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사-대흥사 불교가 조선에서 침체 내지 쇠퇴를 맞고 있을 때 유독 전남의 불교만이 오히려 전성기를 맞는다. 거기에는 대둔사(大芚寺)의 역할이 컸다. “대둔사는 대흥사이고, 해남현 남쪽 20리 대둔산에 있다.” 19세기 초에 편찬된 『대둔사지(大芚寺誌)』제1권의 첫머리글이다.1) 현 대흥사의 옛 이름은 대둔사이고 대흥사라고도 했다. 대흥사는 이름 그대로 19세기를 전후하여 ‘대흥’ 즉 크게 일어난 사찰이다. 대흥사에는 여러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흥사의 불력(佛力)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천불전(千佛殿)의 천불에 얽힌 사연이다. 소설보다 더 찐한 실화가 전해온다. 대흥사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으로 나뉘어 조성되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명부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 사찰의 근간을 구성하는 주요 불전과 요사채가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다. 거기에 더해 별원으로 사찰 남쪽에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따로 있다. 남원의 중심에 위치한 천불전은 현재세인 현겁(賢劫)의 천불을 봉안한 전각으로 흔치 않은 전각이다. 현재 목조삼존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1,000좌의 석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불이란 무엇인가? 천불(千佛)에서 천(千)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뜻으로 한 분의 부처님이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고 있다는 다불(多佛)신앙에서 생겨난 것이다. 천불은 불교의 삼신불 이론에 따르면 화신(化身)이다. 깨달음의 본체는 예로부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의 형상으로 만들어져왔다. 이를 비로자나불과 그로부터 나오는 무량한 화신불(化身佛)로 조형화하였다.2) 화신으로서 다불의 교학적 배경은 화엄경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서 시방 삼세의 무수한 시공간에 부처가 무량하다는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이 존재하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다불은 삼천불(三千佛) 또는 백천불(百千佛)이라 하다가 언제부턴가 천불(千佛)로 정착되었고, 천불의 부처님 이름도 각각 붙여지기 시작했다. 천 개의 불상을 모신 사찰의 불전이 천불전이다. 이런 천불신앙은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이어져 왔다. 무등산 원효사 소조불상이나 【그림 2】의 「비로자나삼천불도(毘盧遮那三千佛圖)」등은 고려시대의 예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도 광덕사(廣德寺) 삼천불직조금화(三千佛織造錦畵) 및 직지사(直指寺)와 대흥사의 천불전 등이 있어 천불신앙의 전통이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3) 대둔사는 『화엄경』을 위시한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강회·대회·법회를 빈번히 여는 등, 교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4)이런 점들이 대둔사가 천불과의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이도 하다. 대흥사의 천불은 어떻게 만들었나?5) 천불의 조성은 대둔사 남원의 화재로부터 비롯되었다. 『대둔사지』에 따르면, “가경 신미년(1811) 봄에 남원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대둔사 남원의 화재는 1811년(순조 11) 2월, 가리포첨사(加利浦僉使)6)가 2경(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사찰로 들어와 세 번이나 횃불을 보충하며 창고로 들어왔다가 불씨가 떨어진 줄 몰라 이로 인해 불이 났다. 이 불로 인하여 천불이 비호하던 곳이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千佛所庇 鞠爲灰燼]. 천불전을 포함하여 가허루, 대장전, 용화당, 팔해당, 적조당, 지장전, 약사전, 향로전 등 9채가 하룻밤 만에 불타버렸다. 이에 완호 윤우(玩虎尹佑, 1758~1826)가 화주(化主)가 되어 차례로 일으켜 세웠다. 완호 윤우는 대흥사 제10대 강사로 대흥사 부흥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천불의 조성 경위는 다음과 같다. 완호 대사는 정축년(1817)에 상경하여 경산(京山)의 화원 등 화사(畵師)들을 구해 호의 시오(縞衣 始悟, 1778∼1868), 인봉 덕준(仁峰 德俊)과 함께 경주 기림사(祇林寺)로 내려가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이때 원효사의 화승(畵僧)이었던 풍계 현정(楓溪賢正)에게 천불상의 조성을 요청하였다. 풍계는 19세기 전반기 전라도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불화승의 한 유파를 거느린 인물로서, 원담 내원(圓潭乃圓), 해운 익찬(海雲益讚)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경주 불석산의 옥돌을 쪼아 천불상을 만드는 대역사는 1817년 8월 7일 경산 화원 8명으로 시작해서 영남, 전라의 화원들이 집단으로 참여하여 3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완성하였다. 이와 같은 집단불사는 당시 일반적 관행이었다.7) 10월 18일에 경산(京山) 화원 9인이 첫 번째 333불을 점안(點眼)하였고, 10월 19일에는 영남 화원 24인이 두 번째 333불을, 20일에는 전라 화원 11인이 세 번째 333불을 각각 점안하였다. 이렇게 천불상의 조성과 점안을 마쳤다. 불사를 시작한 이후 완성될 때까지 석 달 사이에 상서로운 기운이 세 차례나 빛을 발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천불상은 만들 때부터 신비로움의 조짐이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완성된 천불상을 해남 대둔사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천불상을 경주 장진포로 옮겼다. 때마침 그곳에 강진군의 완도 상선이 도착하였기에 그 배를 임대하여 11월 16일, 뱃머리에 불상을 모셨다. 232+768=1,000 : 천불의 기적 왜 대흥사 천불이 특별한가? 이송과정에 있었던 표류에도 불구하고 기적같이 무사 귀환한 극적 사연 때문이다. 외짝이 될 뻔했던 천불상!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체,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 날, 떠내려갔던 불상들이 단 하나의 손실도 없이 돌아왔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살펴보기로 하자.8) 11월 18일에 완도 배를 띄워 나아가 울산 장생포에 정박하였다. 이송 책임을 맡았던 풍계는 상좌 인담(印潭)과 함께 육로로 장생포로 갔다. 22일에 도착했는데 배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착하였다. 배는 작고 불상은 무거워 배가 나아가기에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함경도 홍원의 상선이 해남으로 가려 하였기 때문에 그 배를 임대하여 불상 768좌를 옮겨 실었다. 나머지 232좌는 완도 상선에 그대로 두었다. 24일 두 척의 배가 함께 출발하였다. 큰 배인 홍원선에는 인봉 증사(仁峰證師)와 풍계 화사(楓溪畵師)가 탔고, 작은 배인 완도선에는 호의 선사가 탔다. 부산 앞바다인 동래 오륙도에 이르러 큰바람을 만났다. 작은 배는 다행히 연안으로 돌아왔지만, 큰 배는 피하지 못해 큰 바다로 표류했다. 작은 배는 큰 배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날이 오래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고 의지할 데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먼저 해남으로 돌아와 232좌의 불상을 불전에 봉안하였다. 반면 큰 배인 홍원선은 무릇 5일 동안의 표류 끝에 일본의 서해도(西海道, 사카이도) 축전국(筑前國, 치쿠젠노쿠니) 종상군(宗像郡, 무나카타군)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리)에 표착하였다. 11월 29일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7개월이란 긴 세월을 낯선 땅에서 보내야 했다. 표착지에서 현지 관리의 심문을 받은 후, 종상군 진옥기포(津屋崎浦, 쓰야자키우리)→ 남도포(藍島浦, 아이노시마우리)→ 당백포(唐白浦, 토오시라우리)→ 백도(栢島, 카야시마)→ 호자도(呼子島, 요부코도오)→ 삼율도(三栗島, 미쿠리시마)→ 서도(西島, 니시지마)를 거쳐 1818년 1월 2일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조선관에서 관례에 따라 3개월 15일을 머문 후, 4월 14일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도마치(道馬峙)→ 복전포(福田浦, 후쿠데우라)→ 평호도(平戶島, 히라토시마)→ 풍분도(豊本島, 도요모토지마, 일명 一崎島)를 거쳐서 5월 4일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에 도착했다. 이후 대마도를 출발하였는데 다시 표류하여 6월 19일 가덕도 천성진(天成鎭)에 이르렀고,9) 27일에 부산진 앞바다에 다시 정박하였다. 동래부에서 문정(問情)하고, 7월 초 5일 밤에 배를 출발하여 6일에 동래관을 거쳐 10일에 통영에 들렀다. 13일에 배를 출발하여 장흥 향일도에 이르고, 14일에 완도 원동(院洞) 대진강(大津江)에 들어와 15일에 대흥사로 올라왔다. 이미 도착한 232좌는 새로 조성한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되어 있었고, 8월 15일에 나머지 768좌가 이때 봉안되어 비로소 천불전은 완성되었다. 풍계 대사는 재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배가 정박했을 때 대둔사에 급히 소식을 알렸더니 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며 다투어 와서 보았다. 모두 다시 살아나 만난 것같이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으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10)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런 감정은 풍계뿐이 아니었다. 천불조성의 대역사를 주도했던 완호 대사에게는 더 애틋했을 법하다. 다산 정약용이 호의 선자(縞衣禪子)에게 1818년 3월 9일 보낸 답서를 보면, “완호(玩虎)는 여태 바닷가에 머물고 있고, 서불[徐巿]의 다락배는 아득히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네.”11) 라 하여 천불상이 일본으로 표류한 후 돌아올 때까지 완호 대사는 계속 바닷가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또 1818년 8월 11일 석불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를 겸해 완호에게 보낸 글[與玩虎]을 보면,12) “작년 겨울 석불이 동쪽으로 떠내려가 눈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누군들 노인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바람을 받아 배가 와서 뜻하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누군들 노인을 위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라 하여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완호 대사의 안타까움과 간절함,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의 감격 등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한편, 풍계 대사는 1818년 귀국한 후 불상을 무사히 봉안하고, 이듬해에는 천불전의 후면에 신중탱화(神衆幀畵)를 그려 봉안하는 등의 작업까지 해 임무를 마무리하였다. 이때의 화기(畵記)를 보면, 증사(證師)는 초의 의순이며, 송주(誦呪)는 호의 시오이고, 금어(金魚)는 풍계 현정이고, 화주(化主)는 완호 윤우로 되어 있다. 가경 24년(1819) 기묘 7월 그믐날[晦日]에 봉안하였다고 나와 있는데, 이로 보아 풍계 대사가 천불전의 마무리 작업까지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풍계는 1821년 7월, 귀국한 지 3년이 되는 해에 지난 기억을 더듬어 『일본표해록』을 지었다. 기적의 귀환, 그 배경 풍계 대사는 1817년 뜻밖의 표류로 인하여 낯선 땅 일본에서 7개월의 세월을 보내며 난관을 맞았지만, 기적같이 단 하나의 불상도 훼손됨이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①부처의 가피력(加被力)13) 거친 바다와 암초의 위험 속에서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부처의 가피력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풍계는 『일본표해록』에서 “옥불 1천 좌는 단지연비(斷指燃臂)하는 온 정성을 들여 만들었으니, 만약 침몰하였더라면 768좌의 부처님은 어떻겠는가. 다섯 감각기관을 태우는 것 같을 것이고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다행히 천행의 도움을 받아 칠흑 같은 밤중에 축전국(筑前國, 치쿠젠노쿠니)의 도포도(都浦島, 미야코우라)에 정박하였고 계속 옮겨 장기도(長崎島, 나가사키시마)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평호도(平戶島, 히라토시마)와 일기도(一崎島, 잇키시마)와 대마도를 지나서 본사에 돌아왔으니 이 어찌 사람의 힘이 미칠 바이겠는가. … 더군다나 여러 섬에서 배를 출발시킬 때에 상서로운 무지개가 호송하였으니, 이역(異域)의 무지한 백성들도 놀라 소리 지르며 기이하다고 말하였으니, 이 어찌 부처님의 가피력이 더욱 밝게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70쪽) 라 하였다. 또 상서로운 무지개가 호송하는 기서현상(奇瑞現象)에 대해서는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에서 배가 출발할 때 뱃머리에 상서로운 무지개가 생겨났는데 마치 문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 배가 그 중앙으로 지나갔다. 진옥기포, 남도포, 당백포에서도 배가 나아가고 있을 때 모두 이러한 상서로움이 있었다. 뱃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고, 일본 사람들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47쪽) 고 덧붙였다. 천불의 조성과정에서도 상서로운 조짐들이 있었지만, 칠흑 같은 밤에 암초도 피하고, 상서로운 무지개가 나타나 호송하는 등의 일을 거론하면서 “이 어찌 사람의 힘이 미칠 바이겠는가?”라 하여, 부처님의 가피력이 있어 무사히 불상을 보존해 봉안하였다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②조선은 부처님의 나라 그리고 또 풍계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매우 흠모하여 중국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모두 대답하기를 ‘조선은 부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그 나라가 우리나라를 흠모함이 예부터 이와 같았다고 한다.” 라 하여 “조선은 부처님의 나라”라고 믿어 우리나라 사람들을 흠모함이 예전부터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 분위기에 더하여 700여 불상을 모시고 표착한 풍계 일행은 승려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잘 대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역땅의 불편함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③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정신[竝生之仁] 표류는 언제 어느 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도인(漂到人)은 국제간에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정신[竝生之仁]”으로 대하는 원칙이 예전부터 있어왔다. 왜구가 날뛰던 16세기 중엽에도 일본측이 “표류한 사람이 귀국(貴國, 즉 조선)에 도달하면 살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자, 우리 측도 “귀국(즉 일본)의 백성도 우리의 백성과 같으니 한결같이 사랑해야[一視同仁] 마땅한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바로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정신을 지켜나가기 위한 조처였다. 조선인도 당연히 일본 땅에 표류하곤 하였는데, 일본 역시 이런 사랑의 원칙을 지켜주었다.14) 풍계 대사 일행의 무사 귀환에도 이런 정신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768좌 천불상의 어깨 위에 ‘日本’이란 글자가 써진 사연 일본으로 표류하였다 돌아온 768좌의 불상들은 그 어깨 위에 모두 ‘日本’ 또는 ‘日’자를 써서 일본에서 온 것임을 구분하였다. 이런 글자가 쓰이게 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대둔사 승려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던 다산은 1818년 8월 불상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완호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상을 혼동할 여지가 있다고 하면서 “소동파의 대아라한찬(大阿羅漢贊)에 말하기를 “어느 것이 셋이고 어느 것이 일곱인지 아는 자가 없다(是三是七, 未有知者)”고 했는데, 이제 대둔사의 석불 또한 이같은 염려가 있습니다. 훗날 뉘라서 어느 것이 먼저 온 300개의 부처이고, 어느 것이 동쪽으로 떠내려 갔던 700개의 부처인 줄 알겠습니까? 반드시 부처의 등에다 모두 작은 전자(篆字)로 ‘日’자를 써서 표시로 삼아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어둔 뒤라야 서로 뒤섞이는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뜻은 모름지기 초의 의순과 함께 의논하십시오.“15) 라고 하였다. 「천불조성약기」나 「완호강사전」에 모두 일본에서 돌아온 불상의 어깨에 ‘日’이란 글자를 써 표시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것이 다산의 당부에 기인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림 7】에서 보듯이 불상의 어깨 근처에 ‘日本’이란 글자가 뚜렷하다. 또 다른 불상의 어깨에 ‘가경정축대흥사이안(嘉慶丁丑大興寺移安)’이란 글자가 써있는데 이는 완도 배에 실려 먼저 도착한 불상으로 보인다. ‘가경 정축’은 1817년으로 표류 불상이 돌아오기 전 해이다. 조선 후기 불교계의 근본사원[宗院] 대둔사 천불이 만들어지던 때는 『대둔사지』가 편찬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대둔사지』의 편찬과 천불의 조성은 대흥사의 이른바 ‘대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 불교계에서 호남지역은 다른 어느 곳보다 두드러진 활동 모습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사찰은 송광사와 대흥사였다. 그중에서도 대흥사는 가장 역동적인 사찰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대둔사의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 제12대 宗師)과 송광사의 묵암 최눌(黙庵最訥, 1718~1790)이 심성 논쟁을 벌였다. 19세기 전반에는 대흥사의 초의 의순(1786~1866)과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이 선(禪) 논쟁을 벌였다. 이는 이후 100년간 불교계의 중심적인 화두가 되었다.16) 이처럼 대둔사가 조선 후기 불교계의 종원 즉 대표적인 사찰로 부상하는 데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즉 ①서산유의(西山遺意)의 발현, ②표충사의 사액=공인, ③『대둔사지』 편찬, ④『동사열전』의 편찬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종원 표방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사건은 표충사의 건립과 사액을 통한 공인이었다. 이를 위한 명분이 곧 서산유의였다. 그리고 『대둔사지』의 편찬을 통해 12종사와 12강사를 탄생시켰다.17) 『대둔사지』에서는 무엇보다 표충사의 건립을 통한 ‘종원(宗院)’의 성립에 초점을 맞추었다. 편찬자들이 “태고 보우 화상이 중국에 들어가서 임제종 정맥을 얻었으며, 여섯 번 그 등불이 전래되어 서산대사에게 이르고 의발이 대둔사에 전해지니, 대둔사가 우리나라 선교의 종원이다.”(20쪽) 라고 하여 대흥사가 선교양종의 종원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대둔사지』 제3권 「표충사를 세우게 된 인연」에서 “옛날에 우리 서산대사께서 남방에 유학할 때 이 두륜산에 주석하셨다. 비록 그분께서 열반하신 곳은 묘향산이지만 3년 뒤에 친도(親徒) 몇 사람이 유의(遺意)를 받들어 가사와 발우를 짊어지고 남쪽 두륜산으로 왔다.”(147쪽) 고 하였다. 이처럼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즉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대둔사에 전래되는 것을 매개로 하여 ‘서산유의’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기재(忌齋)는 이미 지내왔고, 영당까지 이렇게 건립하여 세시마다 향 사르고 촛불 밝히는 일을 대둔사가 주관하고 있으니, 이것이 대둔사가 근본 사원[宗院]이 되는 까닭이다.”(149쪽) 라 하였다. 그리고 홍문관 대제학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8~1638)에게 부탁하여 「해남현대흥사청허대사비명」을 두륜산 대흥사에 세웠고, 이 비를 세운 후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의 의발이 고인께서 마음에 두신 곳인 남쪽으로 잇따라 내려오자 종의 법통이 이로 인해 귀결되었다[宗統以歸].”(160쪽) 라 하였다. 대흥사는 공식적으로 휴정의 종통이 전수되는 곳으로 인정받았다. 이를 다시 종합하여 “서산의 의발이 명백하게 이곳에 있고, 영정도 명백하게 이곳에 있고, 기일에 지내는 제사도 명백하게 이곳에서 올리고, 임종하며 맡기신 물품도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대둔사는 자연히 팔도의 근본 사찰이[八路之宗院] 되는 것이지, 이런 기록 때문에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질 수 있겠는가?”(164쪽) 라 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대둔사 승려 계홍(戒洪)이 뜻을 세워 발원하여 춘계 천묵(春溪天默)이 행장을 끌어안고 하늘에 호소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고 표충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셨으며, 사명(泗溟)과 뇌묵(雷默)을 좌우에 제향토록 하셨다. 사명은 곧 유정(惟政)이고, 뇌묵은 곧 처영(處英)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표충사(表忠祠)가 건립되었고, 휴정과 대둔사의 ‘연고’가 공인되었다. 그리고 『대둔사지』의 편찬으로 종원 표명은 완성되었다. 거기서 12종사와 12대 강사 종통(宗統)의 계보까지 세워 불교계 전체를 대표하는 종찰로서 선과 교의 본산이 되고자 하였고, 그렇게 되었다. 대둔사 12종사와 12강사는 모두 화엄 강회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조선 후기 불교는 법맥상 임제종의 전법(傳法) 계승을 중시하는 선종이었음에도 이처럼 교학 전승에 초점을 맞추어 종사 체계를 구성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천불신앙과도 통한다. 화엄경에 교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천불신앙은 그래서 대둔사에게는 각별했다. 이런 대둔사의 ‘대흥’은 대둔사의 위상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불교계를 중흥시킬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둔사지』는 사찰의 과거사 정립과 함께 그 위상의 선양과 불교계의 중흥을 모색하는데 훌륭한 매체였던 것이다. 『천불조성록(千佛造成錄)』18과 완호 윤우 천불 조성과 『대둔사지』 편찬은 우연이라기보다 대흥사가 선교의 종원임을 표방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본다. 19 즉 천불은 종원 표방을 통해 대흥사의 위상을 드높이는 상징적 의미로써 조성되었다고 보이며, 게다가 232+768의 기적을 보임으로써 일련의 종원운동이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은 극적 효과를 냈다. 『천불조성록』에는 모두 1,006불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고 그 아래에 시주자 명단이 적혀 있는데, 1817년을 전후하여 천불 조성을 위해 시주한 승려들과 재가자들 1 천여 명의 이름과 시주하는 이유를 적고 있다. 『천불조성록』의 시주자 명단에 기재된 사찰수는 경기도 4개소, 강원도 1개소, 경상도 16개소, 전라도 30개소, 충청도 1개소, 미상 2개소 등 전국 54개 사찰 680명의 승려와 676명의 재가자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전각에 모실 천불을 조성하는데 전국 54 개소 사찰의 승려가 참여했다는 것은 그 규모로 보나 여러 가지 면에서 특기할 만하다. 당시 대둔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완호 대사의 역할을 특기할 필요가 있겠다. 완호 대사 윤우(1758~1826)는 19세기 초반 대둔사의 ‘종원’ 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큰 업적은 대둔사의 중창과 『대둔사지』의 편찬, 그리고 천불의 조성 등이었다. 완호 대사는 연담 유일의 제자이면서 초의 의순과 아암 혜장의 스승이다. 유일은 18세기 후반에 화엄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쳤고, 의순은 백파 긍선과의 선 논쟁으로 유명했으며, 혜장은 다산 정약용과의 교류로 이름났었다. 윤우는 그야말로 대흥사 최전성기였던 18세기와 19세기의 교량 역할을 했던 승려였다. 그는 대흥사 중창을 위해 온 생애를 헌신했다. 이처럼 대둔사가 이러한 종원 운동의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1811년 큰 화재를 맞았지만,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더 크게 중수할 수 있었다. 천불전과 천불의 조성에 그런 사정이 잘 담겨 있다. 이런 대흥사의 높아진 위상은 그 후 1899년 북원(北院)의 화재 때에도 잘 나타났다. 『각사찰화재위래문록(各寺刹火災慰來問錄)』은 취운 혜오(翠雲慧悟)가 1899년에 기록한 것이다.20) 이 목록에는 1899년 10월 14일 유시(酉時)에 화재가 나서 대흥사 서상실(西上室) 등 북원의 전각들이 모두 불탔고, 이에 여러 인근 사찰에서 위문을 보내왔는데 그 목록을 적은 기록이다. 불탄 전각은 대웅보전․첨성각․당사고․팔상전․명부전․철경루․나한전․세진당․대양문․침계루․청운당․백운당․서상실․관음전․칠성전․조사전․달마전․수륙전이고, 위문을 보내온 사찰은 영암 미황사, 순천 송광사, 장흥 보림사, 구례 화엄사, 남원 천은사, 여수 흥국사, 순천 선암사, 곡성 태안사, 남평 불회사, 진도 쌍계사, 강진 수인사․만덕사․정수사, 완도 관음사 등 14개 사찰이었다. 대둔사의 위상이 여전했음을 가늠해 볼 만한 위문 목록이었다. 「조선표객도(朝鮮漂客圖)」 풍계 대사와 천불의 표류에 관해서는 「조선표객도」21)란 그림도 남아있어 표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우키다 잇케이[浮田一蕙]가 1818년 1월 나가사키의 쓰시마번저에서 조선에서 표류한 승려 일행을 만나 필담을 나눈 기억을 되살려 20년 후인 1838년 11월에 무가무불가정(無可無不可亭) 주인을 위해 그려준 그림이다. 오른쪽 하단에 화가가 쓴 글[題記]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정 원년 무인년(1818) 봄 정월에 장기(長崎)를 여행하다가 대마도 관사에서 조선 표류객을 보았는데, (이들은) 전라도 대둔사의 승려 17인이었고 나머지는 뱃사공들이었다. (그중에) 두세 명이 대략 문자를 알아서 붓으로 혀를 대신하여(=필담으로) 서로 마음을 소통하였다. 지금 천보 9년 무술년(1838) 겨울 11월에 무가무불가정(無可無不可亭)을 지나다 화로에 둘러앉아 지난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주인이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하기에 그림을 완성하고 표류 승려 아무개의 필적 한 장을 덧붙여 준다. 가위.”22) 그와 필담을 나눈 승려 2~3인은 인봉 증사(仁峰證師)와 풍계 대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추측컨대 제단 앞에 독경하는 승려가 인봉 증사이고, 붓을 든 승려가 풍계 대사이며, 오른쪽에 있는 승려가 상좌 인담(印潭)일 것으로 본다.23) 바로 옆면에는 조선 표객 승려가 준 시 두 수와 짧은 편지를 나란히 적었다. 17세기 중반 조선 승려의 일본 체험담과 쌍계사의 십육나한상 풍계 대사의 표류와 유사한 부처의 기적이 그 전에도 또 있었다. 『곡운집(谷雲集)』에 전하는 법성(法性) 스님의 일본 표류와 쌍계사의 십육나한상에 얽힌 이야기이다. 『곡운집』에 전하는 「법성전」은 17세기 중반 조선 승려의 표류담을 곡운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듣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24) 법성이 일본으로 표류하게 된 연원은 쌍계사 십육나한상의 조성과 관련된다. 법성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쌍계사에 16나한상을 봉안하기 위해 갑오년(1654) 봄에 경주로 가 옥석을 구해 십육나한상을 깎아 조성하였다. 그리고 십육나한상을 남해 바다와 섬진강을 거쳐 쌍계사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해 5월, 법성 스님이 십육나한상을 배에 싣고 운반하던 중 부산 근해에 이르렀을 때 남풍을 만나 표류하다 일본 근해에 표착하였다. 법성 스님은 일본에서 2년 동안 체류한 후 많은 선물과 함께 조선으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법성 역시 표류민이었지만 부처를 모시고 있는 승려 신분이었기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았다. 왜경(倭京)에서 돌아온 후 법성 일행은 즉시 배를 돌려 조선으로 돌아오고자 했으나 풍세가 좋지 않고 또 왜인들이 만류해서 24개월을 그곳에서 머물렀고 승려로서도 활동하였다. 풍계의 경우처럼 일본은 조선 표류민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법성 스님 역시 불교와 승려를 숭상하는 일본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졌다. 십육나한상은 1656년 가을에 쌍계사에 무사히 안치하였다. 현재 쌍계사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상과 십육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십육나한상은 옥석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목조불이다. 따라서 일본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옥석불인 십육나한상은 1656년 쌍계사에 봉안되었다가 이후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품은 어디로 갔을까? 1) 『대둔사지』의 편찬시기는 1814년에서 1818년 사이로 추정한다. 본 사지는 대둔사의 완호 윤우(玩虎尹佑)와 만덕사의 아암 혜장(兒菴惠藏)을 중심으로 그 제자들인 수룡 색성(袖龍賾性), 초의 의순(草衣意洵), 기어 자홍(騎魚慈弘), 호의 시오(縞衣始悟) 등이 참여하여 완성하였다. 이 글에서는 동국대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사업단이 편한 『역주 대둔사지』(『寺誌資料集』8, 2021. 10, 동국대 출판부)를 참고하였다. 2) 강소연,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부처님 - 봉원사 삼천불전과 「비로자나삼천불도」」(『월간불광』, 불광출판사, 2014.02.11.) 3) 이종수, 「해남 대흥사의 천불 조성과 그 시주자들」(『강좌미술사』43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4. 12), 105쪽. 4) 吳京厚, 「朝鮮後期 『大芚寺志』의 編纂」(『韓國思想史學』제19집, 2002.), 361쪽. 5) 이 부분에 대하여는 梵海 覺岸(1820~1896)이 쓴 「千佛造成略記」나 「玩虎講師傳」, 艸衣 意恂이 쓴 「重造成千佛記」등을 간추려 재정리하였다. 『韓國佛敎全書』 제10책 조선시대편 4(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11) 참조. 6) 완도향교 소장의 『가리포첨사선생안(加里浦鎭僉使先生案)』에 따르면, 당시 첨사는 안대진(安大進, 1795~ ?)이었다. 그는 內禁衛將으로 있다가 1800년 12월에 가리포첨사직을 제수받아 1811년 정월에 도임하였다. 임기 만료로 1813년 8월 체직되었다. 7) 집단으로 만드는 전통에 대하여는 허형욱, 「조선 후기 조각승 端應의 造像 活動과 性格에 관한 고찰」(『동악미술사학』32, 2022); 안귀숙, 「朝鮮後期 佛畫僧의 系譜와 義謙比丘에 관한 硏究」(上)(『미술사연구』. 1994-12(8):63-136, 미술사연구회) 참조. 여러 지역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종종 있었다. 조선 후기 조각승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불상을 만들었고, 각 분야의 승장들은 대체로 지역별로 함께 모여 공동으로 불사를 하였으며, 그중 명장으로 이름난 승장은 타 지역에도 초빙되었다. 8) 풍계 대사 일행의 표류 사정에 관해서는 풍계 현정/김상현 옮김, 『일본표해록』(한글본 『한국불교전서』 조선 4,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6.)과 관련 논문들을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9) 서혜은, 「조선후기 풍계 현정의 천불조성과 표류 기록」(『해양문화연구』제6집,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2011. 11), 51쪽 참조. 10) 『일본표해록』, 69쪽. 11) 『梅屋書匭』중 「答縞衣禪子」.《매옥서궤》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다산의 친필서간첩이다. 이 편지에 대해서는 정민, 「다산이 호의에게 보낸 편지첩 《매옥서궤》」(『다산의 재발견』, Humanist, 2011. 8.)과 같은 책 중 「대흥사 천불전 부처의 일본 표류와 〈조선표객도〉」 참조. 12) 「與玩虎」. 이 편지는 현재 이천 월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민의 같은 책, 321~327쪽 참조. 13) 가피력이란 간절히 원하면 이루게 해주는 불보살의 위신력을 뜻하며,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지혜 복덕으로 지켜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4) 고석규, 『남도의 섬과 바다 이야기』(민속원, 2021. 3.), 211쪽. 15) 정민, 「다산 逸文을 통해 본 승려와의 교유와 강학」(『韓國漢文學硏究』第50輯, 2012. 12), 109쪽. 16) 하우봉, 「19세기 전반 대둔사 승려의 일본 표류와 일본인식-楓溪賢正의 日本漂海錄을 중심으로」(『韓日關係史硏究』제48, 2014. 8), 144쪽. 17) 이종수, 앞 글; 오경후, 앞 글; 김용태, 「大芚寺의 ‘宗院’ 표명과 그 불교사적 의미」(『구산논집』 제11집, 2006) 참조. 18) 최근에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ABC) 사업단’이 전남 담양 용흥사에서 발견한 이 자료는 表題에 ‘千佛造成錄’(裏題는 ‘千佛新造成同參祝願錄’)이라 되어 있는 문헌으로, 천불 조성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 이종수, 앞 글, 112쪽 참조. 20) 이종수, 「응송 박영희 소장 불교문헌의 종류와 가치」(『불교학보』68, 2014. 7.), 308쪽. 『각사찰화재위래문록(各寺刹火災慰來問錄)은 광무 3년(1899) 10월 14일 대흥사에서 난 화재에 부조를 보내온 사찰들을 기록한 문건으로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21) 재일학자 이원식 교수가 1996년 교토의 고서점에서 구입한 것인데, 일본 화가 우키다 잇케이(浮田一蕙)가 그린 그림 한 폭과 그 옆에 표객(漂客)이 준 글이 함께 실려 있다. 지금은 한림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게재를 허락해 준 데 감사드린다. 22) 원문 : 文政元年戊寅春正月 客遊長崎 見朝鮮漂客于對馬邸 盖全羅道大芚寺僧十有七人 餘皆舟子輩也 僧兩三人 略解文字 因以筆代舌 互通心情焉 今玆天保九年戊戌冬十一月 過無可無不可亭 圍爐談及舊事 主人徵其圖 圖成附漂僧某筆跡一紙以贈之 可爲 23) 하우봉, 앞 글, 146~148쪽 참조. 24) 이 부분은 남미혜, 「 (2007) 17세기 중엽 조선 승려의 이국 체험 -『谷雲集』소재의 표류기를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28, 동양고전학회)를 참조하여 작성.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