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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 섬기기를 효도로써 한다는 뜻으로,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함을 이르는 말이다.
事 : 섬길 사(亅/7)
親 : 친할 친(見/9)
以 : 써 이(人/3)
孝 : 효도 효(子/4)
이 성어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한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의 하나이다.
사량부(沙粱部) 출신 아찬(阿湌: 6등급) 무은(武殷)의 아들 귀산(貴山)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의 장수이다. 귀산은 어릴적 친구 추항(箒項)과 함께 602년 진평왕(眞平王) 24년 8월,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할미산성으로 비정되는 아막성(阿莫城)에서 벌어진 백제전에 참여한다.
신라군은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매복하고 있던 백제군의 기습을 받는다. 이때 신라 군대의 후군을 이끌고 오던 귀산(貴山)의 아버지 무은(武殷)이 백제의 복병이 뻗친 갈고리에 걸려 말에서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를 본 귀산(貴山)은 천둥같은 소리로“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거늘 어찌 지금 이 지경을 맞아 달아나겠느냐!”하고 외치며 백제군을 향해 혼신의 힘으로 진격한다.
귀산(貴山)은 적군 수십 명을 베어 넘어뜨리고 아버지 무은(武殷)을 자신의 말에 태워 신라 진영으로 보낸 후에도 친구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분전한다. 이에 신라 군사들이 용기 백배하여 다 함께 공격하니 이윽고 백제 군사들의 시체가 들판을 메우게 된다.
하지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은 온몸에 칼을 맞은 주검으로 발견된다. 두 사람의 시신이 경주에 도착하기 전에 왕이 직접 마중나가 통곡며 맞이하고, 예(禮)를 갖추어 장례지낼 것을 명령한다. 왕은 귀산(貴山)에게 관등 나마(奈麻: 11등급)를, 추항(箒項)에게 대사(大舍: 12등급)를 추증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전투 중에 귀산(貴山)이 부르짖은 스승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바로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귀산(貴山)은 어릴적 친구 추항(箒項)과 함께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 인근 10여리 떨어진 가실사(加悉寺)에 머물고 있던 원광법사(圓光法師)를 찾아가 평생을 두고 지킬 삶의 교훈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이에 응해 원광(圓光)이 내려준 것이 곧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물론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은 평소에도 세속오계를 자신들의 신조로 삼아 빈틈없이 살았고, 이윽고 아막성(阿莫城) 전투에서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실천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결과 세속오계는 점차 신라 모든 젊은이들의 삶의 신조로 퍼져나갔고, 급기야 신라 사람들의 생활목표로 확립되었다. 신라의 화랑도들은 세속오계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삼국통일을 위해 몸바쳐 싸웠던 것이다.
원광(圓光)은 불교 승려이다. 그런데 왜 원광(圓光)은 사람 살상이 본연의 성격인 전쟁과 관련되는 일에 관여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수(隋)나라 양제(煬帝)에게 고구려 공격군을 일으켜 달라는 내용의 걸사표(乞師表, 청원문)를 지으라는 진평왕(眞平王)의 분부를 받아 들이면서 발설한 그의 말 속에 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없앤다는 것은 승려의 할 짓이 아니나 대왕의 나라 안에서 먹고 사는 처지로 어찌 감히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열반경(涅槃經)이 가르쳐 주는 ‘모든 중생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성질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평등의 정신에 따르자면 군대를 청하는 글은 짓지 않는 것이 승려의 도리에 옳고,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차별의 정신에 따르자면 걸사표(乞師表)를 짓는 것이 옳다. 결국 원광(圓光)은 평등을 존중하면서도 차별을 도외시하지 않는 불교생활을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을 비롯한 신라의 화랑과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생애의 지침으로 준수하였던 것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
신라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이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하며, 뒤에 화랑도의 기본 정신이 되어 화랑도가 발전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世俗五戒(세속오계)
事君以忠(사군이충) : 忠
事親以孝(사친이효) : 孝
交友以信(교우이신) : 信義
臨戰無退(임전무퇴) : 勇猛
殺生有擇(살생유택) : 慈悲
事君以忠(사군이충) : 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는 뜻으로 신라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이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하며, 사군이충(事君以忠)은 그 첫번째 계(戒)이다.
事親以孝(사친이효) : 孝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는 뜻으로 신라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이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하며, 사친이효(事親以孝)는 그 두번째 계(戒)이다.
交友以信(교우이신) : 信義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는 뜻으로 신라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이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하며, 교우이신(交友以信)은 그 세번째 계(戒)이다.
臨戰無退(임전무퇴) : 勇猛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는 뜻으로 신라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이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하며, 임전무퇴(臨戰無退)는 그 네번째 계(戒)이다.
殺生有擇(살생유택) : 慈悲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는 뜻으로 신라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이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하며, 살생유택(殺生有擇)은 그 다섯번째 계(戒)이다.
사친이효(事親以孝)
사친이효(事親以孝)는 세속오계(世俗五戒)의 두 번째 계율로, "부모를 섬김에 효도를 다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부모를 공경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임을 강조하는 덕목입니다. 즉, 부모를 정성스럽게 섬기고 효를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부모를 봉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따르고 가족의 화합을 이루는 것을 포함합니다.
사친이효(事親以孝)는 공자의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유교에서는 효(孝)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논어에서는 부모를 잘 모시고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효의 기본이라 하였으며, 효경에서는 효가 인간이 실천해야 할 첫번째 덕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유교의 효 개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이 단순한 가정 윤리를 넘어 국가 운영의 원칙이 되었으며, 왕과 신하 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처럼 충성과 효를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사친이효(事親以孝)를 실천한 예로 김유신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하며 신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전쟁 중에도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며 효를 다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부모에 대한 깊은 효심으로 유명했습니다.
박제상은 왜에 끌려간 왕자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쳤지만, 끝까지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하면서도 부모를 향한 효심을 끝까지 간직한 인물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친이효(事親以孝)는 부모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 간의 화목을 유지하는 것이 효를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효는 단순히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뜻을 존중하고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대화와 관심, 존중을 통해 부모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이 현대적 효의 실천 방식입니다.
사친이효(事親以孝)는 단순한 부모 봉양이 아니라, 부모를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며 가족의 화합을 이루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라 시대부터 강조된 윤리이자, 현대에도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곧 올바른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이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사친이효(事親以孝)의 의미 심화
사친(事親)은 부모를 섬긴다는 뜻이고, 이효(以孝)는 효도로 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부모를 대할 때 단순한 의무감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경하고 효도해야 한다는 가치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며, 단순한 물질적 보살핌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으로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다.
역사적 배경과 관련 사례
유교(儒敎)에서 강조한 효도 정신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다. "효도란 부모를 단순히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즐겁고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맹자(孟子)의 효도론이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정성을 다해 섬기고, 돌아가신 후에는 예를 다해 모셔야 한다."
역사적 사례로 순임금(舜)은 부모가 그를 미워했지만, 그는 끝까지 부모를 공경하고 섬겼다. 동방삭(東方朔)의 어머니 봉양으로 가난했지만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양하였다. 조선시대의 효자 정문(旌門)으로 조선시대에는 효를 실천한 사람들에게 정려문을 세워 기렸다.
현대적 해석과 응용 가족 관계에서 효도의 의미
부모를 공경하는 태도는 단순히 경제적 지원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님과 자주 연락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진정한 효도이다. 전통적 효는 부모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이었지만, 현대적 효는 부모를 존중하고 독립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부모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와, 부모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어르신을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노인복지 정책 강화, 노인 학대 방지 등이다. 부모님과의 갈등 해결 방법은 세대 차이로 갈등이 생길 수 있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례로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거나, 부모님의 가치관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삼국시대의 효(孝)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효가 크게 강조되었다.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신라 경덕왕은 효행이 두드러진 사람에게 조곡 3백석을 내리고, 집과 전답을 하사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표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눌지왕은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불쌍한 백성들을 돌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해마다 전국 각지의 무의탁 노인들을 불러모아 남당(南堂)뜰에서 거대한 양로 연을 베풀었다. 그때는 눌지왕도 친히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잔치가 끝날 무렵 노인들에게 곡물과 비단을 나이에 따라 분량을 달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고구려의 유리왕은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 없는 노인, 스스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는 노인들에게 생활을 해나가는데 필요로 하는 물자를 하사해 주었다. 또한 고구려의 태조도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 없는 노인, 경제력이 없는 노인에게 의식을 지급하였다.
백제의 비류왕도 불우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빈 정책을 실시했음을 '문헌비고'가 상세히 전하고 있다. 또한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처음에는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고 불릴 정도로 효행이 매우 높았다.
신라는 통일 이후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하였는데 8세기 경덕왕 때에는 이를 태학감으로 개칭하면서 교과 내용을 3과로 나누어 구성하였고, 그중 효사상의 중심 경전인 '효경'을 3과의 공통 필수과목으로 채택함으로써 그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가족제도는 전통적인 조상 숭배신앙으로부터 발전한 가족윤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효사상에 대한 지식이 효윤리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평왕대의 고승 원광(圓光)은 평생을 지킬 가르침을 구하는 두 젊은이 귀산(貴山)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 그것인데 여기서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효선편(孝善篇)에는 다섯개의 효선 미담(眞定師, 大城, 向德, 遜順, 貧女)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효행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가지 효에 관한 미담은 다음과 같다.
진정사 효선쌍미(孝善雙美)
범사 진정은 신라사람이다. 출가전 군대에 예속되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했다. 군대 복역의 여가에는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오직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어느 날 중이 문간에 와서 절을 지을 쇠붙이를 구하므로 어머니가 솥을 시주했는데, 이윽고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하고 또한 아들의 생각이 어떤가를 살피니, 진정이 기쁜 안색을 나타내며 말했다. "불사에 시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이 없더라도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이에 와분을 솥으로 삼아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을 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시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어머니께 고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 깎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을 만나기 어려운데 인생은 너무나 빠르다. 내가 죽은 뒤에 출가하면 늦어지니 머뭇거리지 말고 속히 가거라. 내가 너의 출가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필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므로 네가 내 곁에서 아무리 잘 봉양한다 해도 어찌 그것이 효라고 하겠느냐. 네가 참으로 효도하려거든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어서 떠나도록 하라."
진정은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옆에 있을 뿐이 온데 어찌 버리고 출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어머니는 "아! 나를 위하여 출가를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삼뢰칠정(三牢七鼎)으로 나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가히 효도가 되겠느냐. 나는 의식을 남의 문간에서 얻더라도 또한 가히 천수를 누릴 것이니, 꼭 내게 효도를 하고자 한다면 네 말을 말라"고 하였다.
진정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즉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털어 보니 쌀 일곱 되가 있었다. 그날 이 쌀로 밥을 짓고서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두려우니, 마땅히 내 눈앞에서 그 한되 밥을 먹고 엿되 밥은 싸 가지고 빨리 떠나거라." 진정은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함이 그 또한 자식된 자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며칠동안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떠난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하였으나 어머니는 세 번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길을 떠나 밤낮으로 3일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 깎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했다. 3년후 어머니의 부고가 오자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가 7일만에 일어났다.
대성 효2세 부모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는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과 같았으므로 대성(大城)이라 했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얻어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이때 개사(開士) 점개(漸開)가 육륜회를 흥륜사에서 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가서 보시(布施)할 것을 권하니 복안은 베 50필을 보시하므로 점개는 주문을 읽어 축원했다. "단월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지켜 주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안락하고 수명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뛰어 들어가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숙선(宿善)이 없어 지금까지 곤궁한 것이니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를 도모하면 어떻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므로 이에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성은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안에 태어날 것이다." 집사람들이 모두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과연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을 꼭지고 있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 두 글자를 새긴 금간자가 있었으므로 다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그 어머니를 집에 모셔와서 함께 봉양하였다.
이미 장성하자 사냥하기를 좋아하더니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밑에서 잤다. 꿈에 곰이 변하여 귀신이 되어 시비를 걸어 말했다. "네 어찌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 달라고 청하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느냐"라고 말했다. 대성은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꿈을 깨자 땀이 자리를 적셨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는 곰을 위해서 장수사를 세웠다.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 받은 바 있어 자비의 원이 더욱 더해 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우고, 신림, 표훈 두 선사(禪師)를 청하여 각각 살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하여 부모의 양육한 공을 갚았으나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옛적에도 또한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착한 보시의 영향을 가히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드는데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향령(香嶺)이라고 했다.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기공(技工)이 동도(東都)의 여러 절 가운데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손순 매아(埋兒)
손순은 모량리 사람이니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 드려야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 하였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 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 나왔으니 전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 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그 종을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빈녀(貧女) 양모(養母)
효종랑이 남산 포석정에서 놀고자 하자 문객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어머니를 껴안고 통곡하므로 같은 마을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서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 다가 살리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곡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해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싸가지고 집에 와서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몹시 거친 음식)를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쌀밥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의 봉양만을 하고 부모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지 못함을 탄식하여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경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다. 낭의 부모 또한 옷 한벌을 보냈으며, 수많은 낭의 무리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때 진성왕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또 군사를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다.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
효녀 지은
효녀 지은은 신라 한기부 백성 연권(連權)의 딸인데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그 어머니를 봉양하여 나이 32세가 되었으되 시집을 가지 않고 혼전 신성하여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며 봉양할 것이 없으면 품팔이도 하고 혹 나가서 밥을 빌어다 먹이기도 하였다. 그러기를 오래 하자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여 부잣집을 찾아가 종으로 팔리기를 자원하여 쌀 10여석을 얻어 두고 종일토록 그 집에서 일하다가 저녁이면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하여 삼사일을 지났다.
그 어머니가 딸더러 이르기를 "지난날에는 밥을 먹어도 달았는데 요즘은 밥은 좋으나 맛이 전만 못하고 마치 칼로 심장을 에는 것 같으니 이것이 무슨 심사냐" 하니 딸이 실정을 말하였다. 그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으니 내가 빨리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이내 소리를 놓아 크게 우니 딸도 따라 울어 슬픔이 길가는 나그네를 감동케 하였다.
그때 효종랑이 구경 나왔다가 보고 돌아가 부모님께 청하여 조 백석과 의복 등속을 실어 보내주고 또 매주(買主)에게 변상하여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게 하였다. 낭도 수천 명이 각기 조 한 섬씩을 내어 보내니 진성왕이 듣고 벼 5백석과 집 한 채를 주고 호세와 출역을 없애며 곡식이 많아서 도둑해 가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소속 관원에게 명령하여 병정을 번갈아 보내어 지켜 주게 하고 그 마을에 푯발을 세워 효양방(孝養坊)이라고 하고, 이어 표문을 지어 그의 아름다운 행실은 당나라의 덕화가 미쳤기 때문이라 하였다.
효종랑은 당시 셋째 재상의 서발한 김인경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어릴 때 이름이 화달(化達)이었다. 왕이 생각하기를 나이는 비록 어리나 어른처럼 보인다 하여 곧 왕의 형인 헌강왕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설씨녀
설씨녀는 신라 율리 민가의 여자이다. 비록 외롭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안색이 단정하고 지행이 순결하여 본 사람치고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 그 아버지가 늙은 나이로 군에 편입되어 정곡이란 곳에 수자리 살러 가게 되자 그녀는 늙고 병든 그 아버지를 차마 멀리 이별할 수도 없고 또 여자의 신분이라 모시고 따라 갈 수도 없어 그저 답답히 여기고만 있었다.
사량부에 사는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가난한 집안이지만 교양이 있는 바 곧은 사나이다.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고 있으나 감히 말은 못하더니 설씨가 자기 어른이 종군하는 것을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찾아가 설씨에게 청하기를 "내가 비록 용렬(庸劣)하지만 항상 의기 있는 사람이라 자처해왔다. 못난 이 몸으로 귀댁 아버님의 출역을 대신하고 싶다"라고 하므로 설씨는 대단히 기뻐하며 들어가 아버지께 아뢰었다.
아버지는 들어오라고 하여 보고 말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노인의 역사를 대행한다 하니 기쁘고 송구한 마음을 견딜 수 없는 동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겠다. 만약 그대가 나의 어린 딸을 어리석고 고루하다고 하여 버리지 않을진대 아내로 삼아주고 싶다"고 하였다.
가실은 두 번 절하며 "감히 바랄 수 없으나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하고 바로 물러가 혼기를 청하니 설씨는 "혼인은 사람의 대륜이니 갑자기 할 수는 없습니다. 첩이 이미 마음으로써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함없으리니 낭군이 수자리에 나갔다가 교대하고 돌아온 뒤에 택일하여 성례하더라도 늦지 않소"하고 거울을 반으로 나누어 각기 한 조각씩 가지며 "이것이 신표니 후일에 마땅히 합칠 것이오" 하였다.
가실이 진작 말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에 당하여 설씨더러 이르기를 "이 말은 천하에 없는 양마이니 뒤에 반드시 쓰게 될 것이오. 지금 내가 떠나면 기를 사람이 없으니 여기 두고 길러 뒤에 쓰게 해주시오"하고 작별하고 떠났다.
마침 나라에 사고가 생겨 사람을 교대하지 않으니 아버지는 딸더러 이르기를 "처음에 3년을 기약했는데 지금은 벌써 넘었다. 다른 성씨에게 시집가는 것이 옳겠다"고 하니 설씨는 "그 때 부친을 평안케 하기 위해 굳이 가실과 더불어 언약하였기로 가실이 믿고 여러 해를 종군하여 기한과 노고를 견디며 하물며 적의 경계에 가까이 있어 손에 무기를 놓지 못하며, 호랑이 입에 접근하여 노상 씹힐까 걱정하고 있는 처지인데 신의를 버리고 식언을 한다면 어찌 인정이라 하오리까"하고 "끝내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으니 다시 말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늙은 그 아버지가 그 딸이 장성한 몸으로 남편이 없다 하여 강제로 출가시킬 양으로 몰래 마을 사람과 약혼하고 날짜까지 정하여 그 상대자를 데려오니 설씨는 굳이 항거하여 비밀히 도망가려 하다가 못 가고 마구간에 들러 가실의 남겨둔 말을 보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가실이 교대하고 돌아왔는데 얼굴이 바짝 마르고 의복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이 몰라보고 딴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바로 앞에 나와 파경을 던져 주니 설씨는 받아 들고 흐느끼며 아버지 및 집안 사람이 매우 기뻐하여 드디어 다른 날에 회합할 것을 언약하여 마침내 함께 해로하게 되었다.
▶️ 事(일 사)는 ❶상형문자로 亊(사), 叓(사)는 고자(古字)이다. 事(사)는 깃발을 단 깃대를 손으로 세우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역사의 기록을 일삼아 간다는 데서 일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事자는 ‘일’이나 ‘직업’, ‘사업’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이 등장했던 시기 使(부릴 사)자와 史(역사 사)자, 事(일 사)자, 吏(관리 리)자는 모두 같은 글자였다. 事자는 그중에서도 정부 관료인 ‘사관’을 뜻했다. 사관은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事자는 제를 지내고 점을 치는 주술 도구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졌다. 후에 글자가 분화되면서 事자는 ‘일’이나 ‘직업’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정의하기로는 史자는 ‘일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吏자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事자는 ‘직책’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事(사)는 일이나 볼일 따위를 이르는 말(~를, ~을 다음에 쓰이어)이나 또는 일의 뜻을 나타냄의 뜻으로 ①일 ②직업(職業) ③재능(才能) ④공업(工業), 사업(事業) ⑤관직(官職), 벼슬 ⑥국가(國家) 대사(大事) ⑦경치(景致), 흥치(興致) ⑧변고(變故), 사고(事故) ⑨벌(옷을 세는 단위) ⑩섬기다 ⑪부리다, 일을 시키다 ⑫일삼다, 종사하다 ⑬글을 배우다 ⑭힘쓰다, 노력하다 ⑮다스리다 ⑯시집가다, 출가하다 ⑰꽂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事實), 뜻밖에 일어난 사고를 사건(事件),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사태(事態)평시에 있지 아니하는 뜻밖의 사건을 사고(事故),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사정(事情), 모든 일과 물건의 총칭을 사물(事物), 일의 전례나 일의 실례를 사례(事例), 일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운영되는 지속적인 활동이나 일을 사업(事業), 일의 항목 또는 사물을 나눈 조항을 사항(事項),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일의 안건을 사안(事案), 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 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 또는 온갖 사건을 사사건건(事事件件), 사실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무근(事實無根), 사태가 급하면 좋은 계책이 생김을 사급계생(事急計生), 일정한 주견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 사람을 붙좇아 섬기면서 의지하려는 사상을 사대사상(事大思想), 자주성이 없어 세력이 강대한 자에게 붙어서 자기의 존립을 유지하는 경향을 사대주의(事大主義) 등에 쓰인다.
▶️ 親(친할 친)은 ❶형성문자로 亲(친)은 간자(簡字), 媇(친)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볼 견(見;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亲(친; 많은 나무가 포개어 놓여 있다는 의미)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나무처럼 많은 자식들을 부모가 보살핀다(見)는 뜻이 합(合)하여 친하다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親자는 ‘친하다’나 ‘가깝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親자는 立(설 립)자와 木(나무 목)자, 見(볼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서는 辛(매울 신)자와 見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辛자는 노예의 몸에 문신을 새기던 도구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신→친’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親자는 감정적인 관계가 매우 ‘친밀하다’라는 것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親자에 쓰인 見자는 눈앞에 보이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親(친)은 ①친(親)하다 ②가깝다 ③사랑하다 ④가까이하다 ⑤사이 좋다 ⑥손에 익다 ⑦숙달되다 ⑧어버이 ⑨친척 ⑩혼인 ⑪신부(新婦), 새색시 ⑫몸소, 친히(親-)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성길 소(疎)이다. 용례로는 친밀하게 사귀는 교분을 친교(親交), 가깝고 친한 정분을 친분(親分), 친한 벗이나 가까운 친구를 친우(親友), 정성스럽고 정답거나 또는 그러한 태도를 친절(親切), 서로 친하고 사이가 좋음을 친선(親善), 친아들을 친자(親子), 서로 친해 화합함을 친화(親和), 썩 친하여 사이가 버성기지 않음을 친밀(親密), 시집간 여자의 본집을 친정(親庭),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친애(親愛), 촌수가 가까운 겨레붙이를 친족(親族), 친히 글씨를 씀을 친서(親書), 늘 사귀어 사이가 가까움을 친숙(親熟), 서로 친하여 화목함을 친목(親睦),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지(親知),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을 친구(親舊), 정분이 친하고 가까움을 친근(親近), 남에게 대하여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친(家親), 엄하게 길러 주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자기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을 엄친(嚴親), 인자한 애정으로 길러주는 어버이의 뜻으로 남에게 대해 자기 어머니를 일컫는 말을 자친(慈親), 자기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남에게 대하여 일컫는 말을 선친(先親), 아주 친근함을 절친(切親), 어버이를 섬김을 사친(事親), 서로 의좋게 지내는 정분 또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다툼 없이 가까이 지냄을 화친(和親), 어버이에게 효도함을 효친(孝親), 촌수가 가까운 일가를 근친(近親), 길러 준 어버이 부모를 모시어 섬김을 양친(養親), 더할 수 없이 지극히 친함을 지친(至親), 옛 친구를 고친(故親), 어버이를 사랑하고 공경함을 애친(愛親), 계부 또는 계모를 계친(繼親), 부부의 의가 좋은 것은 중매에 의함이 아님을 친불인매(親不因媒), 가까운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원수를 통쾌하게 한다는 뜻으로 자기편을 해롭게 하고 적을 이롭게 하는 일을 친통구쾌(親痛仇快), 촌수가 가까운 일가끼리 간음하는 일을 근친상간(近親相姦),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등불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가을 밤은 시원하고 상쾌하므로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 읽기에 좋음을 이르는 말을 등화가친(燈火可親), 물고기와 물처럼 친한 사이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의 친밀한 사이 또는 서로 사랑하는 부부 사이를 어수지친(魚水之親), 아주 가까운 일가 친척을 이르는 말을 강근지친(强近之親), 큰 의리를 위해서는 혈육의 친함도 저버린다는 뜻으로 큰 의리를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의를 버림을 대의멸친(大義滅親), 뼈와 살을 같이 나눈 사이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친족이란 뜻으로 부자와 형제 또는 그와 가까운 혈족을 지칭하는 말을 골육지친(骨肉之親) 등에 쓰인다.
▶️ 以(써 이)는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이 연장을 사용하여 밭을 갈 수 있다는 데서 ~로써, 까닭을 뜻한다. 상형문자일 경우는 쟁기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❷회의문자로 以자는 ‘~로써’나 ‘~에 따라’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以자는 人(사람 인)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以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수저와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밭을 가는 도구이거나 또는 탯줄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무엇을 그렸던 것인지의 유래와는 관계없이 ‘~로써’나 ‘~에 따라’, ‘~부터’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以(이)는 ①~써, ~로, ~를 가지고, ~를 근거(根據)로 ②~에 따라, ~에 의해서, ~대로 ③~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④~부터 ⑤~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⑥~을 ~로 하다 ⑦~에게 ~을 주다 ⑧~라 여기다 ⑨말다 ⑩거느리다 ⑪닮다 ⑫이유(理由), 까닭 ⑬시간, 장소, 방향, 수량의 한계(限界)를 나타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위치나 차례로 보아 어느 기준보다 위를 이상(以上), 오래 전이나 그 전을 이전(以前),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그 뒤로나 그러한 뒤로를 이래(以來), 어떤 범위 밖을 이외(以外), 일정한 범위의 안을 이내(以內), 어떤 한계로부터의 남쪽을 이남(以南), 어떤 한계로부터 동쪽을 이동(以東), ~이어야 또는 ~이야를 이사(以沙), 그 동안이나 이전을 이왕(以往), 까닭으로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나 조건을 소이(所以), ~으로 또는 ~으로써를 을이(乙以), 어떠한 목적으로나 어찌할 소용으로를 조이(條以), ~할 양으로나 ~모양으로를 양이(樣以), 편안한 군대로 지친 적군을 침을 이일적로(以逸敵勞),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보충함을 이존보망(以存補亡), 이것이나 저것이나를 이차이피(以此以彼), 횡포한 사람으로 횡포한 사람을 바꾼다는 뜻으로 바꾸기 전의 사람과 바꾼 뒤의 사람이 꼭 같이 횡포함을 이포역포(以暴易暴), 속담 새우 미끼로 잉어를 낚는다로 적은 밑천으로 큰 이득을 얻는다는 뜻의 이하조리(以鰕釣鯉),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댄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기만하고 권세를 휘두름을 이르는 이록위마(以鹿爲馬) 등에 쓰인다.
▶️ 孝(효도 효)는 ❶회의문자로 耂(로; 노인)와 子(자; 아들)의 합자(合字)이다. 아들이 노인을 잘 봉양하는 뜻에서 부모나 조상을 잘 섬김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孝자는 ‘효도’나 ‘부모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孝자는 耂(늙을 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子자가 耂자 아래에 있으니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아들이 노인을 등에 업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孝자를 보면 백발이 성한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노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른을 모시고 함께하는 것이 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는 글자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孝(효)는 (1)부모를 잘 섬기는 일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효도(孝道) ②상복(喪服: 상중에 있는 상제나 복인이 입는 예복) ③제사(祭祀) ④맏, 맏자식 ⑤부모를 섬기다, 효도하다 ⑥본받다 ⑦상복(喪服)을 입다, 거상(居喪)하다 ⑧제사(祭祀) 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효성이 지극한 딸을 효녀(孝女), 부모를 잘 섬기는 마음을 효덕(孝德), 효행이 있는 며느리를 효부(孝婦), 효행이 있는 손자를 효손(孝孫), 효성스러운 마음을 효심(孝心),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효우(孝友), 효행을 다하는 마음을 효지(孝志),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함을 효경(孝敬),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효도를 효은(孝恩), 어버이를 잘 섬기는 행실을 효행(孝行),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를 효도(孝道), 마음껏 어버이를 잘 섬기는 정성을 효성(孝誠), 효행이 있고 유순함을 효순(孝順), 어버이를 효행으로 봉양함을 효양(孝養), 어버이에게 효도함을 효친(孝親), 봉양할 줄 아는 새라는 뜻으로 까마귀를 달리 일컫는 말 효조(孝鳥),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못함을 불효(不孝),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충효(忠孝), 어버이를 잘 섬김을 극효(克孝), 한결같고 변함없는 효도를 달효(達孝), 지극한 효도 또는 지극한 효자를 대효(大孝), 순종하여 효성을 다함을 순효(順孝),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는 효도를 영효(榮孝), 어버이의 애정과 자식의 효도를 자효(慈孝), 지극하고 돈후한 효행을 독효(篤孝), 부모를 섬길 때에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야 함을 효당갈력(孝當竭力),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효자애일(孝子愛日), 효자가 난 가문을 효자지문(孝子之門),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형제끼리의 우애와 임금에 대한 충성과 벗 사이의 믿음을 통틀어 이르는 효제충신(孝悌忠信),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성이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봉양함을 반포지효(反哺之孝),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부자자효(父慈子孝), 효자가 죽은 부모를 너무 슬피 사모하여 병이 나고 혹은 죽음을 이효상효(以孝傷孝)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