
이 때에 日本浪人 末永節(狼嘯月)은 黃의 비서격으로 牛込 神樂坂에 잇는 黃의 寓所에 동거하여 잇고 張繼, 宋敎仁등도 또한 침식을 한가지 하얏슴으로 神樂坂의 잇는 黃興의 寓所는 완연히 中國革命軍 參謀本部의 觀이 잇섯다 한다. 이 때가 孫文이 亞米利加로부터 日本에 再渡한 그 때이다. 타일
中國革命의 2대 傑物로 並稱하게 된 이 두사람은 이때까지 서로 一處에 회합해 보지 못 하엿것다. 이것을 처음으로 소개하야 互相 제휴하게 한 것은 즉 宮崎滔天(전일 金玉均 선생의 서생으로 다년 선생의 은공을 바다서 세계 대세와 동양문제등 시사세무의 훈도를 만히 바다 오든 칭유의 의협남아)이엿다.
宮崎滔天은 다년 崇奉하야 한 울과 가티 신망해 오든 金玉均 선생을 一朝에 이 세상에서 永別하고서 실의의 極에 桃中 軒雲右衛門의 제자가 되어서 浪花節(日本長唄의 일종)를 배<30>와서 몃해ㅅ동안 금쪽가튼 光陰을 消遣하더니 孫文의 제1차 日本亡命 당시에 벌서 그의 상중에 깁히 들어가서 孫의 智*이 된 지 이래 칠팔년 동안에 憂樂甘苦를 한 가지 해오든 터이다.
一日은 孫文이 그 健骨壯軀를 끌고서 설넝설넝 宮崎의 집을 방문하야 그 一生處世의 신조인 丹誠의 빗이 안면에 汪溢하는 가장 침착한 태도로 『유학생중에 가장 활기잇는 有爲의 청년은 누구일가?』하는 물음에 宮崎는 言下에 黃興을 천거하야 이에 대답하엿다. 孫文은 『그러면 이 길로 바로 尋訪하자』하는 일언으로 곳 宮崎의 손목을 끌고서 神樂坂 黃興의 寓居에 일으럿다. 宮崎가 몬저 玄關에 들어서면서
『손님 오섯슴니다.』
하닛가 黃興은 우루루 현관으로 쪼처나와 웃둑서더니 平日사진으로 만히 보와서 눈에 익엇든지? 대번에 孫文인 줄 알고 몹시 반겨 하엿다. 그러나 인사도 못하고 황급히 그의 서투른 日語로 『アチアチ』를 連叫하면서 手를 휘하야 밧그로 나가라는 뜻을 표시한다. 그리하는 판에 末永은 안으로부터 화당탕 뛰어나와서 孫을 보고 언쩔에 『あ*孫さん...』하다가 孫文에게 억개를 맛고 입을 꽉 트러 막혀서 末永은 그냥 뭇춤안이 선채로 督眼間에 벙어리가 되여버렷다. 이것은 피차에 그때 세상을 忌諱하는 신분인 까닭이다.
他日의 業建功成한 날 어느 연회석상에서 이 때의 末永의 벙어리 되든 一場滑稽劇이 뭇둑 추억되어서 滿場은 噴飯失笑의 一戱劇을 연출하엿다 한다.
孫과 宮崎는 잠시간 戶外에 佇立하야 기다릴새 黃興은 張繼, 宋敎仁과 末永을 더불고 나와서, 神樂坂上의 中國料理店 鳳樂園으로 兩人을 안내하야 쌍방이 은근한 태도로 인사를 맛치고 두어말 하는 동안에 意氣가 투합하야 바로 본문제의 혁명담으로 화제가 옴기매 氣熖은 雲霄를 찍르고 意圖는 우주를 들어마시는 개가 잇섯다. 담론 3시간여에
革命主義者 大同團結의 협정이 성립되고 건배를 들어서 혁명의 前途를 視福한 후에 그날은 위선 散會하얏다.
그리고나서 수일후에 飯田店町富 士見樓에서 『孫文先生 대환영회』가 열리엿는데 來會者가 무려 천여명 이엿슴으로 전수를 수용치 못 하엿다. 발기인은 물론, 주빈되는 孫文으로는 이런 의외의 대성황에 滿心喜悅하야 屋外에까지 나가서 간곡한 예사를 들엿다. 대사는 순풍에 돗을달아 술넝술넝 진행되여 이날 다시 各省으로부터 이삼명 내지 십여명의 대표위원을 선출하야 수일후에 赤坂區 內田良平家에서 『中國同盟會 組織準備會』를 개회 하엿는데 환호성리에 모혀드는 각성대표의 안색에는 爛熟한 革命氣運이 스스로 것잡을수 업시 漲溢하얏섯다.
發會式 거행의 의는 결정 되얏스나 회장의 문제로 일시 난관됨을 늣겻다. 中國革命黨의 結黨式을 공개하게 되면 日本警察이 等閒히 두지 안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정부로는 淸國에<31>대한 의리로 혁명당을 엄중히 감시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孫文에게 대한 감시는 너무 苛酷하엿다. 淸공사의 요구를 들어서 孫文의 상륙을 금지함으로 孫은 橫濱港口에서 進退維谷의 窮境 그대로 일주일간이나 지내왓든 일도 잇섯다.
이 사건으로 정부측과 재야지사론 객과의 사이에 격렬한 공격과 간섭의 투쟁이 계속되든 끗헤 외무성 차관실에서 小村壽太郞과 犬養毅와의 격투극이 상연 되엿섯다는 일화까지 남아잇다
.......(中略)......
더구나 이번 孫文의 재도후에는 淸國公使館과 연결하야 그의 동정을 일일이 주시하고 苛察하는 터임으로 회장을 물색하는데는 비상한 困難과 障碍가 잇슬 것을 예측하얏다.
日本志士들은 여긔서 沈思熟廬하야 中國革命에 하등 관계가 업는 日本實業家의 井上某를 이용하야 赤坂靈 南坂附近에 잇는 坂本金彌라는 부호의 별장을 차용하기로 되엿다.
이러한 경로를 격거서 光緖 31년 乙巳(우리 光武 9년 日本 明治 38년) 춘 3월에 수히 중국동맹회는 성립외엿는데 孫文을 총재로 추대하고 黃興은 실행부장으로 張繼, 宋敎仁, 湖行鴻, 汪兆銘, 陳天華 등은 간사로 선정되어, 각지방과의 연결의 충에 당하기로 하고 東京에 본부를 두고 上海, 香港, 新嘉坡등 동지의 집단처에 각각 지부를 설치하얏다.
이것이 中國革命主義者 大同團結의 실현을 보게 된 처음이며 그의 2대 傑物이오. 中國革命의 元勳인 孫文과 黃興과의 처음 악수한 장면이엿다.
다시말하면 中國 5000년동안 君主專制의 黃金帳幕 밋헤서 모든 환락과 영화를 亨有해 나려오든 녹쓸고 다 날근 帝王冠을 모조리 두나려부슨 정예하고 가장 신선한 이기를 수련하는 시도식 이엿스며 진수식이엿섯다.
시작한 즘에 中國同盟會의 활동 23을 소개해 보려한다.
그 회가 성립되면서 제1착으로 기관지 『民報』를 발간하야 章炳麟, 汪兆銘 2인이 그 주력이 되어서 혁명사상의 선전에 노력하는데 동시에 中國內地에 동지를 陸續派遺하야 지방유설를 試하얏다. 때마츰 中國天下에서는 國會速開運動의 성이 놉흔 그때 임으로 혁명사상을 고취하는데는 대단히 유리하얏다 한다. 就中 당시의 운동방법중 가장 유력한 것은 각지 요소요소에서 발행하는 신문지인데 宋敎仁이 上海에서 譯人鳳과 결탁하야 楊子江岸을 활동구역으로 하야 『民立報』를 주재하면서 극렬한 暗中飛躍을 演한 것이 마츰 鐵道國有問題로 인하야 勃發된 四川의 동란을 마주처서 의외<32>의 성공을 奏하얏고 어서 宋敎仁은 武昌에서 大事를 거하려고 기일준비 하든중에 10월 9일 사건(피등의 폭탄밀조소인 漢口寶善里에서 폭탄폭발의 실책으로 인하야 동지 32인이 就縛하얏다.) 이 突發하얏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부터 轉禍爲福의 성공을 收得하얏다. 前記 就縛한 32인중에 孫武라는 사람은 脫獄逃出하야 동지 張振武등 23배로 더부러 심야에 黎元洪을 방문하고 거병을 促하얏다. 대개 武昌, 漢口地方에 잇서서 인망이 융융한 黎元洪의 출마를 慫慂하는 것이 『事件功倍』의 利를 보게 될 것임으로서이다. 그리하야 선의 부결하는 黎에게 拳銃을 擬해 가면서 거사를 강청하야 遂히 黎元洪의 명의로 기ㅅ발을 세우고 일거에 省城을 점령하얏다. 때는 10월10일 밤이엿다.
翌 11일에 黎元洪을 대도독으로 湯化龍을 민정장관으로 推戴하고 鄂州의 독립을 선언하얏다.
미리 中國同盟會의 손으로 400여 주의 중국천하에 방방곡곡에 사상선전씨를 골고로 뿌려두엇든 싹은 우후의 죽순처럼 막을 수 업는 형세로 닐어난다.
일단 鄂州독립의 報가 선전되매 南方 各城은 期한것 업시 일제히 여긔 향응하야 제1주일 동안에 중국의 천하는 3분지 2가량이나 독립을 선언하얏다 한다. 대세의 沛然을 누가 능히 막을 것이랴?
이리하야 武昌의 獨立軍 本部에서는 대외교섭에는 中華民國政府라는 명의를 쓰고 그 翌年 元號를 中華民國 元年이라 개칭하얏다. 이것을 중국의 제1혁명이라한다.(끗)<33>
<28-33>
첫댓글 하층민이었던 남만족인 한족이 공산혁명을 일으킨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걸로 보이네요. 저는 한족을 남만 오랑캐로 보는 입장입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