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46/0919]낯선 메가시티mega city를 걷다
서울이다. 인구 1천만명이 넘는 메가시티mega city, 전세계에 32개의 도시가 있다던가. 참말로 사람도 많고, 고층빌딩도 많고, 차도 많다. 불과 1년 좀 넘었는데, 이 도시풍경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시골의 고적함에 익숙해져서일까? 이 속에 아내도, 아들부부도, 손자도 산다.
여의도환승센터에서 내려 여의도역까지 걸었다. 하늘은 한없이 드높고 뭉게구름들이 향연饗宴을 펼치고 있다. 완연한 가을이다. 살랑살랑 바람이 감미롭다. 언제 긴 장마가, 강력한 태풍이 있었을까 싶다. 금배지 300명이 모여 국사國事를 논하다는 국회의사당 돔건물이 눈앞에 보인다. 하나같이 똑똑한 사람들이 왜 저곳에만 가면 ‘정신줄’을 놓는 것일까? 한마디로 ‘쯧쯧쯧’이다. 왜들 그렇게 나라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당리당략黨利黨略의 ‘소모‧ 비효율의 전쟁’을 벌이는 걸까? 내용은 자세히 알지 못해도, 한 장관의 아들 군시절 휴가문제가 온나라를 들썩거릴 정도의 빅 이슈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뉴스를 보던 94세 아버지의 촌평이 정답일 듯하다. “왜 저런다냐? 소소한 가정사같은데” 나의 대답은 이렇다. “모르겠어요. 신문을 보면 더 헷갈리던데요. 요즘에는 ‘정치9단’이 없어서 그런가”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실감나는 서울. 남녀노소(노인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행인들 구경은 할만하다.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들의 패션이 현란하다. 저렇게 배꼽을 드러내는 것도, 브라자끈이 드러난 가슴패기도 어지럽지만 보기에 좋네, 땡큐네. 타임머신을 타고온 조선사람처럼 눈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을 하며 걷는 초가을, 서울 하고도 여의도 거리. 가끔씩 잊어먹을 만하면 올라와 걷어볼 일이다. 무엇보다 ‘그놈의’ 마스크 행렬이다. 징그럽다. 쓰지 않으면 주변의 눈치로 한 걸음도 걷기 어렵다니? ‘청정지역’에 사는 만큼 마스크의 생활화가 너무 거리가 먼 지라,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다. 이 노릇을 어찌할 거나? 어린이집의 아이들도 하루종일 마스크를 쓰면 놀고 있다. 5살 손자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창문을 열고 운전하는 젊은 남성을 보며 “할아버지, 저러면 안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걸리는데”하면서 “형인가? 아저씨인가?”하여 웃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세대世代 간격이 아니고 연연年年의 간격이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출구 골목에 눈에 선한 단골식당이 있다. ‘빈대떡 신사’가 그집인데, 우리 서울지역 고교 동문친구들은, 나의 추천으로 한두 번 가본 곳이다. 노포老鋪라고 할 것은 없지만, 주인부부와는 82년부터 친히 알고 지냈으니 어느새 40년이 다 되어간다. 한마디로 허벌나게 들락날락한 곳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임 사장은 고아로 컸다. 광화문에 ‘서린낙지’라는 유명한 식당에서 홀 서빙을 하며 결혼을 해 두 딸(임결, 임솔)을 낳았다. 주인이 ‘성실 그 자체’인 그에게 82년 당시 7000만원을 빌려주었다나, 그냥 주었다나, 독립을 시켰다. 동아일보 옆 서린호텔 근처에 ‘주식회사酒食會社’라는 이름의 작은 선술집을 열었다. 15명이나 도 채 들어가지 못하는 이 선술집은 퇴근 후 우리들의 방앗간이었다. 외상술을 한달만에 정산하면 월급 30만원일 때 15만원 정도 나온 것같다. 해물파전, 계란말이와 막걸리, 아니면 소폭. 우리는 낮에는 입에 불이
나는 매운 낙지와 밤에는 파전에 대폿술로 상징되는 ‘광화문통 직장 초년병’이었다. 그 사장과 그때부터 호형호제 사회친구가 되었다. 유단 고단자인 그의 귀는 얼굴에 바짝 달라붙어 마치 기형아같았다. 종로3가 파고다공원 옆에서 ‘민속주점’을 내더니, 동숭동 대학로에서 ‘칸트’라는 초대형 맥주홀을 내더니, 어느 때보니 대명거리에 ‘빈대떡신사’ 식당을 내었다. 그 친구는 어느새 요식업 컨설턴트가 되었고, 돈도 제법 벌어 식당을 두세 곳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다. 옮길 때마다 찾아다녔지만, 이 집만큼은 퇴근길 일삼아 죽을 치고, 동료들을 불렀다. 이제 그 시절은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2008년 12월 29일 식당을 통째로 빌려 ‘나는 휴머니스트다’ 출판기념회를 했다. 좌석 27개, 네 명씩 앉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108명이었다. 홍탁삼합에 9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천의 목소리’ 권희덕 성우의 축하멘트가 100만불짜리였는데, 56년생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전라도닷컴’ 서울지역 첫 정모(정기독자모임)도 그것에서 열렸다. 우리 고교동문 친구부부 40쌍이 연극관람후 뒤풀이를 하기도 했던 곳이다. 그 이름도 잊을 수 없는 ‘빈대떡신사’에 어제 1시 들러, 사장도 없는데 김치찌개 ‘혼밥’을 먹었다. 아주머니는 경기민요를 제법 멋들어지게 부르는 멋쟁이 사장이 되었고, 내 친구 임사장은 삼선교에서 식당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그 친구는 2015년 장남 결혼때 20만원이나 부주를 했다. 전화로 안부만 묻고 명륜동 안경집으로 향했다.
성대 정문 앞의 ‘성균안경원’. 이곳은 77년부터 이용했으니 거의 ‘50년 단골’이다. 노포老鋪라 할만하다. ‘since 1965’ 주인장은 1933년생. 작년까지 출퇴근한 현역이었으나, 조카에게 바가지를 씌워 팔았다던가. 한 달 임대료가 400만원이니, 이 경기불황에 어찌 버티겠는가. 워낙 낯이 익은 단골인지라 하소연부터 늘어놓는다. 빌딩주가 코로나 이후 100만원을 감해주었다지만, 한 달 300만원을 못낼 때가 많다고 한다. 6만원 받아야하는 안경알을 4만원만 받는다한다. 인연이 깊은 단골은 이래서 좋다. 시절이 좋을 때에는 다달이 얼마씩 학생 장학금으로 기부도 하여, 벽에 내가 써준 글귀의 감사패도 붙여 있다.
서울에 살면서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진짜 꼴불견 풍경이 하나 있었는데, 어제는 한 건도 볼 수 없는 게 차라리 ‘고소한’ 것일까? 쓴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여자친구가 사랑스럽다해도 왜 그렇게 에스컬레이터에서 위아래로 서서 그 잠깐 타는데 ‘주뎅이 박치기(뽀뽀나 키스)’를 해대는지, 보기에 심히 민망했던 적이 무릇 기하였던가? 오죽하면 내 아들과 며느리가 저런 광경을 연출할 수도 있겠다싶어 걱정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에는 그런 광경이 사라졌을 것같다. 마스크를 쓴 채로는 할 수 없을 것이고, 아무리 생각이 굴뚝같아도 마스크를 서로 내린 채 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성性은 좀 은밀해야 '맛'이지 않은가. 이렇게 백주대낮에 장소 불문한 채 드러내놓고 하는 '유사 성행위'의 끝은 어디일까? 심지어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같은 버스를 타는데도 그 새를 못참고 입을 맞춰대는 청춘남녀(바로 우리 아들딸이기도 한)들의 ‘성의식性意識’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몇 번 만나 살도 섞은 마당에 찢어지는 것이 예사이고, 결혼 후 곧장 이혼도 밥 먹듯 하는 이 ‘처참한’ 세태世態가 어찌 트렌드일까? 모를 일이다. 어디 모르는 것이 한두 가지일까? 차라리 눈을 감는 게 편한 일이거늘. 아무튼, 어제는 ‘에스컬레이터 키스 커플’을 한 쌍도 보지 않은 것은 코로나 덕분일 터. 흐흐. 서울은 요지경瑤池鏡, 요지경 속이다.
첫댓글 우리가 아버지세대가 돼버리니 묵은 된장찌개 냄새 풍기는 얘기도 나오네
한마디로 우리도 쉰밥세대인가?
세월의 풍습의 흐름은 아쉽지만
길거리 젊은이들의 뽀뽀쯤이야 웃어넘기는
어른이 됐네
지난주 이십대도 안된 어린년이 내곁에서
담배를 쪽 쪽 잘 빨아대는데ᆢ
내가 먼저 자리를 비껴 드렸네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