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던 일]
-석화 김영욱
사돈을 맺을 지인과 함께 절친했던 윤목사를 만나 월출산을 오르자고 약속하고 영암 월출산 밑에 살고 있는 월곡동에 도착하여 그 선친께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눈 후에 월출산 등반을 시도하려는데 일행 중에 무릎관절이 상해서 등반을 할 수가 없다고 하자 꼭 월출산을 가야만 하느냐고 그 월출산 산자락에 있는 백운동 운림에 가자고 했다. 지난 번 와봐서 낯설지 않는 터라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태고 때부터 사람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았다는 백운동운림은 은쟁반에 옥구술 구르는 듯한 물흐르는 소리가 청아하다. 굵은 동백 숲이 기름을 발라놓은 듯이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새소리까지도 오염이 없이 해맑은 원시림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연못가에 뽕나무는 튼실한 열매를 떨구고 있어서 가지를 휘어잡고 오디를 따서 입질을 하니 달콤하다. 그런데 올챙이 두 마리가 연못에 떨어진 오디를 입에 물고 밀고 다니면서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어린이 둘이서 튜브를 타고 노니는 것처럼 귀엽고 행복해보였다.
정자에 앉아서 월출산을 바라보는데 나무숲사이를 액자삼아 사진을 촬영하다보니 기암괴석들이 장수를 중심으로 군인들이 적진을 향하여 돌격자세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일행들은 잠시 쉬었다가 나가는 길은 왕대나무가 길 좌우로 즐비하게 서서 길손들을 환영이라도 하듯이 허리를 구푸린 체 굽실굽실 흔들거리고 있었다. 백운운림을 한 바퀴 돌아 나오자 녹차 밭이 넓디넓은 광장처럼 초록 옷을 입고 펼쳐져있었다. 거기서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부부끼리 사신을 찍고 단체사진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강진 마량으로 가자는 의견이 있어서 승용차 두 대로 나누어 타고 마량으로 행했다. 필자가 고향을 떠나올 때는 비포장이라서 광원여객 버스가 지나는 자리는 먼지가 공장의 연기처럼 솟아올랐는데 고향을 찾는 길은 포장도로가 되어 승용차가 미끄러지듯이 잘도 간다. 도로가 많이 개선되었어도 굽도리를 돌고 돌아 동닝게 고개를 막 넘어서자 고향의 심벌이라고 일컫는 검푸른 까막섬이 눈앞에 나타나면서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갯내음이 코깃을 파고들면서 어머니 품 같은 고향집들이 정겹게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바닷가에는 어선들이 닻줄을 목에 매고서 갯펄에 누워 쉬고 있었고 썰물 때라서 물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어서 쓸쓸해 보였다.
우리일행은 궁전횟집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누가 들어오면서 인사를 한다. 마스크를 썼기에 언능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서울에 살고 있는 고향 친구목사였다. 알고보니 친척 중에 한 분이 102세에 돌아가셔서 조문을 왔단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고향식당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식당사장이 그의 동생이기에 식사하러온 샘이다. 식사가 끝나려는 무렵에 식대를 계산하려고 나가니 벌써 식대를 계산했단다. 고향에 왔으니 제가 친구목사가 오더니 맛있는 차 한 대접해야 하는데 윤목사가 벌써 계산한 것이다. 한편 미안하고 한편은 고마웠다. 그런데 서울에서 온 친구가 맛있는 차를 대접하겠다며 차집으로 가잔다. 서둘러서 찻집으로 갔는데. 더덕차가 제일 좋다면 권한다. 모두들 더덕차를 마시는데 그 향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살아온 쓰디쓴 이야기를 하면서 약 30분이 지나서야 어이. 유문이는 어디가 있느냐고 묻자. 아까 식당에 들어오면서 인사한 사람이 유문이란다. 오매. 그런가. 가서 한번 만나봐야 하겠다며 일어섰다.
유문목사는 추자도에 있을 때 고향 사람들이 놀러가서 이튿날을 지내다가 돌아온 기억이 생생하다. 팔뚝 같은 조기를 상에 놓았는데 그 창자까지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인천으로 개척을 나갔는데 도움을 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했는데 뜻하지 않게 고향에서 만나게 되었다. 사람이 살다가보면 뜻하지 않는 일들이 가끔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성경에 “사람이 계획을 세울 찌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다.”
오늘은 월출산 등산을 하기로 무장을 했는데 내 뜻과는 전혀 다른 백운 운림과 강진 마량(고향)을 가서 뜻하지도 않는 서울에서 사는 친구의 대접을 받고 인천에 사는 후배를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