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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신돈 소(論辛旽疏)
이존오(李存吾)
신 등이 삼가 보오니, 3월 18일 궁전 안에서 문수(文殊會)가 열렸을 때에, 영 도첨의(領都僉議) 신돈(辛旽)이 재상의 반열에 앉아 있지 않고 감히 전하와 더불어 나란히 앉아 그 거리가 몇 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놀라 뛰어 흉흉하지 않는 이가 없사오니, 대체 예란 상하의 계급을 구별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온데, 진실로 예법이 없다면 무엇으로 군신이 되며, 무엇으로 부자가 되며, 무엇으로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성인이 예법을 마련하였음은 상하의 명분을 엄격하게 하여 그 꾀가 깊고 그 생각이 먼 것이었습니다.
적이 보옵건대 신돈은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으니, 애당초에 영 도첨의로서 감찰(監察)을 맡았을 제, 명령이 내리던 날에 예법으로서는 의당히 조복을 차리고 나아가 은혜를 사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월이 되어도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궐정에 들어와서는 그 무릎을 조금도 굽이지 않은 채 늘 말을 타고 홍문(紅門)을 출입하여 전하와 함께 호상(胡床)을 웅거하였고, 그 집에 있을 때는 재상들은 그 뜨락 밑에서 절을 하였으나 모두 앉아서 접대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의 소위로도 역시 이러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앞서는 중인 만큼 의당히 도외(度外)에 두어서 그 무례함을 책망할 것은 없었지마는, 이젠 재상이 되어 명분과 지위가 이미 정해졌으니, 감히 예법을 잃고 윤리를 허물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그 원유를 따진다면 반드시 사부(師傅)라는 이름을 의탁하겠지마는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의 스승이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의 스승이었으나, 신 등은 그 두 사람이 감히 이런 일을 하였다는 말을 못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의 외조부였으므로 인왕께서 겸양하여 조손의 예로써 서로 만나려 하였으나 공론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군신의 명분이란 본디부터 정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법이란 군신이 생긴 이래로 만고를 지나도 바꾸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신돈과 전하께서 사사로이 고칠 바는 아니라 생각되옵니다. 신돈이 어떠한 사람이건대, 감히 스스로 높이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오직 임금이라야 복을 짓고, 오직 임금이라야 위엄을 지으며, 오직 임금이라야 옥식(玉食)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신하로서 복을 짓거나, 위엄을 짓거나, 옥식을 하는 자 있다면 반드시 그 집을 해치고 나라를 해쳐서 백성은 참람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로서 임금의 권력을 참람하여 쓴다면 모든 관원이 그 분수에 편안하지 않을 뿐아니라, 세민들 역시 이에 따라 분수에 넘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돈은 능히 복을 지으며 위세를 짓고 또 전하와 더불어 한 자리에 앉았으니, 이는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참람함이 극도에 달하여 교만이 습관으로 되었으므로, 백관들이 그 분수를 지키지 않고 세민이 분수에 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아 간웅(奸雄)이 망칙한 마음을 품는다면 예법은 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습관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만일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을 공경하여서 만 백성에게 재해가 사라진다면 그의 머리를 깎고 그의 옷을 물들이고 그의 벼슬을 삭탈하여 사원(寺院)에다 두고서 공경할 것이요, 반드시 이 사람을 써야만 국가가 평안하겠다면 그 권력을 제재하여 상하의 예법을 엄하게 한 뒤에 부리게 되어야만 백성의 마음이 정해질 것이요, 나라의 어려움도 펴질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신돈을 어진 이라 한다면 신돈이 일을 맡은 이래로 음양이 절후를 잃어서 겨울철에 우뢰가 일고 누른 안개가 사방을 메이는 듯 하여, 열흘이 넘도록 해가 검고 밤중에 붉은 기운이 돌고 천구성(天狗星)이 땅에 떨어졌으며, 나무의 고드름이 지나치게 심하고, 청명(淸明)이 지난 뒤에도 우박과 찬바람이 일어 하늘의 기후가 여러 차례 변하고, 산새와 들짐승이 백주에 성중으로 날아들어 달리니, 신돈에게 내린 논도섭리공신(論道燮理功臣)의 호가 과연 천지와 조종의 뜻에 합하는 것입니까.
신 등은 직책이 사간원(司諫院)에 있으므로, 전하를 돕는 이로 그 자격이 못되어 장차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며, 만세에 기롱의 대상이 될까 보아서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책망을 면하려 하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는지라, 대답하심이 있기를 삼가 기다리겠습니다.
論辛旽䟽[李存吾]
臣等伏値三月十八日於殿內設文殊會。領都僉議辛旽。不坐宰相之列。敢與殿下並坐。間不數尺。國人驚駭。罔不洶洶。夫禮所以辨上下定民志。苟無禮焉。何以爲君臣。何以爲父子。何以爲國家乎。聖人制禮。嚴上下之分。謀深而慮遠也。竊見旽。過蒙上恩。專國政而有無君之心。當初領都僉議判監察命下之日。法當朝服進謝。而半月不出。及進闕庭。膝不少屈。常騎馬出入紅門。與殿下並據胡床。在其家。宰相拜庭下。皆坐待之。雖崔沆,金仁俊,林衍之所爲。亦未有如此者也。昔爲沙門。當置之度外。不必責其無禮。今爲宰相。名位已定。而敢失禮毁常若此。原究其由。必托以師傅之名。然兪升旦高王之師。鄭可臣德陵之傅。臣等未聞彼二人者。敢若此也。李資謙仁王之外祖。仁王謙讓。欲以祖孫之禮相見。畏公論而不敢。盖君臣之分。素定故也。是禮也。自有君臣以來。亘萬古而不易。非旽與殿下之所得私也。旽是何人。敢自尊若此乎。洪範曰惟辟作福。惟辟作威。惟辟玉食。臣而有作福作威玉食。必害于家㐫于國。人用側頗僻。民用僭忒。是謂臣而僭上之權。則有位者皆不安其分。小民化之。亦踰越其常也。旽作福作威。又與殿下抗禮。是國有兩君也。陵僭之至。驕慢成習。則有位者不安其分。小民踰越其常。可不畏哉。宋司馬光曰紀綱不立。奸雄生心。然則禮不可不嚴。習不可不愼。若殿下必敬此人而民無災害。則髡其頭緇其服削其官。置之寺院而敬之。必用此人而國家平康。則裁抑其權。嚴上下之禮。以使之民志定矣。國難紓矣。且殿下以旽爲賢。自旽用事以來。陰陽失時。冬月而雷。黃霧四塞。彌旬日黑。子夜赤祲。天狗墜地。木冰太甚。淸明之後。雨雹寒風。乾文屢變。山禽野獸。白日飛走於城中。旽之論道燮理功臣之號。果合於天地祖宗之意乎。臣等職在諫院。惜殿下相非其人。將取笑於四方。見譏於萬世。故不得嘿嘿。庶免不言之責。旣以言矣。敬聽所裁。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
정몽주(鄭夢周)
전날 선왕[禑王]께서 남녘지방을 순찰하시다가 尙州에 머무신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 때에 부름을 받고 들어가 翰林[藝文館, 春秋館 檢閱]이 되었다. 그 무렵 처음으로 旅舍에서 朴? 공과 인사하고 알게되어 서로 사귀며 즐겁게 지냈다. 그때부터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왕을 모시기 10여년에 진실로 박공의 재주에 깊이 탄복한 바 있었다. 이제 今上[昌王]이 즉위하시고 또 한 해가 지나서 내가 죄를 짓고 남녘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해 겨울에 倭寇가 金海에 침입해오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해는 왜구의 要衝地입니다. 이제 또 침입해 와서 이렇듯 피해가 심하니 훗날에 비록 슬기로운 분이 나온다하여도 아마 다스리기가 지극히 힘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朴? 공께서 수령으로 나가셨다는 소식이 들리기에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박공을 잘 알거니와 그가 반드시 그의 임무를 잘 처리할 것이다.”한 적이 있었다. 과연 박공은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낮이나 밤이나 온 정신과 마음을 다 바쳐 계획을 세우고 은혜를 베풀어, 얼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고 따뜻하게 하며, 앓고 신음하는 사람들은 즐기고 노래부르게 하며, 타버려 없어진 것은 번듯하게 새로 짓고, 깨지고 부서진 것은 든든하게 고쳐 놓으니 몇 달되지 않는 기간에 백 가지 폐해가 깨끗이 없어졌다.
그렇건만 박공은 오히려 겸연쩍어 하며 근심 어린 빛으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어찌 잘 다스린 것이라 하겠습니까? 얼마 전에 침입을 당했을 때에 지아비는 지어미를 잃은 것을 哭하고 자식은 어버이 잃은 것을 슬퍼하여 그 울음소리가 계속되었었습니다. 이제 정신을 차려 계획을 세우고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또다시 당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저는 가슴 아파할 뿐입니다.” 이렇게 근심하면서 곧 고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를 “왜구의 기세가 날로 극성스러워 바다 밖으로 백리나 떨어져 있으나 오히려 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김해는 바다를 안고 있는 고을이어서 바닷물이 우리 지역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것은 곧 죽을 곳입니다. 진정으로 要塞를 구축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도는 없는 줄 압니다.” 이렇게 말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옛날의 山城을 수리하여 크게 넓히고, 돌을 쌓아 단단하게 만들며 산세를 따라 높혔다. 일을 마치고 아래에서 바라보니 성벽은 천길이나 높이 세워져서 비록 한 명의 장정이 문을 지킨다하여도 만 명의 군사가 능히 열지 못할 만 하였다.
(이때에) 이 고을 사람, 통헌대부 裵元龍 공이 급하게 나에게 서신을 보내와 청하기를 “산성을 고쳐 건설한 것은 만세에 이로운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朴? 공을 잘 아는 이로는 그대 만한 사람이 없는 줄 압니다. 감히 [山城記 한 폭 써 주실 것을] 청하나이다.”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要塞를 쌓아 나라를 지키는 길, 이것은 예부터 제왕이 된 분이라면 누구나 다스림의 방법으로 삼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바, ‘天時가 地利보다 못하고, 地利가 人和보다 못하다’고 한 것은 대체로 일의 가볍고 무거움과 작고 큼을 말하고자 한 것이지 하나를 취하고 둘을 버리라고 한 것이겠는가! 오호라 祖宗이래 선왕의 제도가 참으로 철저하구나.“(중략)
장차 김해의 백성들은 평소에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산에서 내려와 농사짓고 바다에 나아가 고기잡이하며 봉화불을 보게되었을 때에는 처자와 노복을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면 베개를 높이고 편히 누워 잘 수 있으리라. 누가 요새를 건설하여 스스로 굳세고자 하는 것을 拙策이라 일컬으랴. 나는 장차 옛가야의 터를 찾아가 새 성벽 위에서 술을 들며 박위 공의 고을 다스림이 성공하였음을 축하하리라.
昔先王南廵。次于尙。余時召入爲翰林。始識朴侯葳於旅舍。相從而悅之。自是比肩事先王十有餘年。固已服其才焉。及今上卽位之明年。余以罪謫居南方。其冬。倭陷金海。人皆言曰。金海倭衝也。今已陷且殘之。後雖有智者。殆難以爲治。俄而聞朴侯出爲守。顧謂人曰。余知朴侯。其必有以處此矣。侯始至。乃能日夜疲精竭思。設計推恩。凍餒者使之飽暖。呻吟者使之謳歌。煨燼者使之奐輪。缺毀者使之牢緻。旬月之間。百廢擧矣。侯猶慊然憂形於色曰。是奚足爲政。近日之陷。夫而哭妻。子而哭父母者。聲相續也。失今不圖。後當復然。此余之痛心也。乃告於衆曰。倭勢日熾。去海百里。尙受其害。况此海曲之邑。水環其境者直死地也。苟非施險。無以爲也。於是出令。修古山城。擴而大之。累石爲固。因山爲高。功旣訖。自下望之。壁立千仞。雖使一夫當門。萬夫莫能開也。府人通憲大夫裴公元龍走書來請曰。山城之修。萬世利也。知吾侯者莫如子。敢以爲請。余惟設險守國之道。自古帝王。未有不資是以爲治者。孟子所謂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盖言輕重小大之差耳。非爲取其一而廢其二也。嗚呼。祖宗之法亦密矣。余嘗佐幕朔方。按行東北。塞上有古山城橫截山川。首尾千里。其間要害之地。邏戍營屯之所。動至千百。當時經營禦倭之跡。盖可見也。往與契丹,金,元接境爲敵。抗衡幾年。能不失舊物以至于今者。豈偶然而致之哉。今國家用兵二十餘年。城砦池隍。所在頹廢。無異大平無虞之世。夫今之謀臣智將。筭無遺策。豈獨不知城池所以待盜賊也。顧棄而不爲。其志將以長槍勁弩。與敵從事於平原廣野。芟夷之盡滅之。以快於心。以彼設險守國爲拙策也。倭冦之爲冦小矣。國家之財力殫竭矣。於是每兵出而每北。向之長槍勁弩快心之策。反爲敵所笑。嗚呼惜也。以契丹,金,元之敵而不畏。何其壯也。今何爲而反困於是耶。朴侯之擧。盖憤於此也。將使金海之民。平居無事。則下山而田。入海而漁。及見烽燧。收妻孥而入城。則可以高枕而臥矣。孰謂設險自固爲拙策也。余將訪古伽倻之墟。當擧酒於新城之上。以賀朴侯政績之有成也。
송 박중서 귀근 서(送朴中書歸覲序)
이색(李穡)
친구가 세력 때문에 합하여 서로 아는 것은 한갓 외면일 따름이고 마음으로써 합하는 것이 바로 의교(義交)다. 그런 연후에야 서로 아는 것이 비로소 지극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박중서(朴中書)와 더불어 아는 것이 지극하다 할 것인가, 혹시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 할 것인가 모르겠다. 중서군이 조정에서 배척을 당하자 돌아가서 대부인을 뵈려 하면서 나로 하여금 그 떠나감에 대하여 서술을 하게 하므로, 나는 다른 말을 방증할 것 없고 그저 군을 아는 것만으로써 질정한다.
중서군이 젊어서부터 조정에 나와서 빛나는 직과 임금과 친근할 수 있는 직을 역임하여 남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물러나오면 아침저녁으로 양친께 문안하고 형제끼리 우애하고 공순함이 성대하여 볼 만하였으나 항상 부족한 바가 있는 듯이 하였다. 대개 조정에서는 자기 직무에 극진할 것을 생각하여 당연히 할 일이면 하지 않음이 없으며,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숙직하여 게으르지 않고 더욱 정성을 다할 따름이니, 써주건 버리건 승진되건 쫓겨나건 무엇이 나에게 간여되어서 족히 영화롭고 욕됨을 삼겠는가 하는 것이 중서의 마음이요, 집에서는 정성껏 엄친(嚴親)을 섬기어 사랑과 공경을 함께 지극히 해야 하나 자당이 멀리 고향에 있음을 생각할 때 어찌 부모가 한 집에 동거하여 우리 형제가 서로 그 아래서 어린양하는 것만 같으냐 하는 것이 중서의 마음이다.
이러므로 지금 배척을 당하게 되어서도 화평하여 평시와 같이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친구들에게 알리고 부형에게 상의한 것이 오직 돌아가서 자친을 뵙는 한 가지 일 뿐이었다. 이는 중서의 이 길이 소장부가 떠나려면 하루의 일력(日力)을 다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요, 평소에 모친의 생각이 간절하였기로 그 돌아가서 뵈올 기회를 얻었음을 기뻐한 것임을 알겠다. 또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나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그 도는 동일하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도를 다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되 그 도를 다한다면, 이는 충효에 다 같이 이름을 세운 것이다. 정자(程子)가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으로써 충(忠)의 뜻을 해석한 연후에 사람이 비로소 효도도 또한 충인 줄을 알았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신하가 되어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은 조정에서의 효(孝)요, 자식이 되어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은 집에서의 충이며, 벼슬하게 되면 기뻐하고 그만두게 되면 성내는 것은 반드시 능히 임금에게 할 바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요, 가까우면 친압하고 멀면 잊어버리는 것은 반드시 능히 어버이에게 할 바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효는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다르지 않고, 충은 벼슬하건 안 하건 간에 변동될 수 없는 것이니, 자기 할 일을 다한 자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있으랴.
내가 중서를 아는 것이 지극한가 그렇지 않은가. 중서여, 돌아가서 나를 아는 것으로 나에게 답해 주기 바란다. 다른 날에 중서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나를 아는 것이 의심할 바 없다. 청컨대, 그로써 서를 한다.
送朴中書歸覲序
朋友以勢合相知者。徒面而已。以心合。是義交也。然後相知始爲至矣。予於朴中書。知之至邪。抑猶未也。中書君旣斥於朝。歸覲大夫人。俾予叙其行。予不暇旁引他說。姑以知君者質之。中書君束髮立朝。游歷華近。人榮之而不自榮。退而朝夕溫凊。兄弟友恭。藹乎可觀。而常若有所慊然者。蓋於朝則思盡己之職。當爲無不爲。朝衙夕直。不懈益虔而已。用舍升黜。何與於我。而足以爲榮辱乎。此中書之心也。於家則祗事嚴顔。愛敬俱至。然念慈堂遠在鄕里。豈若父母同處一堂之上。而吾兄弟者。相與兒戲於其下乎。此中書之心也。是以今之見斥也。怡然如平時。不見其有慍色。告諸朋友。謀之父兄。唯歸覲一事而已。是知中書之行也。非小丈夫去則窮日之比之也。平昔思母之切。而喜其得歸覲之隙也。且夫事親事君。其道則同。子之於父母。事之能盡其道。臣之於君。事之能盡其道。是忠孝之立名也。程子以盡己訓忠。然後人始知孝者亦忠焉而已爾。然則爲臣而盡己。在朝之孝也。爲子而盡己。在家之忠也。仕而喜。已而慍。則必不能盡己於君。近而狎。遠而忘。則必不能盡己於親。孝不以遠近異。忠不以仕已易。非盡己者能之乎。予之知中書也。至乎否也。中書歸其以知我者。復我也。他日中書不予棄。則知己我也無疑。請以爲序。
판삼사사 최공 화상 찬 병서(判三司事崔公畵像贊 幷序 )
이색(李穡)
홍무(洪武) 12년 여름 4월 을축(乙丑)일에 중관(中官)이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를 “판삼사사(判三司事)인 최영(崔瑩)은 나의 아버지를 섬기는데 힘을 다하고 정의를 떨쳤으며, 우리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오늘날에까지 잘지내게 하였으니 나는 그를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이제 그의 부하가 홍산(鴻山)에서 적진을 파하던 상황을 묘사하여 장차 영원한 세대에 전하려 하니 너 색(穡)은 여기에 찬(贊)을 지으라.” 하셨다. 신 색은 생각하옵건대 국가에서 문무(文武)의 신료를 쓰실 적에 어떤 사람은 중앙에서 임금의 심복이 되어 나라의 원기를 기르게 하며 어떤 사람은 지방에서 임금의 발톱과 어금니 노릇을 하여 무력으로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시국의 안정과 위험을 따라서 이에 대하여 마음을 주시합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오면 대신이 되어, 조정에서는 그를 믿고 대견히 생각하며 변경은 그를 힘입어 편히 살 수 있으며 간사한 무리들은 위엄을 두려워하여 기가 꺾이어 숨어버리고, 도둑들은 소문만 듣고도 물러가게 하는 사람을 오늘에사 찾는다면 판삼사(判三司)는 가장 그 중에도 걸출한 사람입니다. 판삼사는 곧 상서령(尙書令)입니다. 경인(庚寅)년 이후로 적을 해변에서 막아냈고 하남(河南)에서 적을 토벌하였고 흥왕사(興王寺)에서 난을 평정하여 크고 적은 전투가 87회인데 반항하는 자를 치며 허한 곳을 찌르고 어려운 고비를 당할 적마다 기묘한 전술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60을 넘었는데도 기운이 더 줄어들지 아니하였으니 하늘이 준 용맹과 지혜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되겠습니까. 삼사(三司)의 선대에서는 문장으로 우리 나라를 도와서 재상에 오르기도 하였고 과거에 고시관을 맡기기도 하여 하나 하나 지적할 수가 있었는데 삼사공은 다만 전술을 가지고 곤란하고 사변이 많았던 시기를 만나서 굉장하며 비상한 공적을 세웠으며 종종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기도하여 기운이 일세를 덮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에게 “황금을 흙덩이처럼 생각하라.”는 교훈을 받고 이를 마음에 명심하였기 때문에 그의 청백한 지조는 늙을수록 더욱 굳어졌사오니 삼사공의 문무(文武)와 충효(忠孝)는 이것을 모두 겸비하였다 할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성상 전하(聖上殿下)께서 선왕의 뜻을 따르시와 덕을 높이며 공을 보답하시고 정명(精明)하심을 진작하시고 굳건한 기운으로 이 어려운 판국을 건져내어 태평을 맞이하였사오니 마땅히 삼사공이 첫째로 영광스러운 은총을 이와 같이 극진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아, 훌륭하시도다. 신 색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춤추며 발로 뛰며 길게 노래하옵나이다. 그 글월에 이르기를,
빛나는 위엄과 명성이여, 오직 굳세며 오직 밝도다. 바다 밖의 도둑들도 두려워서 떨고 있으니 나라의 방패며 성벽이로다. 지방의 토호들이 물러나서 숨을 죽이니 백성의 법관이로다. 개부(開府)의 봉작(封爵)을 받았으니 벼슬로 그를 후하게 대우함이다. 생각컨대 공의 마음씨는 곧 그의 아버지의 마음이로다. 어름처럼 맑으며 소태처럼 쓰도다. 홍산(鴻山) 높은 곳에 북을 울리며 진두에 나섰을 적, 영걸한 그 풍채 찬바람이 휙휙 나니 기운은 세상에 떨쳐 있노라. 그림으로 비슷하게 나타냈으니 모두들 우러러 쳐다 보리라. 옛말에 이르기를, “덕(德)이란 미묘하여 지적할 수 없다” 했는데 이를 지적하자면 다만 공이 해당되리니 아아, 공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오래도록 건강하시어 우리 임금 곁에 계시옵소서.
判三司事崔公畫像贊 幷序
洪武十二年夏四月乙丑。中官傳旨若曰。判三司事崔瑩。事我先考。竭力奮義。扞我外侮。克至于今日休。予甚嘉之。今其麾下圖鴻山破陣之狀。將垂示無窮。汝穡其贊之。臣穡竊惟國家之用文武臣也。腹心以養元氣。爪牙以禦外侮。而天下之人。隨時安危而注意焉。至於出將入相。朝廷倚之爲重。邊鄙賴之以寧。奸猾畏威而摧伏。寇盜聞風而退縮。求之今日。判三司尤其傑然者也。判三司事。卽尙書令。自庚寅年以來。禦寇海隅。敵愾河南。定難興王。驅僧北鄙。大小戰八十七次。批元편001擣虛。遇險出奇。而年過六十。氣益不衰。非天錫勇智。何以至此。三司之先世。以文章佐我王國。位宰相司貢擧。歷歷可數。而三司公。獨用兵略。當艱難多故之日。立雄偉不常之功。往往橫槊賦詩。氣盖一世。又以先考視黃金如土塊之訓。銘之于心。故其淸白之操。老而益堅。三司公文武忠孝。可謂兼之矣。洪惟聖上殿下。遹追先志。崇德報功。激礪精明剛毅之氣。以濟否運。以迓大平。宜三司公之首膺光寵。如此其至也。猗歟休哉。臣穡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長言之。其詞曰。有烈威聲。惟剛惟明。海盜震怖。國之干城。土豪屛縮。民之司平。受封開府。惟仕之膴。惟公之心。心于乃父。惟冰之淸。惟蘖之苦。峩峩鴻山。鼓勇陣間。英姿颯爽。氣振區寰。圖形惟肖。以聳瞻觀。惟古有語。德輶鮮擧。擧之惟公。非公誰與。庶幾康強。在我王所。
운금루 기(雲錦樓記)
이제현(李齊賢)
구경할 만한 산천의 뛰어난 경치가 반드시 모두 외지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임금의 도읍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도 원래는 산천 풍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명예를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을 저자에서 다투다 보니, 비록 형산(衡山)ㆍ여산(廬山)ㆍ동정호(洞庭湖)ㆍ소상강(蕭湘江)이 한 발 내디디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어도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슴을 쫓아가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켜 잡으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하며 가느다란 가을 털끝을 볼 줄 알면서도 수레에 가득 실은 섶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으면 눈이 다른데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자력이 있는 이들은 멀리 관문(關門)과 나루를 지나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산골짜기에 노니는 데 만족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사강락(謝康樂)이 길을 여는 일을 서민들이 놀라고, 허범(許氾)이 시골을 찾는 일을 호걸의 선비가 숨긴다고 하며, 또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고상하다고도 한다.
경성 남쪽에 못이 있어서 사방이 백 묘쯤 되는데, 빙 둘러 사는 사람들의 여염 민가가 고기 비늘처럼 즐비하게 깔렸으며, 지고 이고 말타고 걸으며 그 곁을 지나 왕래하는 자들이 줄을 이어 앞서고 뒤서고 하니, 어찌 그윽하고 기이하고 한가로우며 넓은 지경이 그 사이에 있는 줄을 알겠는가. 지원(至元) 정축년(충숙왕 6년) 여름에 못 위에 연꽃이 한창 피었는데, 현복군(玄福君) 권후(權侯)가 보고서 사랑하여 곧장 못 동쪽에 땅을 사서 다락을 지었다. 두 길이나 되게 높이 하고 세 길이나 되게 넓게 만들었는데, 주춧돌을 세우지 않았지만 기둥은 썩지 않게 하고, 기와를 이지 않았만 초가지붕은 새지 않게 하였으며, 통나무를 깎지 않았는데 굵지도 않고 가늘지도 않으며 벽은 색칠하지 않았는데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건물이 대략 이와 같은데 못의 연꽃이 가득 둘러싸 있었다. 이에 그 아버지 길창공(吉昌公)과 형제와 인척들을 초청하여 그 위에서 술자리를 벌여 즐겁고 유쾌하게 놀면서 날이 저물도록 돌아갈 것을 잊었는데, 아들이 큰 글씨를 잘 쓰는 이가 있으므로 ‘운금(雲錦)’ 두 글자를 쓰게 해서 걸어 다락의 이름으로 하였다.
내가 어떤가 하고 가보니 붉은 꽃 향기와 푸른 잎 그림자가 넓은 못에 가득히 있는데, 흩어지는 바람과 이슬이 연파(煙波)에 오가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하였다. 뿐만 아니라 용산(龍山)의 여러 산봉우리가 청ㆍ녹색을 휘날려 처마 밑으로 모여드니 어둡고 밝은 아침저녁마다 제각기 모습이 다른데, 저쪽 여염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민가는 그 형세의 곡절을 앉아서도 세어 볼 수 있으며, 지고 이고 말타고 걸어 왕래하는 자와 달리는 자, 쉬는 자, 돌아보는 자, 부르는 자와 친구를 만나 서서 말하는 자와 존장을 만나 달려가 절하는 자들도 모두 그 모습을 감추지 못하니 바라보며 즐길 만한데, 저들에게 있어서는 못이 있는 것만 보이고 다락이 있음은 알지 못하니, 또 어찌 그 다락에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으랴. 참으로 찾아가 구경할 좋은 경치는 반드시 외지고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정과 저자의 사람들이 언제나 보아도 알지 못하는 곳에도 있는 것이니, 아마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쉽게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인가 싶다.
후(侯)가 만호(萬戶)의 병부를 차고 외척(外戚)의 권세를 차지하였는데 나이가 옛사람의 강사(强仕)할 때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부귀와 이록(利祿)에 취하고 빠질 것이지만, 어진 이와 지혜 있는 이가 좋아하는 산과 물을 즐기며 백성을 놀래키지도 않고, 선비에게 꺼림을 받지도 않으면서 그윽하고 기이하고 한가로우며 넓은 지경을 저자와 조정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곳에 차지하고, 그 어버이를 즐겁게 하여 손님에게까지 미치게 하며 그 몸을 즐겁게 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이야말로 가상한 일이다. 익재거사(益齋居士) 아무개는 기문을 쓴다.
[주]강사(强仕) : 40세를 말하는 것으로 《예기》 〈곡례(曲禮)〉에 40세는 강건하여 벼슬하는 나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람이 40세에 이르면 지려(智慮)와 기력이 모두 강하여 진다고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라 한다.
雲錦樓記
山川登臨之勝。不必皆在僻遠之方。王者之所都。萬衆之所會。固末甞無山川也。爭名者於朝。爭利者於巿。雖使衡廬湖湘。列于跬步俯仰之內。將邂逅而莫之知有也。何者。逐鹿而不見山。攫金而不見人。察秋毫而不見輿薪。心有所專而目不暇他及也。其好事而有力者。踰關津卜田里。規規於丘壑之遊。自以爲高。康樂之開道。小民之所驚。許氾之問舍。豪士之所諱。又不若不爲之爲高也。京城之南。有池可方百畝。環而居者。閭閻烟火之舍。鱗錯而櫛比。負戴騎步。道其傍而往來者。絡繹而后先。豈知有幽奇閑廣之境。迺在其間耶。后至元丁丑夏。荷花盛開。玄福君權侯見而愛之。直池之東。購地起樓。倍尋以爲崇。參丈以爲袤。不礎而楹取不朽。不瓦而茨取不漏。桶不斲不豊而不撓。堊不雘不華而不陋。大約如是。而一池之荷。盡包而有之。於是。請其大人吉昌公與兄弟姻婭。觴于其上。怡怡愉愉。竟日忘歸。子有能大書者。使之書雲錦二字。揭爲樓名。余試往觀之。紅香綠影。浩無畔岸。狼藉風露。搖曵烟波。可謂名不虛得者矣。不寧惟是。龍山諸峯。攢靑抹綠。輻湊簷下。晦明旦夕。每各異狀。而嚮之閭閻。烟火之舍。其面勢曲折。可坐而數。負戴騎步之往來者,馳者,休者,顧者,招者,遇朋儔而立語者,値尊長而趨拜者。亦皆莫能遁形。而望之可樂也。在彼則徒見有池。不知有樓。又安知樓之有人。信乎登臨之勝。不必在僻遠。而朝巿之心目邂逅而莫之知有也。抑亦天作地藏。不輕示於人耶。侯腰萬戶之符。席外戚之勢。齒不及古人強仕之年。宜於富貴利祿。寢酣而夢醉。乃能樂乎仁知之所樂。不見驚于民。不見諱于士。而奄有幽奇閑曠之境。於巿朝心目之所不及。樂其親以及於賓。樂其身以及於人。是可尙也已。益齋居士某。記。
남곡 기(南谷記)
이색(李穡)
용구산(龍駒山) 동쪽에 남곡이 있으니, 나와 동갑인 이선생이 살고 있다. 어떤 이가 묻기를, “선생은 숨었는가.”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숨은 것이 아니다.”하니, 또, “벼슬을 하는가.”하기에 대답하기를, “벼슬을 아니 한다.”하니 그가 매우 의심스러워하며 또 묻기를, “벼슬도 하지 않고 숨지도 않았으면 무엇 하고 있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숨는 사람은 그 몸만 숨을 뿐 아니라 또 반드시 이름을 숨기며, 이름만 숨길 뿐 아니라 또 반드시 마음까지 숨기는 것이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남이 알까 두려워하여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벼슬하는 것은 이와 반대로 몸이 반드시 조정 위에 서서 좋은 관복과 큰 띠로 화려하게 갖추어 이름이 실지로 그 마음에 있는 바가 정사에 나타나고, 시가(詩歌)에 올라 사방에 빛날 것이니 마음을 어찌 숨기리오. 나는 이로써 남곡(南谷)은 숨을 땅이 아님을 알겠다. 지금 선생이 남곡에 살지만 밭이 있고 집이 있어, 관혼빈제(冠婚賓祭)의 쓰임에는 족하나, 세리(勢利)에 마음이 없음은 오래였었다. 그러나, 숨은 것으로 자처하지 않은 까닭으로 해마다 서울에 가서 웃고 말하며, 길 가운데 오락가락하면서 약한 종[奴]과 여윈 말에 채찍을 들어 시를 읊는데, 흰 수염은 눈과 같고 붉은 볼에는 광채가 나니, 그림 잘 그리는 이로 하여금 그 풍채를 그려서 전하면 〈삼봉연엽도(三峰蓮葉圖)〉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남곡은 산에서는 나물 캘 만하고 물에서는 고기 낚을 만하니, 족히 세상에 구함이 없어도 스스로 족할 것이다. 산은 맑고 물은 푸르며 경치가 그윽하고 사람은 고요한데 눈을 들어 유연(悠然)히 바라보니, 비록 정신이 세상 밖에 논다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선생은 의당 여기에 스스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나는 늙고 병든 지 오래인지라 매양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밭이 있는 곳에는 바다가 가깝고 집이 있는 곳에는 땅이 박해서 살기에 적당하지 못하였다. 밭과 집이 다 온전한 곳을 얻어 내 몸을 마치는 것이 나의 소망이나, 어찌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오. 선생이 정언(正言)이 되었을 적에 나는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는데, 같이 언사(言事)로써 재상의 뜻에 거슬리어 제공(諸公)은 다 외직에 옮기고 나만은 특이하게 뽑힘을 얻었으니, 지금까지 부끄럽게 여긴다. 선생은 여러 번 물러나고 여러 번 일어섰으나 위(位)는 겨우 삼품(三品)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끼친 사랑은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고, 빛나는 이름은 물망(物望)에 합하니, 여러 이씨(李氏)에서도 그 짝을 구하기 어렵다. 이는 반드시 명추(鳴騶)가 남곡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날에 큰 계책을 세우고 큰 의논을 결단하여 위로는 임금의 덕화를 도와서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에서 일어남과 같기를 기필할 것인지 기필하지 못할 것인지 이는 다 천명이다.” 선생의 이름은 석지(釋之)며 가정공(稼亭公)의 문생(門生)으로 급제하였고, 일찍이 나와 함께 신사년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정사년 섣달 8일에 기한다.
[주]명추(鳴騶) : 귀인의 행차를 수행하면서 벽제하는 기마병. 인하여,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쓰임.
南谷記
龍駒之東。有南谷。吾同年李先生居之。或問先生隱乎。予曰非隱也。曰仕乎。曰非仕也。或者疑之甚。又問非仕非隱則何居。予曰吾聞隱者。不獨隱其身。又必名之隱。不獨隱其名。又必心之隱。此無他。畏人知而不使人知也。仕者則反是。身必立朝廷之上。而軒裳圭組以華之。名必聞海宇之內。而文章道德以實之。則其心之所存。形于政事。被于歌詩。而灼于四方矣。心可隱乎哉。予以是知南谷非隱之地也。今先生居南谷。有田有廬。冠婚賓祭之取足。無心於勢利也久矣。然非以隱自居也。故歲至京都。訪舊故。縱飮談笑。往來途中。羸僮瘦馬。竪鞭吟詩。而白髥如雪。紅頰浮光。使善畫者。傳其神。未必讓三峯蓮葉圖矣。南谷。山可採水可釣。足以無求於世而自足也。而山明水綠。境幽人寂。擧目悠然。雖曰神游八極之表。亦不爲過矣。宜先生有以自樂於是也。予之衰病久矣。每欲歸去來而未果也。有田而近於海。有廬而薄於田。思得兩金而終吾身。予之望也。而豈可易而致之哉。先生之爲正言也。僕忝諫大夫。同言事。忤宰相。諸公皆外遷。獨穡也叨蒙異擢。至今令人愧赧。先生屢斥屢起位。纔至三品。然遺愛存於民心。華聞孚於物望。永之李氏。罕有儷美焉。是必鳴騶入南谷矣。異日立大策决大議。上贊南面之化。如諸葛公起於南陽。可必也。抑未可必也。皆天也。先生名釋之。先稼亭公門生及第也。甞與予同中辛巳進士科云。丁巳臘八日。記。
기증 유사암 시권 서(寄贈柳思菴詩卷序)
이색(李穡)
군자는 종신의 즐거움이 있나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은 족히 자기 즐거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가함도 없고 가하지 않음도 없으며, 움직이고 고요하며 쳐다보나 굽어보나 부끄러운 생각이 조금도 싹트지 아니하면, 이른바 나라는 것이 담담한 그 가운데 있거니와, 사생과 수요(壽夭)는 하늘이 준 것이요, 길흉과 영욕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다 나는 아닌데, 내가 그로써 기쁘게 여기고 두렵게 생각한다면, 이는 정(情)이 이기는 것이다. 정이 이기게 되면 천리는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인데, 이러고도 내가 종신의 즐거움이 있다 한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다.
벼슬을 시키는 것은 나를 귀하게 하자는 것이요, 녹을 주는 것은 나를 부자 되게 하자는 것이니, 나를 부자 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궁하게 할 수 있고, 나를 귀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천하게 할 수 있으며, 내가 감히 그 명령을 듣지 아니하지 못하는 것은 그 권리가 저쪽에 있고 내게 없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본시 내게 없는 것을 하루아침에 나에게 주어서 비록 더할 수 없는 부귀를 하게 될지라도 나는 기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기뻐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못하거늘 하물며 종신토록 즐길 수 있는 것이 되겠느냐. 이른바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저만이 스스로 아는 것이므로, 아비가 자식에게 줄 수도 없고 남편이 아내에게서 빼앗지도 못하게 된다. 무릇 천하의 지극히 친밀한 사이는 부자와 부부같은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서로 주고 빼앗을 수 없으니,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알기만 할 것이 아니라 또 실천을 한다면 반드시 밖에서 오는 근심이 이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사암(思菴) 선생은 대개 가까이 보는 바로 말하면, 서울에 거한 지 11년에 동배들이 그 높은 행실을 허여하고, 국정에 간여한 14년에 같은 조관(朝官)들이 그 넓은 도량에 굴복하여 포의(布衣)로 말미암아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또한 성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털끝만큼도 만족히 여기는 뜻이 말과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거처하는 것이나 그 입고 먹는 것을 보고 더불어 종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당시의 부귀한 자들이지만 그 외모를 보면 야인 시절과 같으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으로써 즐거운 것을 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수십 년 간 우뚝하고 빛나다가 능히 그 만절(晩節)을 지키는 자가 대개 적은데, 선생은 진퇴에 조용하여 벼슬하고 안 하는 것을 영화롭고 욕되게 여기지 아니하여 지난날 조정에 있을 적엔 그 도가 시행됨을 즐거워하였고 지금 농촌에 있어선 그 몸의 온전함을 즐거워하니, 몸이 온전하며 도(道)도 또한 온전하다. 지난날에 구름과 물이 흐르듯 처신하여 이미 자취를 남기지 않았으나, 유독 그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오랜 즐거움과 더불어 잠깐이라도 잊지 않았다. 만약 잊을 수 있다면 어찌 내가 말한 즐긴다는 것이 되겠는가.
성균 사예(成均司藝) 강자야(康子野)는 선생의 문인이다. 장차 제공들에게 시를 얻어서 은거의 도움이 되게 하려 하는데, 내가 선생을 깊이 아는 까닭으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나는 그 대강을 말한 것이다. 장주(莊周)는, “공허(空虛)에 사는 자가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문득 기쁘다.” 하였는데, 하물며 내 글이랴. 그는 반드시 격절(擊節)하여 감탄하기를, “서로 알아주는 지기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다.” 할 것이다.
寄贈柳思菴詩卷序
君子有終身之樂。一朝之樂。不足以爲我樂也。無適無莫。動靜俯仰。怍與愧不少萌。則所謂我者。湛乎其中存焉。死生壽夭。天也。吉㐫榮辱。人也。皆非我也。而我以爲喜懼。則情勝矣。情勝不已。天始滅矣。如是而曰我有終身之樂。吾不信也。爵之所以貴我也。祿之所以富我也。富我者。必能窮我。貴我者。必能賤我。而我不敢不聽命焉。以其在彼而不在我也。是以。素非我有。而一旦加乎我。雖窮貴極富。而我不以爲喜也。喜且不可。况以爲終身可樂乎。所謂可樂者。吾自知之尒。父不得予之子。夫不得奪諸婦。夫天下之至親而至密者。莫如父子夫婦。而猶且不得而相予相奪。其必有所以然者矣。不徒知之又踐之。必外患於是乎絶矣。思菴先生盖近之。居京師十一年。同列推其行高。與國政十四年。同朝服其量弘。由布衣位台鼎。亦可謂盛矣。然而無一毫自得之意。形於言動。視其居處。視其服食。視其所與游。盡一世之號爲富貴者。視其貌則猶布衣時。其不以一朝之樂爲可樂者歟。十數年間。巍然赫然。能保其終者盖寡。先生從容進退。不以軒冕在亡爲榮辱。昔也居廟堂。樂其道之行。今也在田里。樂其身之全。身全道亦全矣。追惟前日。如行雲流水。已無蹤迹。獨其愛君之心。與吾終身之樂。不可須臾之相離也。可離。豈吾所謂可樂者哉。成均司藝康子野。先生之門人也。將求詩諸公間。以爲考槃之助。以予深知先生。屬以叙。余故略言其大槩。周不云乎。逃空虛者。聞人足音跫然而喜。矧吾文乎。其必擊節而嘆曰。相知之不可無於世也如此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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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오잠 병서(愛惡箴幷序) -이달충(李達衷)
유비자(有非子) 무시옹(無是翁)에게 찾아가서 이르기를, “근자에 여럿이 모여서 인물을 평론하는데 어떤 사람은 옹(翁)을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옹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옹은 어찌하여 어느 사람에게는 사람 대접을 받고, 어느 사람에게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요.” 옹이 듣고 해명하기를, “남이 날보고 사람이라 하여도 내가 기뻐할 것이 없고, 남이 날보고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내가 두려워할 것이 없고, 사람다운 사람은 나를 사람이라 하고 사람 아닌 사람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나는 나를 사람이라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모른다.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나는 기뻐할 일이요. 사람이 아닌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나는 또한 기뻐할 일이며,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나는 두려워할 일이요, 사람 아닌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또한 두려워할 일이다.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마땅히 나를 사람이라 하고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인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닌지를 살필 일이다. 그러므로 오직 인(仁)한 사람이어야 능히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나니, 나를 사람이라 하는 사람이 인한 사람인지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인한 사람인지.”라고 하였다. 유비자(有非子)가 웃으면서 물러갔다. 무시옹(無是翁)이 이것으로 잠(箴)을 지어 자신을 일깨웠다. 잠에 이르기를, “자도(子都 춘추시대 정(鄭) 나라의 미남자)의 어여쁜 것이야 뉘가 아름답다 아니하며 역아(易牙)의 음식 만든 것이야 뉘가 맛 있다 아니하랴. 좋아함과 미워하는 것이 시끄러울제는 어찌 자기 몸에 반성(反省)하지 아니하랴.”
[주1]유비자(有非子) 무시옹(無是翁) : 글을 만들기 위하여 주인과 손의 문답을 가설(假設)한 것인데 유비(有非)와 무시(無是)는 모두 실제로 있지 않는 가공(架空)의 인물로 ‘아니다’ ‘없다’한 것이니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급에 나오는 자허(子虛)니 무시공(無是公)이니 하는 가설(假設)의 인물과 같은 것이다.
[주2]인한 사람 …… 있나니 : 공자(孔子)의 말에 “오직 인자(仁者)라야 능히 사람을 옳게 좋아하고 옳게 미워할 수 있느니라.” 하였다.
[주3]역아(易牙) : 제 환공(齊桓公)의 신하로서 음식을 잘 만들기로 유명하였다.
愛惡箴 幷序 [李達衷]
有非子造無是翁曰。日有群議人物者。人有人翁者。人有不人翁者。翁何或人於人。或不人於人乎。翁聞而解之曰。人人吾吾不喜。人不人吾吾不懼。不如其人人吾而其不人不人吾。吾且未知。人吾之人何人也。不人吾之人何人也。人而人吾則可喜也。不人而不人吾則亦可喜也。人而不人吾則可懼也。不人而人吾則亦可懼也。喜與懼當審其人吾不人吾之人之人不人如何耳。故曰。惟仁人。爲能愛人。能惡人。其人吾之人仁人乎。不人吾之人仁人乎。有非子笑而退。無是翁因作箴以自警。箴曰。子都之姣。疇不爲美。易牙所調。疇不爲旨。好惡紛然。盍求諸己。
제천봉시고후(題千峰詩藁後) -이숭인(李崇仁)
내가 추방을 당하여 동서남북에 유리하는 사람이 되면서부터 사람들이 모두 팔을 내젓고 달아나며, 서로 친근히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부도씨(浮屠氏) 중에 왕왕 서로 방문하는 자가 있고, 서로 글로 묻는 자가 있어서 성산(星山)에서 경란(敬蘭)을 얻고, 장흥(長興)에서 학남(學南)과 성민(省敏)을 얻고, 서원(西原 청주)에서 상형(尙衡)을 얻고, 중원(中原 충주)에서 둔우(屯雨)를 얻어 가까이 하였으니, 대개 모두가 명리(名利)를 소홀히 하고, 공허(空虛)의 세계로 도망한 자들이다. 둔우가 나를 여우(旅寓)에서 따른 지 한 달 남짓 만에, 하루는 그가 지은 시 한 질(秩)을 내어 보였는데, 청신하면서도 신고(辛苦)한 데 이르지 아니하고, 졸하면서도 비속한 데 이르지 않았으며, 윤택하면서도 비만한 데 이르지 않아서, 오래 읽을수록 더욱 권태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당(唐)나라의 《구승집(九僧集)》이 전래하여 나도 일찍이 그 경개(梗槪)를 엿보았지만 둔우가 얻은 바를 어찌 그들에게 즐겨 많이 양보하리요. 그러하나 시의 공졸(工拙)은 족히 우리 둔우를 논할 것이 못 된다. 둔우가 나에게 친척의 정이 있는 것도 아니며, 향리(鄕里)의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곤궁할 때 서로 도운 은의(恩義)가 있는 것도 아니로되, 환난(患難) 중에서 상종하며,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림이 없었으니, 이는 그 얻은 바가 또한 마땅히 시 밖에 있겠거늘, 뒤에 둔우의 시를 보는 자가 단순히 말하기를, “둔우는 시승(詩僧)일 따름이다.” 한다면, 둔우를 알지 못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의 사람됨을 아울러 밝히는 것이다. 우의 호는 천봉이니, 환암의 고제(高弟)이다.
題千峯詩藁後
自余遭放逐。爲東西南北之人。人率掉臂去。戒勿相親。而浮屠往往有相見訪者。有相書問者。於星山。得敬蘭。於長興。得學南省敏。於西原。得尙衡。於中原。得屯雨斯近。蓋皆遺外聲利。而逃空虛者也。雨從余旅寓月餘。一日出其所作詩一秩。見示。淸而不至於苦。拙而不至於野。腴而不至於膩。讀之愈久而愈不知倦焉。世傳唐九僧集。予甞竊窺其梗槩。雨之所得。豈肯多讓乎彼哉。雖然。詩之工拙。不足以論吾雨也。雨之於予。非有族黨之好也。鄕里之舊也。濡沫相資之恩也。而相從於患難之中。略無畏忌。是其所得。又當在於詩之外。而後之觀雨之詩者。苟徒曰。雨詩僧而已。則爲未知雨者也。余故倂著其爲人者云。雨號千峯。幻菴之高弟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