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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쓴발해고 2
왕에 대한 고찰
고왕(高王: 재위 698~719)
고왕은 이름이 대조영(大祚榮)이고, 걸걸중상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가 되었는데, 날래고 용맹스러웠으며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걸걸중상이 [병으로]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당나라에 패해 죽자, 대조영이 당나라 군사를 피해 [영주에서 동쪽으로 갔다]. 이해고가 그를 뒤쫓아 천문령1)을 넘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그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니, 이해고는 간신히 몸만 탈출해 죽음을 면했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해 읍루족2)이 살았던 동모산3)을 거점으로 삼으니, 고구려와 말갈의 옛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했다.
마침내 돌궐4)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맺고, 부여 · 옥저 · 조선 · 변한 등 바다 북쪽의 십여 나라를 정복했다.5) 동쪽으로 바다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거란이 있으며, 남쪽으로 신라와 접했는데 이하6)로 경계를 삼았다. 땅이 사방 합 오천 리7), 가구가 십여 만 호, 정예병사가 수만 명이었다. 한문을 학습했고,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대체로 같았다.
원(698)년에8) 대조영이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또한 ‘진조(震朝)’라고 칭했으며, 스스로 즉위하여 진국왕9)이 되었다. 홀한성10)을 쌓아 살았으니, 영주에서 바로 동쪽으로 이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때에 해11)와 거란이 모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서 도로가 막히자,12) 측천무후가 발해를 공격할 수 없었다.
삼(700)년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다.13)
당나라 중종이 즉위하자(705) 시어사14) 장행급(張行岌)을 파견해 왕에게 화친을 청하니, 왕 또한 왕자15)를 당나라에 파견해 중종을 모시게 했다.16)
십오(713)년에17) 왕이 당나라 현종이 파견한 낭장18) 최흔19)을 통해 좌효위대장군20)·발해군왕21)에 책봉되니, 왕이 다스리는 지역은 홀한주22)가 되고, 왕은 홀한주도독23)을 겸직했다. 당나라는 비로소 말갈 호칭을 버리고 오직 발해라고만 불렀다.24)
이때 이후로 대대로 당나라에 조공하고, 유주절도부25)와도 서로 사신을 보내 방문했다. 부여부26)에 정예병을 주둔시켜 거란과 신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십일(719)년에27) 왕이 훙서했다. 삼월 병신일28)에 당나라에 부음을 전했다. [시호를 고왕이라 했다.]
주1) 천문령(天門嶺): 중국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길림성 합달령(哈達領)으로 추정된다.
주2) 읍루족[挹婁]: 3세기 무렵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말갈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발해말갈>에는 고구려 왕실의 소속집단인 ‘계루(桂婁)’로 되어 있다.
주3) 동모산(東牟山): 중국 길림성 돈화시(敦化市)에 있는 성산자산(聖散子山)으로 추정된다. 중국 고고학계는 2021년 도문시(圖們市) 마반촌산성(磨盤村山城)을 동모산으로 새롭게 비정하고 있어, 더 많은 연구가 요망된다.
주4) 돌궐(突厥): 6세기 중엽 알타이산맥 부근에서 일어나 약 2세기 동안 몽골고원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제국을 건설한 튀르키예계 유목민족이다. 당나라의 요청으로 이진충의 난을 진압한 후에는 거란을 지배했다.
주5) 이 구절에서 부여(扶餘)는 중국 길림성 농안(農安) 부근, 옥저(沃沮)는 함경도 일대, 조선(朝鮮)은 평안도 평양 일대에 있었던 우리나라 초기 국가들이다. 모두 나중에 고구려의 강역에 들어갔으므로,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 건국된 발해가 이 지역들을 정복한 것은 맞지만, 가야의 전신으로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변한(弁韓)까지 정복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이 부분은 <신당서> <발해전>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신당서> <백제전>의 “(백제가 망한 후) 그 지역은 이미 신라와 발해말갈에 분점되었다.”는 잘못된 서술에 의거한 것이다.
주6) 이하(泥河): 함경남도 영흥(永興) 부근의 용흥강(龍興江)으로 추정된다. 신라 때의 옛 이름이다.
주7) 이 수치는 발해의 전성기인 제10대 왕인 선왕 때의 수치로 보아야 한다. 발해 초기의 국토는 대략 사방 합 2천리였던 것으로 보인다(<유취국사(類聚國史)> 참조). 중국 당나라 때의 1리는 323, 혹은 약 444, 혹은 529, 혹은 531m이다.
주8) 원문은 ‘성력 연간에[聖曆中]’이다. ‘성력’은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의 10번째 연호로 698~700년 동안 사용되었다. 일본의 역사서인 <유취국사(類聚國史)>의 “나중에 천지진종풍조부천황(天之眞宗豊祖父天皇=文武天皇) 이(698)년에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는 기록에 따르면 성력 원년이다.
주9) 진국왕(震國王): <신당서> <발해전>의 ‘진(震)’은 측천무후가 걸걸중상을 책봉한 진국공(震國公)에서 유래하여 <신당서> 찬자가 의도적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구당서> <발해말갈전>뿐만 아니라 <책부원귀(冊府元龜)>나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등의 1차 사료에는 진국왕(振國王)으로 나온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진조(震朝)라 했다.
주10) 홀한성(忽汗城): 대조영이 698년에 처음으로 동모산에 도읍한 후 발해는 8세기 초반 현주(顯州)로 천도했고, 756년 무렵 다시 상경(上京)으로 천도했다. 785년 무렵 동경(東京)으로 천도했다가 794년 무렵 다시 상경으로 환도했다. 그 후 상경은 멸망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는데, <요사>에는 이를 홀한성으로 표기했다. 홀한주(忽汗州)의 도성이라는 의미이다.
주11) 해(奚): 노합하(老哈河)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종족으로 고막해(庫莫奚)라고도 한다. 나중에 거란에 동화되었다.
주12) 당나라에서 발해로 가는 중간 지대인 요서(遼西) 서부 지역에서 해와 거란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주13) 여기서 ‘3년’의 원문은 ‘효소왕(孝昭王: 신라의 제32대 왕. 재위 692~702) 구계(九季)’이다. 십오년 조 맨 끝부분에 있는 단락 원문을 연도에 따라 재배치했다. 한편 이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5품 관등인 대아찬(大阿飡)을 주었다.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진골만 받을 수 있는 관등인데 신라가 외부인에게 진골 대우를 한 것이 기록상 남아있는 건 금관가야 왕족 구형왕(仇衡王),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 둘뿐이었다. 이것을 준 건 발해가 신라보다 아래라는 정치적 제스처이긴 하지만, 어쨌든 신라가 신생국가 발해와 대조영을 새로운 한 나라 및 그 군주로 인정한 것이다.
주14) 시어사(侍御史): 당나라 어사대(御史臺)에 속한 종6품하의 관직으로, 관리들을 감찰·탄핵하고 반역, 살인 등 중대범죄의 심문을 담당했다.
주15) 왕자: 고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6) 개원(開元: 713~741) 초기에 귀국했다고 하므로, 이때의 왕자는 대문예로 추정된다.
주16) 당나라에 왕자를 보내 궁중에 머물게 하는 것은 인질을 보내 충성을 약속하는 성격을 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정세를 탐지하는 역할도 했다.
주17) 원문은 ‘현종 선천(先天) 2년’이다.
주18) 낭장(郎將): 16위 휘하의 좌우익중랑장부의 중랑장 아래의 좌우 낭장을 가리키며, 품계는 정5품상이다.
주19) 최흔(崔訢): 713년 2월에 출발한 그는 이듬해 5월18일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요령성 여순구(旅順口) 황금산(黃金山)에 우물을 파고 “칙명을 받고 지절을 갖고 황제를 대신해 말갈을 위로하는 사신인 홍려경(鴻臚卿) 최흔(崔忻)이 우물의 양쪽 입구에 영원하도록 기록하여 증거로 삼는다. 개원 2년 5월 18일”이라는 글을 새겼다. 이에 따르면 낭장이었던 최흔은 사신으로 파견될 때 홍려경에 임명되었다. 홍려경은 당나라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홍려시(鴻臚寺)의 장관으로, 품계는 종3품이다.
주20)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명목적으로 당나라의 중앙군인 16위(衛)의 하나인 좌효위의 대장군으로 임명된 것을 말한다. 품계는 종3품이다.
주21) 발해군왕(渤海郡王): 명목적으로 당나라 발해군에 왕으로 봉해진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 봉작(封爵)제도에서 군왕(종1품)은 국왕(國王: 정1품.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에게 주는 친왕(親王) 포함) 다음의 두 번째 등급이다.
주22) 홀한주(忽汗州): 홀한하(忽汗河: 지금의 목단강) 지역에 당나라가 명목상 설치한 기미주(羈縻州)이다.
주23)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홀한주의 명목상 최고행정관을 말한다. 도독은 대·중·하의 3등급이 있는데, 각각의 품계는 종2품·정3품·종3품이다. 홀한주도독의 경우 좌효위대장군과 품계가 같은 중도독일 가능성이 높다.
주24) 당나라는 대조영의 진국을 ‘말갈’, ‘동번말갈(東蕃靺鞨)’, ‘발해말갈’, ‘발해’ 등으로 부르다가 741년 이후에야 ‘발해’로 통칭했다.
주25)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이며, 절도부는 당 현종 대에 변경수비를 담당하는 절도사(節度使)가 설치된 관아이다. 발해와 유주절도부 사이에 사신이 왕래한 것은 고왕 대가 아니라 발해 후기의 일이다.
주26) 부여부(扶餘府): 지금의 길림성 농안 부근에 발해가 설치한 15부의 하나이다. 발해의 지방관청인 부가 설치된 것은 고왕 대가 아니라 8세기 중반 문왕 대이고, 9세기 선왕 대에 15부가 완성되었다.
주27) 원문은 ‘현종 개원 7년’이다.
주28) <구당서> 권8을 보면, 병진(丙辰)이 아니라 정유(丁酉)이다.
高王, 諱祚榮, 震國公子也。 嘗爲高句麗將, 驍勇善騎射。 及震國公卒, 乞四比羽敗死, 祚榮遁。 李楷固窮躡度天門嶺, 祚榮引高句麗、靺鞨兵, 大破之。 楷固僅以身免。祚榮卽幷比羽之衆, 據挹婁之東牟山, 靺鞨及高句麗舊人悉歸之。
遂遣使, 交突厥, 略有扶餘、沃沮、朝鮮、弁韓一海北十餘國。 東窮海, 西契丹, 南接新羅, 以泥河爲界。 地方五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 學習書契, 俗與高句麗、契丹, 略同。
聖歷中(698), 國號震。 (<新唐書>作振, <文獻備考>曰: 震朝。) 自立, 爲震國王, 築忽汗城以居, 直營州東二千里。 時, 奚、契丹皆叛唐, 道路阻絶, 武后不能致討焉。
(孝昭王九季(700), 遣使聘新羅。)
中宗1)卽位(705), 遣侍御史張行岌, 慰撫之。 王亦遣子, 入侍。
玄宗2)先天二年(713), 遣郎將崔訢, 冊王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 以所統爲忽汗州, 領忽汗州都督。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自是以後, 世朝獻唐, 餘幽州節度府, 相聘問。 屯勁兵於扶餘府, 以備契丹、新羅。
孝昭王九季(700), 遣使聘新羅。
玄宗開元七年(719), 王薨。三月丙辰赴唐。
주1) 中宗(656~710): 당나라의 4대 황제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683년에 즉위했다가 이듬해에 폐위되었다. 측천무후 말년인 705년에 복위했으나 710년에 황후 위씨(위씨)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독살당했다. 재위기간은 683~684년, 705~710년이다.
주2): 玄宗(685~762): 당나라의 6대 황제이다. 재위 전반에는 ‘개원지치(開元之治)’라고 불리는 당나라 전성시대를 이루었으나, 742년에 천보(天寶)로 개원한 이후로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하고 정치에 싫증을 내 756년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초래했다. 재위기간은 712~756년이다.
* 동모산
https://srkim4u.tistory.com/m/1696
https://namu.wiki/w/%EB%8F%99%EB%AA%A8%EC%82%B0
* 중국 고고학계가 발표한 새 동모산 추정지
https://www.yna.co.kr/view/AKR20210416135600097
* 고구려 계루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