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6.
뚝뚝뚝!
분명 노크 소리는 아니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여니 배기통에 달렸던 고드름이
녹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지며 봄 인사를
한다.
그러고 보니 최근 서너 번 내렸다가 얼어
붙었던 눈이 녹으면서 생긴 물방울이 여기
저기 사방에서 뚝뚝 떨어진다.
저 소리는 봄을 마중 나온 소리다.
매스컴에서 매화소식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봄이 지척(咫尺)까지 다가온 모양이다.
뜰안의 산수유 꽃눈은 잔뜩 부풀어졌고,
목련의 동아(冬芽)도 매화 꽃눈도 여차하면
터질 기세이니 지금쯤 남쪽에선 매화가
활짝 피었겠다.
인간세상이 하도 시끄러워 한동안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제 할
일을 묵묵히 하며,
인간과 뭇 생명들에게 봄의 환희를 맛보게
해주려 엄청 힘을 쏟았나 보다.
09;00
중간까지만 읽었던 책 '차마고도'를 서가
에서 꺼내 읽기 시작한다.
20여분이 지나자 눈에서 눈물이 나며 빡빡
해져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릿속 사유(思惟)의
창고문을 연다.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분? 20분?
슬프게도 30분을 넘기지 못한다.
독서도 젊음의 한때였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인공인 '대망'과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 그리고 한국
문학전집을 밤을 새워 읽을 때도 있었지.
식탁에서, 화장실에서, 침대에서, 심지어는
대중교통으로 이동을 할 때도 책은 늘
내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라도 틈만 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고, 아파트 상가에 들어선
책 대여점의 만화와 무협지, 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기에 5년이 지날 무렵 그
대여점에선 더 이상 읽을만한 책이 없었다.
역사, 인문, 천문, 지리, 철학 등 장르를
따지지 않았고 때로는 야한 에로소설도
가리지 않고 읽었으며 은퇴 후에는 책
대여점이나 작은 서점을 운영하며 질리도록
책을 읽고 싶었다.
지금은 없애버렸지만 내가 쓴 버킷 리스트
(bucket list)와 2028년 개봉할 타임캡슐
(time capsule)에는
첫 번째 어학공부,
두 번째 색소폰 등 악기 배우기,
세 번째 글 쓰기 도전,
네 번째 100대 명산 오르기,
다섯 번째는 한운야학(閑雲野鶴)이 되어
만권(萬券)의 책을 읽는 거였다.
은퇴 후 오전에 시간이 많아 시립도서관에
자주 들렸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많아 서너 권을 쌓아
놓고 한 권에 집중하면 지루할 수도 있기에
한 시간 단위로 장르(genre)가 다른 책을
펼쳤다.
도서권 출입을 한 지 3개월쯤 될 즈음 실제
구름이 한 점도 없는 파란 하늘인데 먹구름이
점점(點點)으로 보이고, 사물이 우그러지고
깨지고, 중간중간 뭉텅뭉텅 지워지는 현상이
점점(漸漸) 심해졌다.
제기랄!
눈을 혹사(酷使) 시킨 대가인가.
'습성 황반변성'으로 진단이 나왔다.
완치가 불가능하며 줄기세포 치료도 힘들고,
루센티스, 아바스틴, 아일리아 등 망막주사
치료로 실명되지 않을 정도로 관리를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거다.
몸에서 눈이 아프면 건강의 90%를 잃는다는
건데 현역에서 벗어났기에 앞으로 과중한
목표와 업무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감하다.
잠시 독서를 중단했다.
이내 읽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산에
다녀오면 며칠 정도는 눈 컨디션이 유지
되었기에 전국의 산을 찾아다니며 등산에
집중을 했다.
명말청초 시대 개혁사상가인 고염무 선생은
'독서만권(讀書萬券) 행만리로(行萬里路) 라,
즉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다니라고
했다.
책을 통한 지식과 여행을 통해 실제 경험을
병행해야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훌쩍 가버린 세월 속에 무엇을 얻기보다는
상실(喪失)이 더 많은 세대가 되었다.
비록 독서만권(讀書萬券)은 못할지라도
두 다리는 성성하기에 행만리로(行萬里路)를
하고자 우리나라 100대 명산은 물론 300대
명산까지 두루두루 올랐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에 적었던 어학
공부와 악기 배우기는 진즉에 포기하였고,
독서만권(讀書萬券)도 이젠 포기해야겠다.
서가(書架)에 꽂아둔 책 중에 삼국지, 수호지
등 고전은 작년에 손주들에게 주었고, 추가로
더 줄만한 책이 있는지 골라보고 읽지 않는
잡다한 책은 빼서 한구석으로 모은다.
인생은 욕심대로 되는 게 아니다.
사라져 가는 세월 속에 굳이 인생의 퍼즐
(puzzle)을 완성시킬 필요도 없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읽고, 책을 읽을 수
없다면 도로 서가에 꽂으면 된다.
'돌발성 난청'이 치유되었기에 다행히 귀는
멀쩡하다.
책 대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symphony No.1 'Spring'을 틀고
안마기에 올라타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2025. 2. 16.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석천의 많은 바램이 순리대로 이루어지길 빕니다. 건강하자.
와!!
대단하다 친구 그리고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