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수행자와 잘난 수행자
『증일아함』제8권「안반품(安般品)」제9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은 못난 수행자와 잘난 수행자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못난 수행자가 하는 짓을 보면, 잘난 수행자와 분명히 다른 데가 있다. 그는 속으로 남을 헐뜯고 우습게 여기며, 스스로 자기를 뽐낸다. 즉 ‘나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집을 나와 도를 닦는다. 이에 비해 다른 사람은 하천한 집에서 태어나 집을 나와 도를 배운다. 나는 열심히 정진하여 여러 가지 바른 법을 받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삼매를 성취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삼매가 없어 마음이 어지럽다. 나는 지혜가 많은데, 다른 사람은 어리석다. 나는 항상 시주들에게 평상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보시받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렇듯 내 몸은 저들과 다르다…’ 그래서 못난 수행자는 항상 남을 헐뜯고 우습게 여기며, 스스로 자기를 뽐낸다.
그러나 잘난 수행자는 못난 수행자와 다르다. 그는 속으로 남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 겸손해한다. 즉 ‘나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집을 나와 도를 닦는다. 이에 비해 다른 사람은 하천한 집에서 태어나 집을 나와 도를 배운다. 그러나 내 몸은 저들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지금 바른 계율을 가지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삼매를 성취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삼매가 없어 마음이 어지럽다. 그러나 내 몸은 저들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지혜가 많은데, 다른 사람은 어리석다. 나는 항상 시주들에게 평상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보시 받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내 몸은 저들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잘난 수행자는 항상 남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 겸손해한다. 그러므로 당부하노니, 그대들은 못난 수행자가 하는 훌륭하지 못한 짓을 멀리 떠나라. 대신 잘난 수행자가 하는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늘 따라 하고 그와 함께 수행하도록 노력하라.”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깊이에의 강요』라는 소설이 있는데, 촉망받던 여류미술가가 자살한 이유는 엉뚱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전시회를 둘러본, 한 비평가가 이런 글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이 기교는 있는데, 깊이는 없다.’ 그녀는 이 글을 읽고 좌절했다. 강요된 예술적 깊이에 집착하여 폐인이 된 그녀는 결국 자살했다. 그러자 이 비평가는 다음날 신문에 이런 글을 썼다. “그녀의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가. 역시 그녀의 작품에선 삶의 무게가 느껴졌고, 깊이가 있었다. 자살까지 이어진 그녀 삶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가!”
소설이라고 하지만, 허구적이지만은 않다. 사실 여부를 살피지 않고, 왜곡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왜곡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책임을 지지는 않고, 사과로 끝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게 하는 사회가 된다면 더 이상 억울한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증일아함』제9권「참괴품(慙愧品)」제7경에 보면,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어느 날 난타 비구가 환속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부처님은 난타 비구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대는 어찌해서 법의(法衣)를 벗고, 세속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저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불꽃처럼 일어나 견딜 수 없나이다.”
“난타여. 대개 사람들은 주색(酒色)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만족할 줄 모른다. 그 결과 수행을 망치게 된다. 그러나 두 가지를 잘 억제하고 범행을 닦으면 번뇌가 없는 과보를 얻게 되리라. 마치 지붕을 촘촘하게 엮으면 비가 새지 않는 것처럼, 범행을 닦으면 음욕과 성냄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난타 비구는 부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승복하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부처님은 난타 비구를 데리고 원숭이들이 사는 향산(香山)의 바위굴로 갔다.
“이곳의 애꾸눈 원숭이와 너의 아내 손타리와 비교하면 누가 더 아름다운가?”
“저 원숭이는 개에게 코를 물린 사람처럼 못생겨서 손타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천녀(天女)들이 노니는 곳에 갔다. 거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천녀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
“이곳 천녀들과 너의 아내 손타리와 비교하면 누가 더 아름다운가?”
“저 동굴의 애꾸눈 원숭이가 손타리와 비교할 수 없듯이, 이 천녀와 손타리의 아름다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천녀들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 하고 싶다면 청정한 범행을 닦으라. 그러면 저 천녀들과 함께 지낼 수 있으리라.”
부처님은 다시 난타 비구를 데리고 지옥에 갔다. 지옥에는 여러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가운데 커다란 기름 가마솥이 하나가 비어 있었다. 난타 비구가 궁금해하자, 옥졸은 그 가마솥이 어떻게 쓰일지 말해주었다.
“여기는 아비지옥입니다. 저 가마솥은 난타 비구가 청정한 범행을 닦아 그 복으로 천상에 태어나 천녀들과 쾌락을 누리다가 목숨이 다하면 이곳에 와서 살게 될 집입니다.”
설명을 들은 난타 비구가 식은땀을 흘리자, 부처님은 이렇게 타일렀다.
“그대가 영원한 즐거움인 열반을 얻고자 하면, 지(止)와 관(觀)을 열심히 닦아라.”
난타 비구가 정신을 차렸다. 환속할 것을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가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열심히 수행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애욕의 강물을 건너간 아라한이 되었다. 독신 수행자의 가장 큰 문제는 이성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분노나 물질적 탐욕 같은 것은 마음만 잘 다스리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은 이성(理性)만으로는 통제가 어렵다. 율장의 많은 부분이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할애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계율로 통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옛날 수행자들은 고골관(枯骨觀)이나 부정관(不淨觀)을 닦았다. ‘이 몸이 죽으면 썩어서 백골이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도 세 치만 들어가면 똥오줌과 피고름이 가득하다.’... 이렇게 관찰하고 자기를 통제한 것이 바로 ‘지관수행(止觀修行)’이다.
『증일아함』제10권「권청품(勸請品)」제1경에 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고 마가다의 정각 도량에 계실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보리수 아래서 명상에 잠긴 부처님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얻은 이 법은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 법은 번뇌가 사라지고 미묘한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이치를 분별하여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깨달음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미묘한 법을 사람들을 위해 설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 법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나는 헛수고만 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리라. 수고로이 설법하지 않으리라.”
부처님이 이러한 생각을 하자, 세상을 다스리는 범천왕(梵天王)은 매우 근심이 되었다. 여래가 출현하신 것은 설법하기 위함인데, 부처님이 침묵하면 이 세상은 악법이 횡행하여 지혜의 눈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범천왕은 하늘에서 내려와 부처님 앞에 예배하고, 설법해 주실 것을 간곡하게 권청했다.
“원컨대 여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널리 설하여 주옵소서. 중생들 가운데는 훌륭한 근기를 가진 자도 있사온데, 만일 그들이 설법을 듣지 못한다면 진리의 눈을 잃게 되고, 버려진 아이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비유하면 연꽃이 진흙 속에서 싹을 틔웠지만 물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나이다.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근기는 이미 익었으나 생로병사에 시달려 설법을 듣지 못하고, 그만 죽는 자도 있습니다. 어찌 가엾다 하지 않겠나이까. 하오니 원하건대 세존께서는 저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지금이 그때이옵니다.”
부처님은 범천왕이 권청하는 뜻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범천이 지금 나에게 와서 설법하여 주기를 간청하는구나. 그렇다면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열 터이니, 귀 있는 사람은 듣고 법의 요지를 잘 분별하여 낡은 믿음을 버리도록 하라.”
범천왕은 부처님이 설법하시기로 결심한 것을 확인하고, 중생들이 바른 가르침을 얻게 될 것을 기뻐하며 천상으로 돌아갔다. 부처님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늘 짝을 이루어 존재한다고 하셨다. 깨달음도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설법을 통한 중생제도와 늘 짝을 이룬다. 이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는데,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둘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