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의 행복
창3:22”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너 자신을 알라.”는 쏘크라테스의 경구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가면에 속아서 진정한 자기 모습은 못보기 때문입니다. 가면은 무의식적인 가면이 되어서 우리는 벗을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가면을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가면과 가면이 만나서 살면 시간이 흐를수록 가짜의 삶은 무미건조해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원래 한 몸이었습니다. 여자를 본 아담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나서 둘은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부끄러움은 둘이 더 이상 하나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둘이 된 아담과 하와에게 가장 간절한 소원은 다시 이전처럼 하나된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창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되고 자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자리잡으면서 남자와 그의 아내가 진정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되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되는 전체성을 지향하고 있다(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그러나 이러한 전체성을 이루려는 작업은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외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구 작업이 진정한 것이 되려면, 그 작업은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빙껠<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영성>)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은 대개가 가면이고 진정한 모습은 가면 뒤에 그림자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는 책 제목처럼 가면 뒤에 가려진 그림자는 우리 자신을 향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분노나 당황, 무의식적인 이상한 행동, 반복적으로 꾸는 꿈은 자기 속에 숨어 있는 그림자의 반영입니다. 그림자를 의식에 통합하지 못하면 우리는 온전함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가면을 벗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세리의 기도는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는 기도였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무의식적인 가면을 쓰고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바리새인이 멋지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아의 인식 배후에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열등한 그림자가 숨어 있었습니다.
가면을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은 불가능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찬송가의 가사처럼 교만과 열등감과 거짓으로 얼룩진 우리 내면의 숨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 놓을 때 주님과의 관계가 시작합니다. 문제는 무의식적으로 내면 깊숙이 감추고 숨겨둔 그림자를 우리 자신이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자아가 바라보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페르조나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감추고 숨겨두었던 우리의 숨은 그림자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가면과 가면과의 만남은 공허하지만 진정 용서받고 치유된 영혼과 영혼의 만남은 기쁨입니다.
요10: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부부, 가족, 교회공동체, 나아가 세상은 진정 하나됨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세상은 점점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25. 3. 2 장기옥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