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한 관심은 복음 밖의 사람이나
다른 복음에 미혹된 사람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말론적인 신앙은
거룩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선지자와 사도적 이해를 하지만
다른 복음은 다른 영, 곧 거짓 영의 미혹을 받아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악한 영의 종이 되었습니다.
최근 유튜브 영상을 통한 이단의 공격적인 방어는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사사 시대의 단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순수 지대의 사람들.....
그 소박한 사람들의 진심을 담은 거짓 이야기는 악어의 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깜박 속을 수 밖에 없는 감성 짙은 호소력은
영상 문화가 만든 영성의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평신도 영성 개발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상은
만인 제사장의 실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셜네트워크 시대에 걸맞는 소통의 영상은
소통의 공감을 이루는 화통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영성 문화의 꽃으로 피어난 감성적 영성의 공감을 이루는 소통의 장은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올무요, 함정이며, 덫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를 사냥하듯 영혼을 사냥하는 함정의 덫은
친근한 정서를 가진 우리네 이웃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느닷없이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그 올무에 걸림같이
현자의 돌을 찾는 연금술사의 꿈을 이루는 길일지라도 홀연히 임하는 이단과 사이비의 덫에 걸리고 맙니다.
바른 복음에 깨어 있는 언약의 백성은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의 믿음을 지키지만
말씀의 도가니로 연단 되지 않는 영혼은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거짓 영성의 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영혼을 사냥하는 거짓 그물에 대한 종말론적인 탄식을 하였습니다.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미7:1-8)
이단과 사이비의 그물과 함정은
집안 식구 곧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는 패륜에 빠졌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이단과 사이비의 창궐이 빚은 가정 파탄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종교적 가출 현상은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의 일그러진 종교의 자화싱이 되었습니다.
종교란 말 그대로 이상적인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인 광신적 종교 현상으로 인하여 지역과 이념을 넘어서는 종교적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든 요나는
바다의 큰 폭풍으로 바다가 점점 흉용할 때 자기 탓인 줄 깨닫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책임지는 요나의 자세는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지지 않는 한국 교회 지도자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모두가 산다는 메시야의 정신은
한 말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새 생명의 열매를 맺는 참된 목자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지도자 상에는
죽어야 산다는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면 모두가 살고.....
내가 죽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상은 독재 권력의 전형이요, 그 전횡의 시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의 사회적 혼란을 책임지지 않는 모습은
세속화로 타락한 종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요, 뒤틀린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고난의 길은
천하 만민을 하늘의 보좌 앞으로 구원하는 선한 목자의 리더쉽이요, 그 능력이 되었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한 목자의 그 사랑과 수고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모든 성도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에서
목자의 그 사랑과 수고의 흔적이 없다면 이미테이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영생의 구원, 곧 성령의 열매는
성도의 조건에 걸맞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구원이란 그냥 물에서 건져 올리는 단순한 구조 행위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가 깃든 믿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좋은 생각이나 신념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능력을 믿음으로 소통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공유하는 믿음의 능력은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주 예수의 은혜로 주 믿는 성도의 마음에 깃드는 소통의 방편입니다.
주 예수의 복음이 마음에 심긴 믿음의 도로 말미암은 주의 성도는
생명의 향기를 각 처에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 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순전한 바로 그 생명의 향기를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시는 성령의 충만으로 넘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이단 시비로 교회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특정 사람을 집단 폭행하며 밀가루를 투척하고 붉은 글씨를 쓴 비방하는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 하는 모습은
생명의 향기를 각 전하는 아름다운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만 합니다.
일그러진 종교 단체의 추태는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 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기독 신앙은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폭언과 폭행을 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복음은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받으되 위협하지 아니하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합니다.
또한 유튜브 방송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며
마귀 사탄이라고 무차별 파상공격을 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은혜의 말씀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였습니다.(롬12:9-21)
종교적 파시즘의 집단 행동은
이단과 사이비의 광란적 추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적 목적의 폭언과 폭행과 테러는
천박한 종교의 진상, 그 자체입니다.
종교의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종교적 이데올로가가 만들어 낸 좀비적 마녀 사냥일 것입니다.
착하고 순전한 사람이 그 종교의 집단에 들어가면 모두가 난폭해 지는 것은
재앙의 올무에 걸린 불나방의 뭄부림이며, 악과 패륜으로 점철된 종교적 지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파시즘의 집단 행동은 성경적인 참된 기독 신앙의 산물이 아니라
이단과 사이비의 종교적 탐욕의 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뿌리를 가진 종교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포용적으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 그리고 관용과 포용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그 은혜의 물결입니다.
진리의 복음을 가진 사람들의 정서는 큰 물가의 옥토요,
구원을 싹트게 하는 생명의 샘을 가진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그러나 이단의 배타성은
사망의 가시 울타리요, 재앙의 그물입니다.
진리의 사랑은 가정의 구원을 이루지만
이단의 올무는 가정의 파탄을 초래합니다.
가족과 친척과 친구로 이어지는 삶의 행복은
재앙의 그물을 만나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다단계의 폐해는 사람이 곧 상품이어서
영혼을 사냥하는 새 사냥꾼이 올무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가까운 사람과 함꼐 나누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이 잘 못되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비극을 맞을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성경에 대한 왜곡된 열심으로 충만합니다.
종교적 탐욕과 과욕이 부른 광신적 행태는
하늘의 뜻을 개인의 욕망으로 추구하는 영성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로 투영된 기성 교회는
바벨론 교회라는 여우 고리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양의 탈을 쓴 아첨과 탐심과 외식의 가면은
이단과 사이비의 긴 그림자를 가졌습니다.
종교인에 대한 불신의 악순환은
종교의 광신적 행태의 결과일 것입니다.
누구라도 지기 종교는
이단과 사이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거울에 비쳐진 자기의 형상은
얼룩지고 일그러지고 뒤틀린 모습뿐입니다.
왜곡된 종교적 열정이 만들어 낸 이단과 사이비는
영혼을 사냥하는 재앙의 그물이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에 대한 토템적 숭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영성으로 추구하는 극단이 낳은 비극의 씨앗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구촌의 사막화 현상은 재앙, 그 자체이며
기성 교회의 바벨론 교회화는 종말론적인 종교적 타락의 실상입니다.
종교인으로 숭배 받는 자리는
바벨론 교회의 진상을 가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벨론 교회라고 지탄 받는 맘몬 교회는
맘몬 신앙의 개미 군단이 만들어 낸 인본주의 영성의 바벨탑입니다.
재물을 축적하여 건물을 쌓으면 바벨탑이요,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담아내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빛을 축적하면 폭발하지만
빛을 분산하면 푸른 생명의 물결로 가득합니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는 복음을 받고,
그 은혜를 사랑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종교 사기꾼으로
세상의 번영과 성공을 종교적 욕심으로 채우는 미신에 함몰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는
이단과 사이비의 전략전술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말씀으로 이루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거룩한 사역이요, 아름다운 목회며 참된 선교며 신앙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