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좀 해보라는 타박은 오래전부터였다. 누구는 옅은 검정으로 누구는 중간 갈색으로 치장하고 나왔는데 얼마나 사람이 달라 보이는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다나. 아내는 정색하고 꼬드긴다. 이번 모임에도 그냥 가려면 혼자 가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며칠 전,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면 자신이 해 주겠다며 머리 염색약을 사 왔다. 최근에 나온 것인데 간편하고 비닐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된다며 쇼호스트가 신상품을 홍보하듯 한다. 염색 전후 모습을 그림 그리듯 설명까지 한다. 번거로운 절차 없이 잠깐 눈 감고 있다가 샴푸만 하면 ‘끝’이라고 부추긴다.
옻을 잘 타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웬만한 바이러스에 내성이 생긴다고 한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처음과 달리 어느새 제 것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옻은 달랐다. 언젠가 옻닭이 보양식이라 하여 대여섯 명이 유명 옻 전문집을 향했다. 며칠 지나니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나만 낭패를 당했다.
옻과의 연은 어릴 적 고향에서 야산에 소를 방목하고 산길로 다닐 때부터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계절풍처럼 찾아왔다. 온몸이 말이 아니었다. 쌀을 씹어서 바르기도 하고 개고기 육수를 바르기도, 온천이 좋다고 하여 이목을 견뎌내며 온천을 전전하기도 했으나 찬 바람이 불어야 해방되었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
머리 염색약의 주성분이 옻이라고 들은 후 염색을 더욱 멀리했다. 생긴 대로 지내면 될 것을 뭣 하러 사서 고생을 하나 싶기도 하고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다고 일갈해 온 터다. 홈쇼핑 방송의 머리 염색약 선전을 화상강의 수강하듯 유심히 보던 아내의 손길이 오늘따라 예사롭지 않다.
회유와 권유를 이리저리 피하는 것도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구시렁거리며 거울을 보는 내게 이때다 싶은지 화장실에 염색 방을 차리고 작은 도끼 같은 양날의 빗과 염색용액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여 목욕용 간이의자에 아이 앉히듯이 앉으란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마다할 수도 없지 않은가. 독특한 염색약 냄새가 코를 자극하지만 이미 꼼짝없이 덜미 잡힌 토끼 신세가 되었다.
10여 분이 지나고 샴푸를 하는데 머리에서 흙탕물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몇 번을 헹구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 웬 청년이 나를 보고 놀라워하고 있다. “그 봐, 진작 염색하지!” 하는 아내와 “거참 어색하네.” 하는 내가 교차한다.
난 머리숱은 보통인 편이고 머리카락도 그리 백발은 아니라며 한사코 염색을 권하는 아내의 말보다 ‘그만하면 보기 좋다.’는 친구의 말을 더 믿었다. 한편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더 선호하는 개인적 선택이기도 하다. 생의 연륜이 쌓이면 자연히 반백, 온 백으로 가는 게 순리라 여겼다. 나이 든 사람이 머리카락만 까만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레 보이기도 하고 목주름, 피부 잡티는 노년인데 머리 색만 검게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냐며 노래처럼 권하는 말을 예사로 넘겨왔다.
머리염색 후 처음으로 이발소에 갔다. 사람이 달라졌다며 추켜세우는 이발사에게 이발 솜씨가 달라진 것이라고 맞장구치고 와서는 혼자서 거울을 보고 멋쩍어했다. 모임에 갔다. 젊어졌다고 야단법석이다. ‘내 얼굴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역설적 얘기가 생각났다. 내 것이지만 나보다 더 내 얼굴을 보는 이는 남이다. 내 생각만 한 게 아닌가.
사실 퇴직 후에는 거울을 본다는 게 설핏 화장실에서가 전부다. 대충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외출하는 정도가 다반사였다. 점점 희끗희끗해지고 윤기 없이 가늘어지는 머리칼이며 손가락 빗질을 유심히 보아온 아내가 나의 외모를 더 객관적으로 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머리염색하고 빗질해서 가꾸면 아직은 괜찮은데 왜 그리 무심하냐며 심심하면 읊조리던 아내의 충정을 ‘소귀에 경 읽기’로만 넘길 일이 아니다 싶다.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나의 외모를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아내에게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며 찬물을 끼얹던 일이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남이 보는 나를 본다. 십 년은 젊어 보인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반백의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으로 갈아입었다. 쓱, 고개를 돌려 옆머리도 곁눈질한다. 내가 봐도 달라져 보인다. 이제 마음만 10년 전으로 돌리면 되겠다 싶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걷기에 나선다. 시선은 15도 전방, 어깨는 펴고, 발끝은 안으로 모으고 힘차게 팔 흔들며 걸어 본다.
호박에 줄긋기도 마음먹기인가. 담장 넘어 호박이 빙그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