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광고에는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는 시대상이 담겨 있다 한말 일본인 발행 신문의광고는 일본과 한국의 경제적 격차가 얼마나 현격하였는지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인천에서 발행되던 ‘조선신보’(일본어) 1907년 1월 1일자는 무려 50여 페이지의 신년 특집호를 발행했다. 광곡가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서울의 한국어신문은 4페이지 발행도 힘겨웠던 시절이다. 일인 신문의 호황은 일본 수입상품과 기업체, 은행, 해운업체 등이 한국의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인천에서 일인들이 발행한 첫 일본어 신문은 ‘인천경성격주상보(1890. 1. 28 창간)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1896. 4. 7)에 6년이나 앞선다. 격주 발행에서 발전을 거듭하여 ’조선순보‘(1891. 9. 1-순간), ’조선신보‘(1892. 4. 15-주간)로 이름을 바꾸고 발행간격을 좁히면서 지령을 이어나갔다. 1895년 10월 25일부터 이틀 간격의 격일간을 거쳐 1902년 무렵에 일간으로 발전했다.
조선신보 광고를 보면 그 시절에 이런 물건까지 들어왔다니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890년대에는 일본의 은행광고를 비롯하여 아사히비루(맥주), 포도주, 일본술 등의 주류광고(삿포로·아사히 등 맥주 광고)와 함께 인천에 입출항하는 운항선의 일정표, 오늘의 호텔에 해당하는 일본여관, 양복점 광고도 보인다.
광고의 기법도 예상을 뛰어넘는다. 아시히 맥주는 “전국 52회 품평회 유공 1등상 금메달 수령”이라는 선전문구가 화려하다(1896. 8. 27). 독립신문에는 약품류와 서적, 수입담배 따위 광고가 겨우 지면 귀퉁이에 실리던 무렵이다.
일본광고는 눈길을 끄는 그림과 강력한 글자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하여 화려하고 전달력 강한 디자인으로 관심을 끈다.
하려한 디자인의 담배 전면광고·비누·치약·의약품·간장·분유 같은 소비재와 발동기·축음기·자전거·소화기·환등기·회중전등·이발기(바리캉)·오르간·피아노·사냥총 같은 공산품과 사냥개 광고도 등장하여 백화점의 진열대를 연상케 할 정도가 되었다.
두 페이지를 마주 보도록 게재한 전면광고 ‘용산연와제조서’는 생산량과 고용창출 규모의방대함을 자랑한다. 1개월 벽돌 250만개생산에 직공이 200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조선신보. 1907. 1. 1)
1911년 5월 19일자 경성일보에는 영국 팔머사 제품의 자동차와 자전거용 타이어가 등장한다. 주문 수입이 아니라 소비자를 향한 광고가 실렸다는 사실은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이 꽤 널리 퍼졌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신보는 일본어 신문이니 우리나라 소비자 대상의 광고는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 들어온 상품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아주 무관할 수는 없다. 눈요기라도 하는 동안 외래 상품에 점차 익숙하게 되었을 것이고 마침내는 신식 물품의 소비자 대열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대한제국 경제의 일본 에속화가 심화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식민지의 토대가 구축되던 시기에 외래품은 날이 갈수록 널리 침투했다. 조선신보는 1911년 10월 1일 한국어 지면을 신설하면서 무려 60페이지를 발행했다.
광고는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인 동시에, 일본과 서양의 어떤 상품이 들어와서 민족 경제를 파탄시켰는지 그 실물이 전시된 바람회장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