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마중
유 계 자
그녀의 굽은 등에 파도가 친다
오롯이 숨의 깊이를 다녀온 그녀에게
둥근 테왁 하나가 발 디딜 곳이다
슬픔의 중력이 고여 있는
물의 그늘 속에 성게처럼 촘촘히 박힌 가시
물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엔 딸의 물숨이 묻어있다
끈덕진 물의 올가미
물숨을 빠져 나온 숨비소리가 휘어진 수평선을 편다
바다의 살점을 떼어 망사리에 메고
시든 해초 같은 몸으로 갯바위를 오를 때
환하게 손 흔들어 물마중 해주던 딸,
몇 번이고 짐을 쌌다가
눈 뜨면 골갱이랑 빗창을 챙겨 습관처럼 물옷을 입었다
납덩이를 달고 파도 밑으로 들어간 늙은 어미가
바다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테왁 같은 낡은 집이 대신 손을 잡는다
저녁해가 바닷속으로 자맥질하고 있다
마중이란 말은 우리 한국어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즐겁고, 기쁜 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마중의 대상은 아버지와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들과 딸일 수도 있다. 친구와 친구일 수도 있고, 스승과 제자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살던 사람이거나 머나먼 여행이나 힘든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무척이나 마음이 설레이고, 어떠한 기대나 희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러나 유계자 시인의 「물마중」은 해녀의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있고, “환하게 손 흔들어 물마중 해주던 딸” 대신에, “테왁 같은 낡은 집이 대신 손을 잡”아주게 된다.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며, 산다는 것은 더없이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물숨’이란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숨을 참았다가 쉬는 것을 말하고, 물질을 할 때마다 10m 내외의 깊이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1분에서 2분 내외에 물숨을 쉬러 나오게 된다. 바다는 힘찬 일터이며 자연의 텃밭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수많은 고통과 함께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끼어 다칠 때도 있고, 잠수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그토록 무섭고 사나운 파도와 싸울 때도 있다. ‘저승에서 일을 하며 이승의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 따라서 유계자 시인의 「물마중」의 경제권은 대부분이 어머니가 움켜쥐고 살아가게 된다.
오늘도 그녀의 굽은 등에는 파도가 치고, “오롯이 숨의 깊이를 다녀온 그녀에게”는 “둥근 테왁 하나가 발 디딜 곳이” 된다. “슬픔의 중력이 고여 있는/ 물의 그늘 속에”는 “성게처럼 촘촘히” 가시가 박혀 있고, “물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엔 딸의 물숨이 묻어있다.” 물의 올가미는 그처럼 끈덕지고, “물숨을 빠져 나온 숨비소리가 휘어진 수평선을 편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물의 올가미가 그토록 끈덕지고 물숨을 빠져 나온 숨비소리가 휘어진 수평선을 바로 펴겠는가? 또한, 얼마나 쓸쓸하고 희망이 없었으면 “바다의 살점을 떼어 망사리에 메고/ 시든 해초 같은 몸으로 갯바위를 오를 때/ 환하게 손 흔들어 물마중 해주던 딸”도 가고 이 세상에 없단 말인가?
유계자 시인의 「물마중」은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시인의 영혼과 숨결이 살아 있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해녀와 일심동체가 되어 해녀의 삶과 체험을 온몸으로 육화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삶이고 체험이고, 그것을 온몸으로 육화시켜 나갈 때, 천하제일의 풍경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저절로 씌어지게 된다. 시는 기교가 아니고 삶이며, 삶의 열정과 고통과 진정성이 그 생명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며, “몇 번이고 짐을 쌌다가/ 눈 뜨면 골갱이랑 빗창을 챙겨 습관처럼 물옷을” 입는다는 시구도 아주 일상적이고, “납덩이를 달고 파도 밑으로 들어간 늙은 어미가/ 바다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테왁 같은 낡은 집이 대신 손을 잡는다”는 시구도 아주 일상적이다. 시와 삶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모든 아름다운 것과 시적인 것은 일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모든 예술의 아버지이다. 고통의 원인은 첫 번째로 인간의 유한성(죽음)이고, 그 두 번째로는 재화의 부족(결핍성)이다. 만인들이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울 때 유유자적하게 음풍농월을 일삼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감동시킬 수가 없지만, 그 고통과 맞서 싸우며 그 고통 속에서 삶의 환희를 창출해낼 때는 만인들을 감동시키게 된다. 오늘도, 내일도 시인과 해녀가 자맥질을 하며 만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는 “저녁해가 바닷속으로 자맥질하고 있다”와도 같은 천하제일의 명구를 탄생시키게 된다.
유계자 시인의 「물마중」의 시적 성과는 유계자 시인과 해녀가 하나가 되어 “저녁해가 바닷속으로 자맥질”을 하는 기적을 창출해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애지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