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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정익 목사
비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비전이라는 말은 오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비전이라는 말은 1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모습을 상상하고 꿈꾸면서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오늘 노력하고 공부하고 최선을 다 하는 삶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2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20년 후에 성공한 나의 모습을 마음으로 한번 그려 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한 생각이고 즐거운 일입니까.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 모습을 이루려고 오늘 노력하는 마음 그 마음이 비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비전이 있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런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 땀 흘림도 행복하고 잠시 어려움이 있어도 잘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같은 비전을 갖고 꿈을 갖고 환상을 갖는다는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곡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젊은이는 무엇보다도 입지(立志)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뜻을 가지고 꿈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라”(요엘 2:28)고 했습니다.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이 세상에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한 달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700년 전에 이 땅에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 7:14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2:4를 보면 “그때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그때에 나라들이 서로 치지 아니하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말하자면 비전입니다. 비전도 이런 비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요 3:16).
“그때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고 그때에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으리라”(사65:25).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아질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뛰놀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리라”(사35:5-1).
“장차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 41:5).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세상에 이런 환상이 어디 있고 이런 비전이 어디 있습니까.
또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환상도 이런 환상이 없고 비전도 이런 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 이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은 이 세상에는 지상 최대의 비전이었고 꿈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 사람들에게 상당한 꿈을 주었고 비전을 안겨 주었습니다.
1. 특히 당시 유대인들에게 큰 꿈
당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외세에 의해서 압박받고 살았습니다. 우리민족은 압제받은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의 힘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현재 고난이 있고 막심하고 미래가 암담하고 오늘 헤어날 방법은 없고 얼마나 힘든 생활입니까.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왕의 자격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때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기대가 주어지고 소망이 주어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미래에 이런 꿈과 기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미래, 장래, 희망은 좋은 것입니다. 미래가 있고 꿈이 있고 장래가 있으면 우선 배가 부릅니다, 삶이 행복하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비전이 주는 힘이고 소망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동네에 지식이 아주 깊은 분이 있었는데 그 어른의 손자와 놀기 위해서 그 집에 갔었는데 그 분이 놀고 있는 저를 부르더니 제 얼굴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그러더니 손 좀 보자 그러십니다.
제 손을 보시더니 ”너는 장차 큰 사람이 되겠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 목사님이 저를 보실 때 마다 “너는 장차 큰 사람이 될 거야“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꿈과 기대를 주는 것이 참 좋습니다. 저는 그때 어렸을 때이지만 그 말씀들을 모두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 그대로 그렇게 될 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을 생각할 때마다 참 행복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들이 내게 꿈이었고 기대였고 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키 큰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꿈이고 비전이고 뜻이고 희망입니다.
성경을 보면 “장차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가 오시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열리고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뛰게 될 것이고 벙어리가 노래하고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꿈도 이런 꿈이 없습니다.
이 같은 미래가 있고 기대가 있고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약속은 지상 최대의 비전이고 꿈이고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고 가장 기뻐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2. 또 당시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복음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참혹한 고난을 받고 살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고난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4천년 역사 가운데 25년간을 압제와 지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지정학적으로 이방민족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특히 2절 말씀을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그 빛이 비취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흑암”이라는 말은 당시 참혹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참상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이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메시야가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오시면 3절을 보면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그가 와서 평강을 무궁하게 할 것이고 장차 다윗의 자리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고난 받고 지배받고 살아가던 히브리민족에게 얼마나 소망적인 말씀이고 약속입니까. 그래서 이 약속이 복음이고 꿈이고 환상이고 비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비전이 얼마나 소망적인 것인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참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온갖 수난과 압박과 포로생활과 지배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진 백성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흩어진 유대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한창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을 피하여 만주 땅으로 상해로 러시아 땅으로 흩어져 살았던 것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유대인들이 모두 147개국에 600만 명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대인은 유랑민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학자들이 이 세상에서 기적의 민족이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유대인이고 또 하나는 한국민족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유대민족은 몇 번씩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 한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두 민족이 오늘 이 지구상에서 건재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유대인에게는 선민이라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한국민족이 생존한 이유는 잘은 모르지만 한국의 이름이 조선인데 영어로 "chosen" 즉 “선택”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민족에게 이 기대와 소망과 약속과 비전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고 약속이 있으면 오늘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즐겁게 기다리고 참아낼 수 있습니다.
그 때나 오늘이나 유대인들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융성기라고 할 수 있는 다윗시대의 번영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약속하시기를 “그가 오시면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장차 메시야가 오면 다윗시대의 영화를 다시 한 번 재현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이 유대인들을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약속입니다. 그러면서 7절 끝에 가서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비전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시 압제와 핍박과 설움 속에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그 고난 속에서도 그 꿈이 이루어질 날만을 기다리며 그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 이런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그 고난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어쩌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렇게 이 세상에 꿈과 비전을 심어주었습니다.
3. 세계인에 큰 꿈
이 약속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약속은 아닙니다. 이 약속은 당시 유대인에게 주어진 형식으로 주어졌지만 사실 이 약속은 이 세상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가깝게는 유대인에게 주어졌고 또 그 당시 이방인에게도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들이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당시 동방이면 바벨론을 가리키는데 바벨론은 오늘의 이라크 땅입니다. 동방의 사람들이 그 멀리 바벨론에서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그 멀리서 예수의 탄생을 알고 찾아온 것은 오래 전에 주어진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고대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도 예수 탄생의 약속을 듣고 알고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다가 마침내 탄생의 비밀을 알고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탄생은 마침내 오늘 전 세계에 퍼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듣고 믿고 구원받고 하늘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민족은 하나같이 오늘 이 시대를 전향적으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깨어난 민족은 기독교를 알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제가 자라난 동네는 아주 아득하고 구태의연하고 제사를 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던 그런 동네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그런 동네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집이 먼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상당한 비아냥거림이 있었고 제사거부에 따른 집안 내외로부터 상당한 소외를 당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도 성경을 통한 세계관에 눈이 뜨였고 영적 안목이 넓어졌고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집안을 드나들었습니다.
그것이 조그만 것 같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얼마나 큰 영향으로 미쳤는지 모릅니다. 그 결과 다른 집안들은 아들들을 농사짓게 하고 땅을 사 들일 때 우리 집안은 땅을 팔아 자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이미 살아가는 삶의 개념이 다른 사람들과 틀렸습니다. 일찍이 기독교적 안목이 눈이 뜬 우리집안은 어렴풋이 미래에 대한 눈이 뜨이고 생각이 미래로 향하게 해서 모험을 감행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많은 분들이 그 방법이 참 옳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늦었지만 모든 가깝고 먼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집안뿐이 아니고 민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에게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민족이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120년 전 우리나라의 형편은 얼마나 암담했었습니까. 우리나라가 세상 물정 모르고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 정치할 때 일찍이 복음의 맛을 느낀 서구의 사람들은 세계를 주름잡고 돌아다녔습니다. 그 넓은 바다와 그 넓은 세상의 구속구석 어디든 돌아다니며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그때 일본만 해도 이미 명치유신이라는 혁명을 일으켜 선진화를 꾀했고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내 나라 밖을 모르고 볼 줄도 모르고 오직 울안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때 이 땅에 서양인들이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불과 12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받은 서양문물과 복음의 영향이 오늘 한국민족으로 하여금 눈을 뜨게 만들었고 세계를 알게 만들었고 개척정신을 갖게해서 그 결과 오늘 한국인들이 좀 늦긴 했지만 세계 모든 나라 안간 곳 없이 다 들어가 살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무역을 일으켜 오늘 무역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원동력이 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적극 도와주어서 그렇게 된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방해나 하고 뜯어먹기나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기업인들을 죄인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개척정신이 어디서 주어졌는가 하면 저는 이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비로소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눈을 뜨게 만들고 도전정신을 부여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복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고 꿈을 갖게하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의 소식을 들어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집단이나 사회나 국가는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게 하고 삶의 목적을 새롭게 열어주고 만들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실 것을 약속한 이 약속이 얼마나 큰 꿈이고 소망이고 비전이고 뜻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도 인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은혜이고 선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약속은 인류에게 주어진 비전 가운데 가장 큰 비전이고 꿈이고 소망이 이었습니다. 이 대강절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정숙한 마음으로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