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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침묵
마지막 일곱째 봉인을 열면서 어좌에 계신 분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는 읽어야 할 글로서 제 역할을 마감한다. 이젠 침묵의 시간을 맞닥뜨린다. 반 시간의 침묵은 지금껏 펼쳐진 모든 장면들을 조용히 움츠리게 한다. 마치 폭풍 전야와 같다. 새로운 무엇이 등장할 것 같은 설레임과 혹여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반 시간의 침묵을 긴장 속으로 밀어넣는다.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린 후, 묵시록의 이야기는 어린양에게 집중되어 흘러갔다. 현실의 고통과 죽음, 그 뒤에 펼쳐지는 우주의 혼돈과 외침, 그리고 급기야 나타난 십사만 사천의 무리. 이 모든 장면들은 어린양의 피로 상징되는 구원을 향해 쉼없이 내달렸다. 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쪽 손에 들린 그 책은 적확히 어린양 예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반 시간의 침묵은 또다시 어좌에 앉으신 이가 머무는 ‘하늘’을 가리킨다. 하늘은 끝끝내 다다른 완성의 공간이 아니다. 하늘은 침묵과 더불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야만 하는 시작의 공간이다.
전통적으로 ‘침묵’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스바 1,7; 즈카 2,17; 시편 76,9 참조) 불행히도 묵시 8장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날의 현상은 매우 폭력적이다. 땅이 타버리고 바다가 피로 물들고 별들이 떨어지고…. 무엇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절단나고 피범벅되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요한 묵시록의 심판은 파멸 그 자체로 인식되었고 수많은 예술 작품 속에서도 묵시록이란 말마디는 세상 끝날의 무서운 재앙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스운 건, 그런 섬뜩한 심판을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판을 스펙터클하게 그려 놓을수록 심판으로부터 어떻게든 멀어지려 하는 게 사람들의 심정이기도 하니까.
심판을 폭력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대부분의 해석 앞에 우리는 묵시 8,2-5까지의 천상 전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천상의 전례가 심판이 시작되기 전 펼쳐지고 있다. 묵시 6장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세상의 희로애락의 시작이 하얀 말, 그러니까 천상의 영광과 기쁨의 상징체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묵시 8장의 시작과 겹쳐져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급히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심판은 천상의 영광과 기쁨, 혹은 구원과 어떤 식으로라도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 심판은 천상에서 완성된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구원의 자리에서 징벌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은 파괴와 멸망으로서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초대 혹은 구원에로의 채찍질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여 멸망시키기 위해 당신 아들 예수를 보내시지 않았다.(요한 3,17) 요한 묵시록의 징벌은 구원에로의 길잡이며 구원을 향한 외침과 같다. 왜 그런가?
처음 네 개의 나팔은 우주의 혼돈을 불러 온다. 땅과 바다와 강물,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의 혼돈이다. 이 혼돈은 징벌이나 심판의 무자비함을 상징하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창조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유인즉, ‘삼분의 일’로 혼돈의 영향력은 제한되고 혼돈은 탈출기의 재앙과 흡사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박이 떨어지는 건 탈출 9,24-25와 닮았고, 물이 피가 되는 건 탈출 7,20-21과 닮았다. 천체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시작되는 건 탈출 10,21-23의 이야기와 연결되며 쓴물이 된다는 건 탈출 15,23-25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탈출기의 재앙들은 파라오의 완고함에 대한 해방과 자유를 지향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광야에로 나아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탈출기의 재앙들은 필요했다. 세상에 징벌을 내리고자 요한 묵시록의 나팔은 울려 퍼지는 게 아니다. 나팔은 천상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이고 구원의 자리인 천상에서 이 지상의 완고함과 폐쇄성을 향해 구원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지상의 ‘삼분의 일’에 대한 징벌은 이 땅이 하늘의 구원에로 향해야 한다는 확고한 표징으로 작동하고 있다.
결국, 탈출기의 재앙을 다시 소환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제 삶의 자리가 어디든, 그 자리의 본디 의미와 가치를 하늘로부터 되새기는 게 재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 세상의 바쁜 삶 속에서 제 모습을 잃어버린 이들의 “인정투쟁”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재앙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힘든 건, 제 노력의 부족이나 능력의 상대적 부재 때문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사회적 관계 안에서 짓눌린 억압 때문이 아닐까.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노명우 교수는 인정투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정투쟁으로 전개되는 사회투쟁은 단순히 자기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투쟁과는 다르다. 인정투쟁의 촉발 요인이 자기 존엄에 대한 부정이기에, 인정투쟁은 제로섬 게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무시를 통해 부정당했던 자기 존중을 되찾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정투쟁은 단순히 심리학적인 공격적 행동도,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 행동도 아니라, 약화된 자기 존중을 회복하여 자기를 치유하는 동시에 무시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를 치유하는 도덕적 행동이다. 이 치유의 과정이 인정투쟁의 도덕적 역할이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19, 210-211)
제 욕심을 찾아 나서고, 스스로 바라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디 제 모습과 제 가치를 되새겨 보는 것이 인정투쟁이어야 한다. 모두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회에서 경쟁은 오히려 자기 상실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도무지 견뎌 낼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주어졌을 때, 오히려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질문 앞에 쓰러질 때, 그때 나는 비로소 나를 인정하는 빈자리를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
묵시 8장에서 시작하는 심판의 재앙들을 이해하는 데 ‘인정투쟁’의 거룩한 전투와 고통에 대해 묵상해 보는 건 필요한 일이다. 저 옛날 파라오의 억압 아래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히브리 민족의 고통이 광야를 향하는, 하느님을 향하는 발걸음으로 이어지는 ‘인정 투쟁’, 거기서 거룩한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요한 묵시록을 무시무시한 심판의 책으로 이해하기에 딱 좋은 것이 재앙들의 묘사이지만, 심판보다는 애틋한 하느님의 초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디 나를 찾으라는 초대, 힘들고 무너지더라도 그건 끝이 아니라 제 모습을 회복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초대, 그 초대를 아프고 눈물겹게 받아들일 때, 요한 묵시록의 재앙이 왜 천상의 나팔 소리에서 시작한 것인지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더 시끄럽고 더 불타고 더 어두워지더라도 요한 묵시록을 읽고 새기고 실천하는 신앙인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간절히 기다리며 조용한 침묵 속에 제 모습을 차근차근 회복해 나갈 것이다. 우리에겐 ‘반 시간’이 주어져 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여름 과일
성경에는 “여름 과일”이라는 낯선 명칭이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명칭만 그럴 뿐, 우리가 다 아는 무화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무화과는 5-6월에 첫 열매를 맺지만, 8월 중순 이후 많은 양을 수확하므로 “여름 과일”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신명 8,8에서는 무화과를 가나안의 일곱 토산물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는데, 이렇듯 이스라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열매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고, 주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신탁이나 환시에도 종종 나오는데요, 기원전 8세기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아모스가 본 환시가 일례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여름 과일 한 바구니였다. 그분께서 ‘아모스야,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여름 과일 한 바구니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종말이 다가왔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으리라’”(아모 8,1-2).
환시에 여름 과일 한 바구니가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수확의 기쁨을 상징하는 무화과 바구니가 재앙의 상징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여름 과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이쯔]가 “종말”을 뜻하는 히브리어 [케쯔]와 철자와 발음이 비슷해, 북왕국 심판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구실을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수확의 모티프를 농사의 기쁨이 아닌 심판의 의미로 쓴 것으로, 이는 수확의 상징인 타작마당을 평생의 선과 악을 헤아려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심판의 자리로 제시한 마태 3,12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무화과에는 심판의 의미만 있지 않습니다. 무화과는 에덴 동산에서 자라던 것(창세 3,7)으로 낙원의 기쁨을 상징하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유다교에는 무화과가 선악과라는 전승도 있는데요, 원조들이 죄를 지은 뒤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기 때문입니다. 곧 선악과를 먹고 죄책감을 느끼자, 다른 나무에서 몸을 가릴 만한 잎을 딴 것이 아니라 곧장 선악과 잎으로 옷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그리스도교에서는 사과를 선악과로 보았는데, 이는 사과를 뜻하는 라틴어 [말룸]이 사악함을 뜻하는 라틴어와 철자가 같아 생긴 전승입니다.
무화과가 지닌 이런 상징성 때문에 옛 이스라엘에서는 경건한 유다인들이 무화과나무 아래를 즐겨 찾아 기도했습니다. 요한 1,47-48에 나오는 나타나엘이 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자마자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칭찬하셨는데요, 그 실마리가 바로 무화과나무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48절). 그는 선악과로 여겨진 나무 밑에 앉아 기도하고 율법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화과가 선악과이든 아니든,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자란 과실수임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화과를 먹을 때도 낙원의 열매를 먹는 셈이니 흥미롭습니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4)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395 추정)를 위시한 여러 교부(敎父)들에 따르면, 아담은 원래 자기가 입고 있던 자비와 은총의 옷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알몸이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던(창세 2,25 참조) 아담과 하와에게 걸쳐져 있던 옷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깨끗하고 투명한 옷으로 그들을 항시 입혀 주셨습니다. 그 옷은 공기와도 같은, 늘 있어서 귀한 줄 모르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지어진 옷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알몸을 인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입혀주셨던 옷을 스스로 벗어 던진 꼴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첫 인간은 자비와 은총의 옷을 상실하고 그에 비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죄의 결과인 가죽옷을 입게 됩니다. 거기다 무상으로 누리던 모든 것들을 상실하고 고생하여 땅을 부쳐 살아남아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입혀 주신 옷이 아니라 하느님을 참칭(僭稱)하는 옷, 자기 눈에 탐스럽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옷을 입으려 한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 입혀 주신 옷을 벗어 던진 인간에게 새로운 환복의 역사가 주어졌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환복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과 위엄을 간직한 옷은 주님 변모 사건 때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 주님께서 이 옷을 남김없이 벗으셨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십자가 상 제사입니다. 이 제사를 향해 가시는 도정에서 옷 벗김 당하시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입히려 드는 옷을, 이미 피에 물들어 겉으로 보기에 투명함과 고결함을 상실한 옷을 입으시게 됩니다.(마태 27,28; 마르 15,16-20; 요한 19,23-24 참조) 마치 은총과 자비의 흰옷을 가죽옷으로 환복한 아담의 형상이 재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벌어진 현실은 달랐습니다. 십자가 상 제사를 성취하신 주님께서 부활이라는 사건으로 다시금 영광과 위엄을 간직한 옷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입혀 주신 옷을 벗음으로 해서 죄를 짓는 인간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옷을 벗으심으로써 용서와 구원의 선사라는 역전을 이루어 내십니다.
이 길 위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부활의 빛을 간직한 당신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마치 첫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은총과 자비의 옷을 입혀주셨던 그 시절이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절을 요한 묵시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이와 같은 환복의 역사를 바오로 사도는 또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2-14);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콜로 3,12-14)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으로서의 위엄과 영광을 간직한 옷마저도 벗어 던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비록 자기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옷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이 아니라면 마땅히 배제해야 할 것이며, 이미 껴입고 있는 부수적인 옷들이 있다면 그것 또한 과감하게 벗어 던질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부끄럽게 드러날 따름인 우리 알몸을 당신의 옷으로 덮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늘 입혀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옷을 끊임없이 찾아 입어야 하겠습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마르 16,4)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끝까지 그분 곁을 지켰던 사람들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구고 가슴을 부여잡고 차가운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이 여전하기에, 그래서 그분의 처참한 시신을 그냥 바라만 볼 수 없기에,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분의 시신을 아마포에 싼 다음, 돌무덤에 모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쉬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던 예수님. 그분을 더 이상 뵐 수 없습니다. 해가 저물고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그분 시신에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몇몇 여인들이 분주히 움직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 여인들은 향료를 들고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걱정이 앞섭니다. 누가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굴려줄 수 있을까? 여인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느새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여인들의 눈 앞에 펼쳐집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놀란 가슴을 뒤로 한 채, 황급히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하얀 긴 옷을 입은 젊은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쓰러집니다. 서로의 몸에 기대어 무서움에 떨고 있던 여인들에게 그 젊은이가 말합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 16,6)
그렇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하신 것입니다. 마르코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전하는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분께서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마치 신문 기사를 써 내려가듯 정확하게 부활의 장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결하게 그분의 빈 무덤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과연 빈 무덤만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빈 무덤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빈 무덤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묶여 있지 않으시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천사로 추측할 수 있는 흰옷을 입은 젊은이의 말이 이를 보증합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더 이상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비록 젊은이가 전한 소식을 듣고 여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 앞에 나타나시어 당신이 죽지 않고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46)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책임이 있는 르하브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혁명가의 길을 가게 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13세에 가출을 했고 평생 애정 결핍에 목말랐다고 한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는 교육은 최소한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유교 경전의 기초지식을 배우다 중단하고 집안의 농장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마오는 잦은 구타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당시 중국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로 가서 일하면서 외화도 벌고 동시에 외국어와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마오쩌둥도 프랑스에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 여비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북경대 도서관에서 일했는데 이 기간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학구열이 높은 마오는 도서관에 산처럼 쌓인 책더미 안에서 지식을 쌓았다. 특히 역사 서적을 즐겨 읽었는데 고대의 제왕들은 유학을 가지 않고 정무를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결국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중국의 역사서를 독파하며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만 친한 친구에게도 함구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게 없지만 르하브암도 겉으로 자신의 뜻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안으로 품고 후일을 도모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 제4대 국왕인 르하브암(기원전 931~913년) 때 남북 이스라엘이 분열된다. 그는 다윗의 손자이자 솔로몬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을 물려받았다. 솔로몬으로부터 왕위는 물려받았지만 솔로몬의 과도한 부역과 세금징수 등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다윗 왕가에 대한 반감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로보암을 앞세워 부당한 부역과 높은 세금을 낮춰 달라고 요구했다. 르하브암은 사흘 뒤 답변하겠다고 하며 솔로몬을 보좌하던 관료들과 논의했다. 관료들은 솔로몬왕 때 세금이 너무 과했다며 예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견에 긍정적 답변을 줄 것을 권고했다. 르하브암은 자신과 함께했던 소장파 신하들과도 회의를 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은 백성들을 너무 풀어주면 새로운 왕을 우습게 보며 권위가 실추된다고 더 가혹하게 통치하라고 조언했다.
르하브암은 약속한 사흘이 지나 신하들을 만났는데 인생의 최고 악수(惡手)를 두었다. 이 한 마디가 바로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도화선이 됐다. 지도자는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불이 타고 있는데 휘발유를 부은 셈이다. 이미 실망으로 다윗 가문에 등을 돌린 10지파는 분노하며 ‘우리와 다윗과 무슨 연관이 있나. 이제부터 너나 잘 하세요’하며 떠났다. 르하브암의 통치 영역 안에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만이 남았다. 르하브암은 부역 감독으로 아도람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죽여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르하브암 왕도 위기를 느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망하였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17) 나의 기도에 대한 확신인가? 하느님에 대한 확신인가?
자기중심적 자세 대신 하느님 찾는 것이 중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루카 11,9-10 참조)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모든 기도가 들어질 것처럼 여겨지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경우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내지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등의 성경 본문은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주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전형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루카 11,11-13 참조) 이어지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보다 더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핵심 본질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우리의 바람이 들어지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떨치고 하느님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라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부모의 보호 아래 사는 어린이들처럼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마태 6,25-34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1-22; 마르 11,22-24; 루카 17,6 참조) 하지만 기도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빵과 생선을 주되, 돌과 뱀을 주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가 청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또 산을 옮기는 대신 산을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로 다 이루어지니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을까요? “기도할 때는 마치 하느님만이 계신 듯이, 일할 때는 마치 자기만이 있는 듯 행하라!”는, 루터 내지 이냐시오 로욜라로 소급되는 영성 원칙이 있습니다. 기도는 은총의 영역에, 활동은 윤리의 영역에 속합니다. 둘은 각각 고유하며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지만 두 가지 자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설명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청원 기도를 드릴 때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solo dios basta)라는 데레사 성녀의 단순한 기준,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제가 옮길 수 없는 ‘산’을 돌아서 갈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제가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제 자신의 ‘산’을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또 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혜를 주소서! (어느 수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