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설교]
누가복음 15장은 신약성경 사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유 본문 중 하나입니다. 세 가지의 ‘잃어버린 것’에 관한 비유를 말씀합니다.
본문 4~7절 : 잃은 양 비유
본문 8~10절 : 잃은 드라크마 비유
본문 11~32절 : 잃은 아들 비유
오늘은 이 세 가지 비유 중 앞의 두 가지 비유입니다. 비유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우선 누가복음 15장에서 이 세 가지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저들과 식사를 나누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2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아와서 수근 거립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고대 근동에서 식탁 교제는 보통 친구 사이나 형제 사이가 아니고서는 쉽게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너는 나와 한 배를 탄 사람’이라는 뜻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영접하신 것은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흔히 ‘세리’라고 불리는 사람은 보통 ‘매국노’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동족을 팔아먹는 못된 사람이지요. 또한 ‘죄인’은 당시 랍비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어기고 계속 부정한 일에 종사했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과 달리, 이 당시 ‘죄인’은 훨씬 더 폭넓은 범주에 해당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식사 교제를 나눈 사람들은 꽤나 사회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절대 상종하지 못한 변변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자신이 직접 저들을 영접하셨다?! 이러한 배경을 잘 염두에 두시고 계속해서 본문을 보십시오.
이제 이어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숙덕거리며 비아냥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두 가지 잃은 것에 관한 비유를 전하십니다.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등장인물은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잃어버리는데, 총 100마리의 양 중에서 고작 1마리의 양을 잃어버립니다. 99마리의 양은 아직 남아 있고, 겨우 1마리만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비유에서 목자는 어떻게 할까요? 이 잃어버린 양 1마리를 찾기 위해, 남은 99마리의 양들을 모두 들에 두고, 급히 1마리의 양을 찾아 나섭니다. 이때 99마리의 양들이 남아 있는 곳은 우리말 성경으로는 ‘들’이라고 했지만, 본래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광야’입니다. 광야가 어떤 곳일까요? 양들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나 보호시설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뱀이나 전갈, 사나운 이리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이런 곳에 99마리의 양들을 남겨 두고 1마리의 양을 찾으러 갑니다. 어쩌면 남은 양들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목자는 어떻게 할까요? 잃어버린 양 1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의 양들을 모두 광야에 두고 길을 나섭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99마리의 양들을 일찍이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후에야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야합니다. 하지만 비유에서 목자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본문 속 비유가 지금 현재 주님의 제자들이 아닌, 정확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꼭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7절에도 나오듯이, 주께서는 본문 속 비유를 통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7절, “내가 너희(바리새인, 서기관)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여기서 예수께서는 정확히 본문 속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죄인 한 사람’은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지금 현재 주님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숙덕거리며 ‘저 사람은 죄인이잖아!’라고 낙인찍었던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이 본문 속 비유에서는 목자가 그토록 애쓰고 수고하여 찾으려 하는 잃어버린 양 1마리입니다.
반면에 여기서 후자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여기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자칭 우리는 의인이다! 회개할 것 없다! 우리는 세리 & 죄인들과는 다르다! 이렇게 하면서 계속 수덕거리는 사람들?! 누가 보더라도 이 99마리의 양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언제나 늘 의로우니, 더 이상 회개할 것 없이, 자기 위신만을 떨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곧 오늘 본문 속 광야에 덩그러니 놓여진 99마리의 양들이라는 사실을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일 본문에서도 똑같이 보게 되겠지만,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아들’의 경우에는 사실상 여러모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예를 들어 잃은 양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은 과연 문자 그대로 1마리일 뿐일까? 아니면 나머지 99마리도 역시 결국엔 잃어버린 양과 똑같은 처지가 아닐까? 겉보기에는 그저 멀쩡하게 보이고, 심지어 유대인들의 기준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양들처럼 보이지만, 정작 우리 주님의 기준에서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잃어버린 양’이 아닐까?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이러한 역설을 깊이 묵상해보시며, 이 시간 기도로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숨은 민낯을 낱낱이 밝혀줍니다. 어둡던 우리 눈을 밝히어, 비로소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인지, 어떠한 부분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혹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지, 잃어버린 양의 비유 속 목자가 찾아다니는 1마리의 양에 가까운지, 아니면 광야에서 여전히 어둠을 배회하고 돌아다니는 99마리의 양에 가까운지, 스스로 묵상하며 주께로 나아오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