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10월18일(월) 맑은 뒤 흐려짐
<생각을 잘 하자>-박문호 박사의 생각에 관한 강의를 듣고 정리하다.
생각에는 ‘생각나기’와 ‘생각하기’가 있다.
생각나기는 생각에 빠진 상태이다. 생각에 갇힌 상태이다.
생각하기는 자기에게 물어보기로 시작된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지금 나는 무얼 하고 있지? 난 어디에 있지?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뭐지? 어떤 것이 나의 본심이지? 이게 뭐지? 이뭣고? 외마디 발성(악!, 아이고! 아야!)이나 상대 없이 혼자 중얼거림(아, 가을이네!...)은 생각이 아니다. 언어로 된 것만이 생각이다. 내가 속으로 나에게 한 말을 ‘생각’이라고 한다. 입을 다문 채 발음도 안 했는데 내가 나한테 한 말을 내가 듣고 있다(inner chatting). 언어로 된 것만이 생각이다. 언어를 매개로 어떤 한 생각을 곰곰이 꾸준히 지속할 경우, 이것은 의지가 개입된, 그래서 집중을 요하는 의식적 행위이다. 그런데 이건 문자 언어생활을 하는 태도가 습관화되었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양질의 검증받은 기억(박학다식, 정보의 업데이트)이 충분히 쌓인 다음에야 언어를 매개로 사유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의미 있는 생각을 지속 할 수 있다. 의미가 약하거나 의미가 없는 생각은 지속하는 힘이 희미해서 지속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하기는 목적성을 띤다. 의미가 크고 강렬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일생을 두고 지속할 수 있다. 일생을 걸 수 있는 생각은 다름 아닌 (인문학적, 과학적)진리, 깨달음, 도, 아름다움, 보리심, 구원 등 이런 영적인 의미를 띤 것이 아니겠는가?
지각된 것들이 기억되고, 기억된 것만이 지각된다. 기억된 것만이 지각할 수 있다. 지각된 것만이 기억된다. 모든 행동은 기억에서 나온다. 삶을 바꾸고자 한다면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행동을 바꾸려면 기억을 바꾸어야 한다. 기억을 바꾸려면 검증받은 양질의 정보가 입력되어야 한다. 배움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學而時習之하니 不亦說乎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
배우고 때때로 배운 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대의에 자신을 던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죽고 삶은 보리심의 대의에 맡긴다.
다만 보리심이 ‘나’를 쓸(使用) 뿐, 죽고 사는 데 연연하는 ‘나’란 없다,
죽어도 보리심, 살아도 보리심이니, 보리심의 만다라여, 영광 있어라!
2021년10월20일(수)맑음
여덟 분 보살님과 함양 상림 숲으로 가을 산보 가다. 점심 공양하고 숲을 거닐다. 이은리 석불 앞에서 보리심의 기도 드리고 천년교 다리 위에서 가을 풍경 감상하다. 차 마시고 돌아오다. 오후 4시.
2021년10월21일(목)흐린 후 맑아짐
You can’t make an omelet
without breaking eggs.
Destruction before creation. - Joseph Campbell
달걀을 깨지 않으면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 창조하기 위해선 파괴가 필요하다. -죠셉 캠벨
천성산 미타암 주지 동진스님과 스님 두 분, 그리고 조계암 공양주 보살님 빙문 오다. 점심공양 대접하고 커피를 마시며 환담나누다. 오후 2:00 귀사하다. 3:30에 지월거사 도착하다.
2021년10월23일(토)맑음
지월거사와 함께 부산 반송동 일진선사의 작은 절을 방문하다.
<일진선사와 대화>
*일진선사: 지월거사님, ‘지금’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여기에 무슨 생각이 붙어요?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지금, 여기, 생각을 끌어와 거기에 빠지지 않으면 본래 아무 일 없이 완전합니다. 아, 그래요. 지금-이 자리-생각이 붙을 수 없는-이 자리-가 분명하면 생각이 있어도 좋고, 생각이 없어도 좋아요. 생각이 오고 감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요. 이것이 無心 No-mind입니다. 그리고 그걸 無念, 이제 今+마음 心=지금 마음. ‘지금 마음이 없음’입니다. Now, no-mind ‘지금 마음 없음’은 마음 졸이거나 마음 쓸 일 없음, 마음에 사로잡힘 없음, 마음에 빠지지 않음입니다. 이걸 영어표현으로는 carefree(걱정, 근심 없는, 속 편한, 즐거운, 낙천적인)라 하지요. 지금 이렇게 활발발하게 살아있으나 콕 꼬집어서 ‘이거다!’라고 말로 할 수는 없어요. 말로 한 것은 그것이 아니거든요. 말은 그것의 흔적일 뿐이며, 가리키는 상징일 뿐이지요. 그래서 손가락을 보지 말고 가리키는 표적, 달을 보라는 것이죠. 달을 보라기보다는 달을 느껴야겠죠. ‘지금-현존’을 흘낏 느낀다면 그 안심된 바탕 자리가 바로 本來面目, 본래의 자기 얼굴(정체)이라는 말이죠. 이런 표현을 선종 문중에서 즐겨 씁니다. 가령 一念未生前 本來面目, 한 생각 일어나기 전, 그 자리가 바로 본래면목이라고 하지요. 또 지금 이 자리가 분명하면 거기엔 에고(자아관념, 자아중심성)이 붙질 않아요. 왜냐고요? 자아라는 생각(관념)은 지금 이 자리에 생각이 붙지를 않아 말끔한 상태에서 홀연히(눈치챌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이 너무 빨리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니까 ‘내가 있는데, 나 여기 있잖아, 나,,,’라는 생각이 아주 당연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겠지요. 그러므로 ‘나, 내가 있다. ’나‘가 있어야지, ’나‘ 가 없다니 말이 돼’라는 생각은 너무 빨리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의 두뇌가 일으킨 유익한(과도하면 무익하거나 오히려 해가 되는) 환상입니다. 그러니 ‘나’가 필요하면 사용하다가 ‘나’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쉬면 됩니다. ‘나’란 생각에 사로잡혀 항상 갖고 다닐 필요는 없어요. ‘나’가 없는데 무슨 고통이나 트라우마가 있겠어요? ‘나’ 가 없는데 누가 고통을 받는가요? 고통스러운 상황은 있겠지만, 고통을 받는 ‘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나 없음‘의 가르침은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없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안착해야 합니다. ‘안착해야 합니다.’가 아니고 우리는 이미 이 자리에 늘 있어요.
일진선사: 지월거사, 지금이 어디 있어요?
지월거사: 이미 지금인데요.
일진선사: 그래요. 말 잘 했어요. 이미 지금인데 어디서 다시 지금을 찾아요? 지금은 항상 이렇게 생생한데, 왜 과거로 미래로 이리저리 우왕좌왕해요? 지금에는 시간이 없어요.
지월거사: 지금 여기 이 자리의 생생함이 스님의 말씀과 아우라에서 느낌이 옵니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 없음, 생각이 붙지 않음은 알겠는데 에고가 고통에서 벗어난다 말에서는 아직 확연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디에 걸려 있는 걸까요?
일진선사: 지월거사가 지금 이 자리의 소식을 조금 맛을 보긴 봤는데. 아직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걷지를 못해서 힘이 없을 따름이니, 힘을 얻어 실생활에서 효험을 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듣고 느낀 경험은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아서 자기 삶에 깊이 스며들어 점차로 모든 것이 바뀌어 갈 것입니다. 원담스님에게 자세한 가르침을 받으세요. 깨달음으로 인도되는 법의 인연이 소중합니다.
①공과구 空過句: 제가 갓 출가해서 구산스님을 모시고 살 때 어느 날 큰스님과 선에 대해 문답을 했어요. 내가 생각하기로 분명히 맞는 답을 했는데 스님은 자꾸 아니라고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갑갑하고 답답했어요. 그러던 차에 제 마음을 아셨는지 저를 향봉 노스님(효봉스님의 사제 되는 스님, 청전스님의 은사이셨던 분)에 보내셨어요. 향봉스님을 찾아 뵙고 선문답을 했는데 그분 또한 ‘아니다! 아니다!’ 부정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방 밖으로 나오면서 아! 하고 깨달은 게 있었어요. 바로 ‘아니다!’가 답이라는 걸. 아무리 맞는 답을 해도 그 자리에서 벗어난 허물이 되는구나. 답이 맞고 안 맞고,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本地(그 자리, 입각처)와 그 자리에서 파생되어나온 묘사와는 다르다. 그러니 ‘아니다!’ 이런 앎이 확연해지니까 답답했던 마음이 통쾌해졌어요. 그 후로는 어떤 선지식과의 대화에도 눌리는 기색이 없이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큰스님을 찾아가면 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문답을 해야 하니, 심리적으로 제압당하여 쫄리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문을 확 열고 들어가 조실스님 앞에 딱 앉아요. 누가 왔어? 어떤 놈이냐? 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키며 척하니 앉습니다. 그러면 조실스님이 ‘이놈, 봐라’며 대접이 달라집니다.
②정혜숙 보살님의 깨달음: 정혜숙보살은 경남 울산의 금수저 출신으로 눈부신 스펙을 쌓고, 미국과 영국으로 유학했으며 잘 살면서 이 세상에 해볼 만한 것은 다 해보고 살았는데도 가슴에 허전한 것이 남아, 영적인 경지를 추구하다가 일진스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작은 절>로 찾아왔다. 보살은 문을 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를 ‘스님, 도가 무엇입니까?’ 이에 일진선사 두 손을 쫙 펴는 동작을 하면서 답하기를 ‘아, 여기에 이미 꽉 차 있는데, 무얼 찾아요?’ 이에 보살은 번개처럼 확! 마음이 밝아졌다. 그 뒤로는 머리를 싹 깎고 삭발한 머리로 다닌다고 합니다. 워낙 풍채가 좋은 데다 도를 알았으니 귀티가 나는지라 지하철에 오르면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준다고 합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
오징어 게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①어릴 적 동네 마을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이할 때 아무런 물질적 보상이 없었는데 불구하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미있었는데, 왜 어른이 돼서는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직장생활이나 돈 버는 놀이가 재미없을까?
②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이 오징어 게임과 같은가?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에 빠지지 않고 살 수는 없는가?
③오징어 게임의 설계자인 오일남 영감은 세상은 오징어 게임이요, 인간들은 본성이 악하다고 믿으면서 게임의 생존자인 기훈에게 죽기 전에 마지막 게임을 제의한다. 영감이 임종을 기다라며 누워있는 7층 침대에서 창밖을 내려다보이는 곳 길가 보도블록 옆에 한 노숙자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노인이 말하길 앞으로 15분 동안 지나가던 행인이 저 노숙자를 발견하고 살려내면 자네가 이긴 걸로 하고, 만약 아무도 저 노숙자를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가면 내가 이긴 거네. 자네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고 있으나, 난 말이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믿거든.
아마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15분 동안 분침이 움직일 때마다 저 행려병자 노숙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행인이 지나가길, 천사의 손길이 뻗치기를 가슴 졸이며 기도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의 마음이다. 시나리오 작가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상당히 잔인하게 보였던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 장면에 이런 연출을 의도하였으리라. 세상에는 아직도 선한 사람들이 있고, 선한 의지가 살아있으며, 그래서 세상을 살아볼 만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14분 30초쯤 한 행인이 노숙자에게 다가가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그냥 지나갔다. 시청자들은 참담해진다. 세상에 희망이 없는 것일까, 세상에 착한 사람은 없는 것일까? 드라마는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가? 암담한 심정에 휩싸일 때쯤 14분 59초. 행인의 연락을 받은 경찰차가 와서 노숙자를 부축하여 싣고 병원응급실로 데려간다. 시청자들은 안도 한숨을 깊게 내쉰다. 세상은 다시 한번 빛나고, 시청자들은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 세상은 겉으로는 삭막해 보여도 사랑의 빛에 감싸져 있다.
왜 그런가? 세상과 끝까지 함께 하면서 생명을 사랑하려는 원력을 세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블에 열 명의 착한 사람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 당하지 않았으리라 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을 살리는 열 명의 착한 사람이 소중하다. 그런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하며, 그들의 선한 의지를 보리심이라 한다. 보리심은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려는 의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