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대 웅비의 탑.
하늘을 찌를 듯했던 부대신문 열독률
- 최화수 (1963년 입사)
나의 부대신문(釜大新聞) 시절? 아, 바로 엊그제 일처럼 기억은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산술적으로 세월을 따져보니 꼭 50년, 놀랍게도 반세기 저편 일이다. 63학번인 나는 1963년 3월 입학해 겨우 두 달이 지난 5월 공개채용 시험 관문을 거쳐 부대신문 수습기자가 되었다. 그 이후로 나의 대학생활은 부대신문 기자로서 뛰어다닌 것이 전부이다시피 했다.
1963년, 64년, 65년……. 국민소득이 200달러에도 못 미쳤던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볼 것도 별로 없던 궁핍한 세상이다 보니 대학생이라 하여 지성과 낭만을 어찌 제대로 꽃피울 수 있었으랴. 대학 앞 버스 종점 부근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잔술과 노가리 새끼로 주전부리를 하거나 낱담배로 빈속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었다.
궁핍의 시대, 먹을 것이나 볼 만한 것이 제대로 없던 시절이다 보니 효원 캠퍼스에서의 부대신문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그 무엇보다 부대신문의 열독률(熱讀率)이 하늘을 찌르다시피 했다. 열독률과 구독률이 높다보니 영향력도 대단했다. 1963년 ‘효원축전’의 탄생과 무지개문으로 오르는 자갈길 포장도 부대신문의 기획기사에 따른 결과였다.
부대신문의 열독률을 엿볼 수 있는 진풍경이 있었다. 당시 주간(週刊)으로 펴냈던 부대신문은 매주 월요일 발간됐다. 월요일 아침마다 도서관(현재 박물관) 건물과 마주한 아치형의 부대신문사 콘세트 건물 앞에는 학생들이 장사진을 쳤다. 그들은 자신의 구독카드를 신문사 창구에 제시한 뒤 확인란에 도장을 찍고 신문을 받아갔다.
월요일의 효원 캠퍼스는 학생들이 부대신문을 펴들고 실린 글들을 정독하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제를 꽃피우는 모습들로 가득했다. 부대신문은 일간지와 같은 4절지(394×545㎜) 4쪽으로 학교 소식을 비롯하여 교수와 학생, 동문의 다양한 글을 실었다.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 있는 학생들은 게 눈 감추듯 4개 지면의 광고문까지 독파했다.
필자는 지난 10여 년 동안 부산의 몇 대학에 출강을 했다. 그런데 일부 대학에선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빚어지고는 했다. 대학 건물 출입구에 학교 신문을 내다놓고 학생 스스로 자유롭게 가지고 가도록 해놓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꽤 많은 시간이 흐르도록 그 신문을 가지고 가는 학생이 없었다.
이런 현상이 어디 대학신문 뿐이겠는가. 10여 년 전만 해도 지하철에는 책이나 신문을 펼쳐든 이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책은커녕 신문을 펼쳐보는 이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는 젊은이는 물론이요, 나이가 많이 든 노년층까지 오로지 스마트폰이다. 지난 1960년대의 부대신문의 높은 구독률과 열독률은 그래서 더욱 ‘전설’이 된다.
부대신문은 수습기자를 공개채용 시험을 통해 단과대학별로 1명씩 선발했는데, 전체 기자 수는 10명 안팎이었다. 턱없이 적은 인원으로 매주 발행되는 신문의 취재, 편집, 교정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일일이 배부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러니까 기자들은 자신의 학과 수업보다 신문사 일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매년 6월이면 휴교령이 내려지는 일이 되풀이됐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했던, 이른바 ‘6.3사태’의 여파로 대학마다 휴교조처가 내려졌다. 예고 없이 내려지는 휴교령은 부대신문 기자들에게 전교생의 주소를 우편 띠지에 일일이 적고 묶어 발송하는 엉뚱한 일을 덤으로 하게 했다. 정말이지, 그 고역이라니!
어쨌거나 캠퍼스 안에서 가장 활기가 넘쳐나는 곳은 부대신문사가 아니었을까 한다. 신문사가 있는 같은 콘세트 건물에는 총학생회와 여학생회 등이 들어서 있었다. 효원 캠퍼스에서 각 분야별로 내로라하는 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신문사 편집실에 들락거렸다. 때로는 사자후를 토하는 그들과 기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대 부대신문 기자들은 신문 제작에 아주 ‘올인’을 했다. 지면 구성에서부터 열정을 쏟았고, 교정 OK 사인을 낸 뒤엔 막걸리로 텅 빈 가슴을 달래기도 했다. 학업은 젖혀두고 신문 일에 몰입하다 보니 필자는 전공인 경영학과 관계없는 일간지 신문기자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었다. 그 또한 부대신문과의 운명적인 만남 덕분이다.
* 부산대학교 「釜大新聞」 창간 60주년 기념 문집 『釜大新聞 60년 인연의 숲』에 수록된 글입니다.
첫댓글 고문님 글 잘읽었습니다 그 열정이 지금도 열정적인 고문님으로 만드신것 같습니다
다시금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한 느낌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을 읽을 수 있었읍니다. 즐감했읍니다.
저는 서울대 59 학번이었는데 62년 약대 학생회장 10월 총학생회를 맡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뜨오르군요
저는 2년제 전문대 초창기 75학번으로 명전학보사 기자로 2년 일하면서 컬럼을 썼었죠.
그때는 최고문님보다 세월이 좀 흘러 취재끝나고 학보를 마감하고 나면 때때로 충무로의 멋진 양식집에서 풀코스의 요리를 만나기도 했고 담당 교수님댁으로 몰려가 사모님의 우아한 샐러드가 곁들인 밥상을 대접받기도 했답니다.
2년제였지만 사립이라 교수진이 격조 높았었어요.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신 정진홍교수님의 강의는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했었죠. 그리운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