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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10월 5일 월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동정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이냐는 물음에,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응답하신다(복음).
제1독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시험을 볼 때 파악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출제자의 의도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해 놓고 정작 엉뚱하게 답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되물음이 흥미롭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물론 율법 교사는 옳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 하였습니다. 그랬으니 누가 자기의 이웃인지 다시 물었지요. 의도가 뻔한 그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 물으십니다. 이에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쉬운 답을 두고 굳이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긴 답을 합니다. 이는 답을 알면서도 당시 유다인들의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인을 인정하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 같아 회개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하실 뿐입니다.
답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앎을 온전히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 내 이웃인지, 누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살피기에 앞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봅니다.(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구원이란?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있는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적이 드문 시골에 살다 보니 특별한 일을 겪습니다. 더 이상 키우기 힘들어진 반려견을 이곳에 버려두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민가도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 유기하고 떠나고 나면, 강아지는 비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닙니다. 차량이 지나갈 때 마다 혹시라도 주인이 다시왔나 싶어, 다가와 확인합니다.
난데없이 닥친 날벼락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친구들의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대체 어떤 사람이 저런 몹쓸 짓을 했나 분노도 치밀지만, 우선 안쓰럽고 딱하고 짠한 마음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골수에 사무치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혹독한 시련 앞에서 피 눈물 흘리는 분들을 뵈면 제 마음도 함께 미어지고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느낌입니다.
한갓 인간의 마음도 이럴진 데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비,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하느님의 마음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자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비란? 한 마디로 너의 고통이 곧 내 고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자비롭다는 것은 너의 슬픔이 곧 내 슬픔이요, 네가 눈물 흘릴 때 나도 눈물흘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딱 그러하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 우리의 깊은 상처에 저절로 손길이 가시는 분, 우리가 눈물 흘릴 때, 저절로 손수건을 꺼내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곳일까요? 여러 이론과 상상을 동원해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그곳은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 울부짖음이나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곳, 우리의 모든 결핍과 아쉬움, 죄와 죽음이 모두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뜨거운 사랑 앞에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버리는 곳, 우리의 오랜 병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유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 그 자체로, 당신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에너지로 환자들을 치유시킴을 통해 그토록 은혜롭고 축복된 하느님 나라의 한 실상을 미리 잘 보여주셨습니다.
기적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끝도 보이지 않게 늘어섰던 불치병 환자들의 행렬들과 마주서셨습니다. 조금도 귀찮은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오랜 병고를 말끔히 치유시킴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한 인간이 더 이상 행복해할 수 없는 상태가 구원이 아닐까요? 그 상태는 아마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구원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 품 안에 머무는 것, 그분 큰 사랑 안에 푹 잠기는 것,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계명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제와 레위인은 종교적 행위에는 충실했지만, 계명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명을 안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명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계명이 때 되면 식사하거나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완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도와주지 않고 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명이 나를 그렇게 완전히 지배하게 만들려면 그 계명을 주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왠지 나를 희생시키고 고생시키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은 그러한 계명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튜브 동영상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에서는 삶에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은 사회 초년생,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취업 준비생, 승무원 포기한 배우 지망생, 고3 수험생 등이었습니다.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루 수면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일주일에 몇 번 사람들과 어울리나요?”,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꿈이 있나요?”,
“하루에 몇 번 소리 내 웃나요?”
그리고 뒷장에는 같은 질문 앞에 ‘어린 시절에’란 단어를 붙였습니다.
어린 시절 수면시간은 얼마였나요? 어린 시절 몇 번 소리 내어 웃어보았나요? 등입니다.
당연히 어린 시절이 앞길이 막막한 청년들보다 훨씬 행복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행복한 이유는 다른 것은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공부가 쉽습니까?
저는 공부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 좀 그만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었는데 또 공부하라고 유학 가라고 했을 때는 정말 순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린이가 행복한 이유는 공부만 하면 되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불안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막막한 것입니다.
재빠르게 버스를 잡아타긴 했는데 이것이 집으로 가는 것인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인지 모를 때의 불안한 마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히 있을 때 그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합니다.
‘비벡 H 머시’의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라는 책은 ‘외로움’과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복권 당첨자가 머시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복권 당첨된 것은 저에게 저주가 되었어요.”
“아니, 왜요?”
“복권 당첨되기 전에는 직장 동료, 친구와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부자 동네로 이사 오고 나니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집에 갇혀있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다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사람은 돈보다 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어딘가에 속해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술자리에 있으면 술을 마시면 되고 직장에 있으면 일을 하면 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며 불안에 떨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못하면 마치 방전된 스마트폰처럼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같은 책에 이런 예도 나옵니다.
어떤 전직 조직폭력배가 말했습니다.
“저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모두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평안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었습니다.
물론 세상에 악한 일이기는 하였지만요.”
나의 행동들이 나의 자유의지로 행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인간에게 자라지 않으면 인간다운 행동이 전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늑대에게 자라면 늑대의 행동을 하고 인간에게 자라면 인간의 행동을 합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기생충이나 모기처럼 생존을 위해 먹기만 합니다.
이 또한 자아라는 것에 속해있기에 그의 뜻을 따라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악한 일을 하면서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외로움과 불안함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우리가 명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내가 그 계명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할 때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자녀가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리 부모라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것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직폭력배도 그 조직에 고마워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주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계명이 그 사람을 평안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조직폭력배는 나중에 그 조직에 감사를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주는 모든 계명은 다 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하는 계명을 주는 어떠한 공동체에 속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배하는 계명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의 상징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쓰러져가는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실 수 없으셔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속해있었고 아버지의 계명이 그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으로 쓰여야 행복하지 망치로 쓰이면 결국 또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 모습대로 사랑해야만 행복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계명을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이 나를 지배하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인처럼 그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을 주시는 분에게 속하는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계명만 안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할 수 있어야 지킬 수 있기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어주심으로써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나를 지배하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계명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 미래 보고서’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는 미래의 로봇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달과 화성에는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동굴이 있는데, 이런 곳은 외부보다 온도 변화가 적고 방사선과 운석의 위험을 피할 수 있어서 미래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들어가기 어려운 그곳에 로봇을 보내 탐사하고, 언젠가는 사람이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또 벌과 나비처럼 꽃의 수분을 돕는 작은 로봇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군사 분야에서도 이미 드론을 비롯한 무인 장비가 활용되고 있고, 앞으로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역할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생각하게 만드는 분야가 있습니다. 인공 자궁과 같은 기술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언젠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돌보고 출산을 돕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기술은 여러 윤리적인 문제와 함께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기술은 출산의 위험과 고통을 줄여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 질문은 남습니다. 기술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사랑까지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로봇이 사람을 대신해서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엄마의 품, 아버지의 손길, 사람과 사람이 맺는 사랑과 신뢰까지 대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 신앙에서 결코 대신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지식이 아무리 발전하고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향상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은 아닙니다. 권력도, 재물도, 명예도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워 주고 성공과 번영만을 약속하는 것도 참된 복음은 아닙니다. 참된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고,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복음은 온전한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희생 없는 사랑, 용서 없는 신앙, 나눔 없는 종교는 복음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듯이, 세상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반석이며,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사제도 지나갔고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던 사마리아인은 멈추었습니다.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바꾸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는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여기에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교리를 알고 있고, 성경을 읽고, 미사에 참여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모두 중요합니다. 종교에는 교리와 신학이라는 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틀의 목적은 우리를 그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데 있습니다. 악기는 악보를 안다고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연습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해야 기도의 맛을 알 수 있고, 사랑도 실천해야 사랑의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앞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세상을 열어 줄 것입니다. 로봇이 우주를 탐사하고, 사람 대신 위험한 일을 하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로봇도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이 나의 이웃이구나.”라고 사랑의 결단을 내리는 인간의 마음마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제도와 프로그램이 아무리 좋아져도,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깊어져도, 상처 입은 사람 곁에 멈추지 않는다면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하루 우리도 물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오늘의 성인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Mary Faustina Kowalska)
신분 : 수녀, 환시자
활동연도 : 1905-1938년
같은이름 : 메리, 미리암, 파우스띠나
성녀 코발스카는 1905년 8월 25일 폴란드 우지의 서쪽에 있는 글로고비에츠(Glogowiec)라는 마을에서 농부인 에스타니슬라오 코발스카(Estanisla Kowalska)와 마리아나(Mariana) 사이에서 10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스비니체 바르키에(Swinice Warckie) 본당에서 엘라나(Helen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하고 배운 것은 없었지만 신심이 깊고 올곧은 사람들로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순명, 부지런함에서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9세 때 첫영성체를 한 후 어려운 가정환경 등으로 3년 정도 교육을 받은 후 12세 때 고향을 떠나 부유한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동생들과 부모님의 생계를 도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성소를 느꼈고, 더 이상 학교 수업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수녀원 입회를 원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일단 성소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한 후 1925년 8월 1일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928년 마리아 파우스티나(Maria Faustina)라는 수도명으로 첫 서약을 하였다.
그 후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는 수도원의 여러 공동체에서 조리사, 정원사, 문지기 등의 소임을 담당하면서 수녀회의 모든 규칙을 성실히 지키고 동료들과 따뜻한 우애를 나누었다. 그녀의 일상적인 삶은 단조롭고 두드러진 특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룬 삶이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많은 환시와 예언, 그 외에 영적 은총을 받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박해를 받았다. 그녀가 체험한 가장 강렬한 환시는 1931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이 환시에서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성심 근처를 움켜쥐고, 다른 손은 내밀어 강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예수 성심에서는 붉은 색과 흰 색의 두 갈래 빛이 나왔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의 성심에 대한 공경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 신심의 이름은 ‘하느님 자비’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 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체험을 기념하고 아울러 그 그림을 보고 공경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여러 번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영적인 지도와 기도의 은총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은 성녀 파우스티나가 직접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으며, 그 일기는 오늘날 “내 영혼 속 하느님의 자비”(Divine Mercy in My Soul)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에 기록된 성녀의 사명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성서가 전하는 신앙의 진리를 세상에 일깨워 주어야 한다. 둘째, 특히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자비’ 신심 실천을 통해, 온 세상과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한다. 셋째, 하느님 자비의 사도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심 운동의 목표는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간청하며,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폐결핵을 비롯한 수많은 고통들을, 죄인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던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는 크라쿠프(Krakow)에서 1938년 10월 5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녀의 시신은 크라쿠프 라기에프니키(Krakow-Lagiewniki)의 하느님의 자비 묘지(Shrine of Divine Mercy)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1993년 4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4월 30일 같은 교황에 의해 새 천년기를 맞아 처음으로 시성되는 주인공이 되었다.
성 플라치도 (Placid)
활동년도 ; +6세기경
신분 ; 수도승, 순교자
지역 ; 메시나(Messina)
같은 이름 ; 플라치두스, 플라키도, 플라키두스, 플래시드
성 플라키두스(Placidus, 또는 플라치도)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그의 부모는 그를 이탈리아 수비아코(Subiaco)에 있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에게 맡겼다고 전해온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저서를 통해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 플라키두스가 어느 날 물을 뜨려고 호수로 몸을 구부리다가 빠지고 말았는데, 그때 자신의 방에 있던 성 베네딕투스가 영적인 눈으로 이 사실을 알고, 그를 구하라고 성 마우루스(Maurus, 1월 15일)에게 지시하였다. 그래서 성 마우루스는 물 위를 걸어 이미 물살에 휩쓸린 성 플라키두스를 구해 수비아코로 데려왔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 후 성 플라키두스는 거룩한 수도승이 되어 시칠리아(Sicilia)로 갔다가 메시나에서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라센 해적들에게 붙잡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이야기를 불확실한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는 메시나의 순교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플로라 (Flora)
활동년도 : 1309-1347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볼리외(Beaulieu)
같은 이름 :
성녀 플로라는 누구나 칭찬하는 착한 어린이로 성장하여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장성하여 부모의 결혼 강요를 완강히 거부하고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하여 볼리외에 있던 성 요한의 구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한 번은 자신의 삶이 너무나 평탄하다는 그릇된 생각에 빠진 적이 있고, 동시에 세속의 쾌락을 탐하려는 불같은 유혹으로 깊은 실망감을 맛보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동료들은 그녀가 위선적이라고 혹평하였으나 자신의 영혼상태를 잘 알아본 어느 고해신부의 도움으로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였다.
어느 해 모든 성인의 날에 그녀는 탈혼에 빠졌는데 성녀 체칠리아(Caecilia) 축일까지 약 3주간이나 계속되었다. 또 한 번은 8마일 밖의 어느 성당에서 사제가 미사 도중에 축성한 성체 조각을 떨어뜨린 사실을 알게 되어 경건하게 모신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초자연적 식별력이 돋보이게 되었다. 또 성령을 묵상할 때에는 땅에서 4피트나 떠오른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신비스런 영적 체험은 구세주의 몸에 받으신 상처를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38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성녀 갈라 (Galla)
활동년도 : +550년경
신분 : 과부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깔라
485년, 이탈리아 로마의 집정관이던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의 딸인 성녀 갈라는 결혼 일 년 만에 과부가 되었으므로, 그 당시 바티칸 언덕에 있던 수녀들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녀는 암으로 죽을 때까지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여 큰 덕을 쌓았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9월 3일)는 자신의 대화집에서 그녀를 언급하고 있으며, 루스페(Ruspe)의 성 풀겐티우스(Fulgentius, 1월 1일)가 기록한 “과부 신분에 관하여”라는 저서는 그녀를 모델로 기술한 책이라고 전해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