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리에서는 카바레하면 춤바람 난 가정주부가 장바구니 들고 춤추러 가는 곳, 그리고 제비들에게 옴빡 당해 가정파탄으로 이어지는 곳쯤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본래는 파리 유흥가에 있는, 술과 더불어 춤 공연이 열리고 술을 마시다 춤도 출 수 있는 술집을 뜻합니다.
카바레의 효시는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뒷골목에서 화가 로돌프 살 리가 1881년에 문을 연 <르 샤 누아르, Le Chat Noir, 검은 고양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층민이 살았던 파리의 몽마르트르 지역은 낮은 집세 덕에 보헤미안 예술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덩달아 선술집 수준의 싸구려 술을 파는 카바레들도 여럿 들어섰습니다.
* 눈내리는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의 지구촌 최고의 극장식당 <물랭루즈>
파리의 중심무대로 진출하지 못한 젊은 무명의 예술가들은 소외된 것에 울분을 토해내며 이곳에서 전위적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이 카바레 문화는 파리의 뒷골목을 넘어 전 유럽으로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독일의 베를린에 정착한 뒤에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았습니다.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시대의 억압적 정치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세기말의 사조 속에서 베를린의 카바레 문화를 꽃피운 일등 공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카바레 문화를 퇴폐 문화로 낙인을 찍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카바레 문화는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카바레 문화는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와 술과 춤이 결합된 이른바 나이트클럽 문화로 모습을 바꾸면서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 몽마르트르의 영원한 보헤미안, 에릭 사티
이 카바레문화가 최초로 꽃피운 몽마르트르 언덕의 술집 <검은 고양이>에 음악가 에릭 사티가 진치고 있었습니다. 사티는 하위문화를 꽃피운 음악가였습니다. 그에게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하위문화의 본거지는 카바레였습니다.
암울한 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살았던 사티는 프랑스 대혁명의 허무한 결말과 자본주의의 탐욕에 절망했습니다.
* 사티의 영원한 연인 쉬잔 발라동이 그린 에릭 사티
사티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의 옹플뢰르의 비교적 부유한 해운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불과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최고의 음악 명문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도식적인 교육 방법에 질려버려 2년 반 만에 학교를 때려치우고 안데르센 동화책을 읽으며 소일했습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결국은 다시 자퇴하고 군에 입대합니다. 당시엔 학교를 뚜렷한 이유 없이 그만두면 입대해야하는 법규가 있었습니다. 군에 들어간 사티는 일부러 알몸인 채로 밤 보초를 섰고 덕분에 기관지염을 얻어 의가사 제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대한 뒤 사티는 가난한 예술가들도 큰돈 없이 살 수 있는 파리 몽마르트르로 갔습니다. 자발적 빈곤을 선택한 그였지만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저녁이면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바레<검은 고양이>의 전속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카바레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사티는 카바레풍의 통속적 노래 작곡에도 나섰습니다. <너를 원해 Je te veux 주 트 브>는 그의 대표적인 카바레풍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르누아르, 드가, 툴루즈 로트레크 등 당시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모델이자 화가였던 쉬잔 발라동과의 짧은 만남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 쉬잔 발라동
이 노래에 등장하는 ‘너’는 사티 일생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쉬잔 발라동입니다. 사티가 스물일곱 살, 발라동이 스물여덟 살 때 타올랐던 이 불꽃같은 사랑에서 사티는 평생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여섯 달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노래 <주 트 브>는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몽마르트르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곧 이어 “몽마르트르의 술집에 가면 기막힌 피아노곡이 연주되고 있다”는 풍문을 확인하러 온 열여덟 살의 모리스 라벨과 사티가 처음 만난 것입니다. 사티의 연주에 매료된 라벨은 곧바로 음악계의 중심무대에 사티를 알리는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1898년 10월 사티는 파리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아르쾌유 교외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루 일과는 단순했습니다.
아래 위 검정 옷에 검정 중절모를 쓰고 매일 먼 거리를 걸어 도착한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작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끔씩 드뷔시의 집을 들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드뷔시의 결혼식에서 증인을 섰을 정도로 드뷔시와 각별히 친했습니다.
* 지금도 성업 중인 몽마르트르 언덕의 술집 <오 라팽 아질, 재빠른 토끼라는 뜻>, 사티 시절 피카소,
모딜리아니, 르누아르, 고흐 등 가난한 예술가들이 진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약을 해야하고 가수
들이 운치 있는 옛날 샹송들을 들려 줍니다.
아! 멋진 곳, 몽마르트르에 가시면 물랭루즈(좀 비쌉니다)와 함께 꼭!!
스스로 빈곤을 선택하고 살아가던 사티는 카바레 음악의 단순성에 차츰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주로 카바레 음악을 편곡하거나 작곡했던 그는 1911년 초 자신의 음악을 “너절한 음악이며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며 자책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음악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에 초현실적인 색채가 가미되기 시작했습니다.
제목들도 요상했습니다. <배(과일) 모양을 한 세 개의 소품>, <바싹 마른 태아>, <여객선의 재즈> 같은 제목을 붙이는가 하면, ‘중병에 걸린듯이’ ‘계란처럼 가볍게’ 같은 악상기호를 넣기도 했습니다.
* 악마의 술, 압생트
사티의 마지막 작품은 1924년에 만든 발레곡 <금일 휴관>이었습니다. 이 곡을 쓰고 한 해가 지난 1925년 1월 지나친 압생트 음주로 인한 간경화로 사티의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는 걸 단화하게 거절했습니다. 1925년 사티는 용감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임종을 지켜본 젊은 작곡가 오베르 카비는 증언했습니다.
사티의 간경화를 악화시킨 주범인 술 압생트는 향쑥, 회향, 아니스 등을 첨가해 만든 초록빌 독주였습니다. 드가, 모딜리아니, 툴루즈 로트레크 등 많은 몽마르트르 예술가들이 애호한 술이었습니다. 이 술은 환각 증세를 일으키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1905년 스위스에서 압생트에 취한 농부가 자기 가족을 살해하는 엽기적인 악마의 술로 불리는 등 악명을 떨쳤습니다. 압생트는 사티의 보헤미안 생활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술이었습니다.
그는 압생트의 초록 요정과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독한 내면에 침잠한 채 언제나 혼자였던 사티는 ‘내 식대로 살다가 내 식대로 죽는다’는 신념으로 용감하고 유쾌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과연 몽마르트르의 진정한 보헤미안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