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소설)
그녀들의 거짓말
이도원 지음|푸른사상 소설선 51|146×210×15mm|240쪽
17,900원|ISBN 979-11-308-2091-0 03810 | 2023.10.10
■ 도서 소개
돌봄의 최전선에서 고투하며 사회가 외면한 죽음을 떠안는 그녀들
이도원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그녀들의 거짓말』이 <푸른사상 소설선 51>로 출간되었다. 가부장제의 폭력과 공동체의 무관심 속에서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남편, 정신 질환을 앓는 아들, 운신을 못 하는 시아버지 등을 끊임없이 보살피고 희생하도록 강요받는 여성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작가는 돌봄의 최전선에서 고투하는 여성들이 정작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숭고한 희생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 작가 소개
이도원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게 편파적으로 기댄 소설을 쓰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당선 소감에 스스로 묶여 근 20년을 공터와 폐허와 빈집으로만 돌아다니다, 2020년 「세 사람의 침대」를 쓰고 현진건문학상 본상을 받았다. 오늘도 소설이라는 기이한 작업을 통해 불온한 혁명을 시도한다.
■ 목차
▪작가의 말
아귀
그녀들의 거짓말
근친(近親)을 선택하는 세 가지 방식
나는 죽었다
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
세 사람의 침대
자개장롱이 있는 집
책 읽는 남자
▪작품 해설 : ‘돌봄’의 비극적 리얼리즘과 미완의 연대 _ 이은란
■ '작가의 말' 중에서
집 앞으로 두 명의 형사가 왔다. 아이를 낳아 퉁퉁 부어 있는 내 얼굴에 대고 그 사람을 아느냐, 하고 물었다. 반정부 시위로 지명수배자가 된 그의 방에서 찾은 편지의 수신인을 찾아서 왔다고 하였다. 형사들은 연신 이상야릇한 웃음과 반말로 그의 행방을 물었다.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어떻게 말했던가. 그의 행방을 알기는커녕 그의 구국을 위한 민주화의 열망이나 신념에 동조하지 않은 지 오래라고 말했다. 내 말에 믿는지 믿지 않는지 모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형사가 돌아갔다.
그날, 비겁한 나를 보았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 쓰면서도 다수의 것을 지키기 위해선 지독하게 인색한 나를 보았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많고 고통에 취약하여 불의에 눈을 감는 엉망인 몸과 정신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변명하기 위해서이다. 치욕적인 그날과 그와 유사한 많은 날들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 또한 서슬 푸른 공권력과 다르지 않아 조금이라도 안일하거나 무력하거나 방심하면 끌려가고 감금당하고 고문당하는 옥고와도 같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백기로 투항하였고 하루는 붉은 깃발로 저항하였다.
이런 개인사로 인해 나는 소설가와 혁명가와 구도자를 혼동하고, 정확히 말하면 혼동하길 원한다.
사랑의 언약을 지키느라 어두운 길 위에서 기다렸던 수많은 연인의 굽은 등을 기억하고, 일장기를 뭉개며 저항했던 한 신문사의 편집국장이자 소설가를 기억하고, 애국이 아니라 진실에 복무한 언론인이 있음을 기억하고, 제 나라 국민에게 총을 겨누라고 시킨 수장의 상을 거부한 명창이 있음을 기억하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권력에 굴종하지 않은 시인이 있음을 기억한다.
또한 치열하게 살았으나 욕되게 살 수 없어 벼랑에 몸을 던진 불꽃의 지도자가 있음을 기억하고, 강의 물길을 막는 것을 저항하느라 분신한 비구니가 있음을 기억하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외치며 분신한 청년이 있음을 기억한다.
이 기억하는 힘으로 소설을 썼다. 이들에게 빚을 갚고야 말리라는 각오로 썼다.
■ 작품 세계
2020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아동,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을 비롯한 취약 계층의 생존을 위협하며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가시화했다. 의료 시스템의 마비와 교육 및 공공시설의 폐쇄는 취약 계층뿐만 아니라 이들을 보살피는 돌봄 노동자들에게도 재난과 같은 상황을 초래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촉발된 돌봄의 위기는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해왔음을 깨닫게 한다. 누군가의 식사를 준비하고 몸을 닦아주는 일, 타자의 불편과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대개 ‘여성이 잘하는 것’으로 젠더화되는 한편 숭고한 희생이라는 미명으로 낮은 임금과 고강도의 노동을 합리화해왔다. 특히 ‘어머니’, ‘아내’, ‘며느리’가 전담하는 가정에서의 돌봄은 공동체와는 무관한, 그렇기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사적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이도원의 『그녀들의 거짓말』은 여성의 숭고한 희생으로 신성화되어 온 돌봄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직업과 계층을 막론하고 가부장제의 폭력과 공동체의 무관심 안에서 돌봄을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중증의 정신병을 앓으며 밤마다 자신에게 성폭력까지 저지르는 아들(「근친(近親)을 선택하는 세 가지 방식」). 평생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시아버지(「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남편(「책 읽는 남자」), 심지어는 말라붙은 화분(「아귀」)과 끊임없이 보수해야 하는 낡은 집(「자개장롱이 있는 집」)을 돌보는 노동이 ‘어머니’, ‘며느리’, ‘아내’인 여성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도원의 소설에서 돌봄의 대상들은 모두 죽음을 앞두었거나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이들을 보살피는 그녀들의 노동 역시 ‘무가치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돌봄의 최전선에서 고투하는 이도원의 여성 인물들은 정작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사회가 외면한 죽음을 떠안는다. (중략)
끝으로 이 작품에서 ‘그녀’의 입으로 전달되는 돌봄의 본질을 상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당신도 포기해선 안 돼요. 사랑 말이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애틋함.”이라는 ‘그녀’의 언술을 천천히 곱씹어볼 때, 작가에게 진정한 돌봄이란 바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녀들의 거짓말」에 등장하는 ‘그녀들’은 배제되고 죽어가는 존재들의 돌봄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도원에게 돌봄은 죽음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고투하며 인간과 공동체를 생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숭고한 노동이다. 죽음과의 ‘불온한’ 연대는 헌신과 희생이라는 덕목으로 누군가에게 지워져야 할 부담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누어야 할 공동의 과업이다. 이도원의 소설이 그려내는 ‘돌봄의 리얼리즘’은 현재 직면한 돌봄의 위기와 함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돌봄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 이은란(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출판사 리뷰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남편, 배변을 가리지 못하는 시아버지…… 이도원의 첫 번째 소설집 『그녀들의 거짓말』에는 모두 죽음을 앞두었거나 사회로부터 배제된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직업과 계층을 막론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보살피고 희생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에 처한 여성 인물들이 있다. 가부장제의 폭력과 공동체의 무관심 속에서 이들을 돌봐야 하는 그녀들의 노동은 무가치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치부된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죽어가는 존재들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는 그녀들은 정작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작가의 등단작인 「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에서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마을에서 폐암 말기 환자인 시아버지를 홀로 돌보는 여성이 등장한다. 전 재산을 상속받은 남편은 학업을 빌미로 프랑스에서 떠난 후 돌아오지 않고, 네 명의 딸은 그런 아버지를 외면한다. 병원에서도 가망 없는 그의 치료를 거부한다. 가족 중 유일하게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며느리가 배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점점 죽어가는 시아버지를 보살피며 고립되어 간다. 표제작인 「그녀들의 거짓말」에 등장하는 아들들은 실제로든 상징적으로든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머니의 고통에 공감하며 분노하고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를 타파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을 청결하게 관리하는 일, 타인의 불편과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대개 여성들의 몫으로 인식되었다. 이도원은 불평등한 사
회구조의 모순과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돌봄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이 작품집에서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 여성 인물은 죽어가는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죽음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고투하고 헌신하는 그녀들을 작가는 기억하고 연대함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돌봄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 작품 속으로
아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웃통을 훌렁 벗어젖히는가 하더니 난데없이 나의 목에 칼을 겨눴다.
“아버지의 속셈을 알아버려서 어떡하지? 지금 내 손에 죽지 않으려면 잘 들어.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다시 감방에 갇히고 싶지 않아. 내 눈을 똑똑히 봐. 내가 출소해서 나올 때까지 아버진 살아 있어선 안 돼. 자살하는 게 좋겠지. 정신병원에 있던 마누라가 투신한 것이 자살의 유리한 핑계가 되겠지. 나라는 범죄자 아들도 그렇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 만약 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조금 전 유골을 뿌린 그곳에 가서 수장시켜버릴 테니까. 그렇게 해도 법망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잘 알아. 난 완전범죄에 성공할 수도 있고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법도 알아.”
(「그녀들의 거짓말」, 73쪽)
비로소 나는 그가 가부장적인 수컷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 ‘그럼, 당신은 죽지 않았어. 나에게 시체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온몸으로 저항해야 할 거야. 결국 당신은 죽음 직전에서야 며느리인 나의 신분과 같아지는 꼴이네. 그렇다면 며느리인 나는 겨우 죽어가는 사람과 신분이 같다는 것이지. 불행한 것은 나야. 그러니까 나에게 동정심을 바라지 말고 가부장으로서의 품위를 지켜.’
그의 입속으로 연신 포도알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내 얼굴을 향해 포도씨를 내뱉는 그를 내려다본다. 그의 가쁜 호흡이 느껴진다.
(「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 139쪽)
주민센터의 공무원은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비 지원이 어렵다고 했다.
“집엔 반신불수의 남편이 있어요.”
“간병인을 쓰세요.”
“간병인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요? 자활센터에서 받는 그 돈으론 살 수가 없어요.”
“그것은 가족이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그렇다면 남편은 하루 종일 방치되어 있어야 하고 결국 남편은 죽을 수밖에 없어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무원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일하지 않으면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어요.”
나는 방을 나왔다. 남편의 침대 머리 쪽에 붙은 메모를 힐끗 쳐다본다. 메모의 내용이 또다시 바뀌어 있다. ‘나는 매일 모든 면에서 점점 나아지고 있다-나폴레온 힐.’
(「책 읽는 남자」, 207~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