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635년 동짓달,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가 죽자 청나라에서 조문 사절을 보냈다.
조정에선 청나라를 오랑캐라 업신여기며 사신을 천막 숙소로 안내했다.
엄동설한에 머나먼 나라에서 온 사절을 박대하자 그들은 그길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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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4월, 홍타이지(청나라 2대 황제)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장대하게 거행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엎드려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데
인조가 보낸 사신 두사람만 뻣뻣하게 서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조선은 중국의 명(明) 황제에게만 무릎을 꿇지
오랑캐 청(淸)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슨 배짱인가?
이런 허세를 부리려면 청과 직접 대적할 독자적인 힘이 있든가,
동맹인 명이 강력한 힘으로 조선을 보호해줘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도 조선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미운털만 박힌 것이다.
중국에서 이미 명나라는 바람 앞의 촛불이요,
청은 산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압도적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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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을 크게 구긴 홍타이지가 눈감아줄 리가 있나.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물밀듯이 내려왔다.
병자호란이 온 나라를 덮쳤다.
이런 와중에 영월 토호 우 대감 댁 뒤꼍에서
나무꾼 바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우 대감 며느리가
쟁반에 감주 한사발과 찐 고구마를 들고 와
“이것 좀 들고 하세요” 했다.
바우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사람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가?
바우는 멍하니 부엌 쪽으로 걸어가는
선녀의 뒤태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짧은 가을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데도
손질해야 할 나뭇더미가 한참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초롱을 걸어놓고
후다닥 마무리해버리고 돈을 받아 갈 일인데
“행랑방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마저 하게” 하는
대감 말씀을 따른 것은 선녀를 한번 더 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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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모가 들고 온 저녁을 먹고 자려는데 우 대감이 불러 사랑방으로 갔다.
개다리소반에 술상을 차려놓고 술잔을 권했다.
“나으리 어쩐 일이십니까요?”
바우가 꿇어앉아 술잔을 받았다.
우 대감이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침내 바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약정서에 지장을 찍었다.
돈 천냥을 받고 우 대감 아들 대신 군대에 가기로 약조한 것이다.
바우는 우 대감이 따라주는 청주를 받아 마시고 천냥이 든 전대를 허리에 찼다.
한평생 나무꾼 일을 해봐야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천냥이라니!
뒷간에 들렀다가 행랑으로 돌아가는데 부엌에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바우는 부엌으로 다가가 부엌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이럴 수가! 선녀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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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도끼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우 대감과 현청에 가서 조선군에 입대했다.
단, 사흘 훈련을 받고
나라님 인조를 구하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조선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십리 밖 청군 말발굽 소리에 혼비백산 도망치기 바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결국 푸른 죄수복을 입고 나가 홍타이지에게 세번 절하고
피를 철철 흘리며
아홉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삼전도 굴욕’ 끝에
목숨을 건지고 불바다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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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와해하고 어영부영 따라다니던 바우도 영월로 돌아갔다.
맨 먼저 우 대감 댁을 찾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우 대감이 죽어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선녀 며느리는 청군에 잡혀갔다는 것이다.
삼십줄에 접어든 청군 장교는 청나라 선양으로 돌아가며
전리품으로 우 대감 며느리, 선녀를 데려가 첩으로 삼았다.
청이나 조선이나 첩은 싫어지면 버리는 법이다.
청군 장교는 선녀를 유곽에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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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는 도망쳐 조선으로 돌아가려던 실낱같은 희망도 버렸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화냥년으로 낙인찍혀 시집도 못 가고 친정에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목을 매려다 실패하고 유곽 포주에게 매질당해
온몸이 멍투성이가 돼 인신매매장에 팔려가게 됐다.
매매장에선 옷을 홀랑 벗겨서 상품을 선보였다.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곧바로 거래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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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주인이 선녀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선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그 나무꾼, 바우였다.
여관에 들어가 깨끗이 몸을 씻고 장터 옷가게에서 새 옷을 사 입었다.
바우와 선녀는 울며 웃으며 지나온 얘기로 밤새웠다.
두사람은 걸어서 위해까지 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내렸다.
그들은 고향 영월에 가지 않고 제물포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
남은 생 동안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