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8.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마태28,8-15>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거짓을 퍼트리죠.
우리 사람 100명이 있다면, 거짓된 사실을 유포하는 쇼셜페스트가 4명 있다고 합니다. 사회학적으로 25명중에 한 명이 쇼셜페스라고 합니다. 사이코페스는 감정적인 교류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쇼셜페스는 감정적인 교류를 다 하면서, 공감하고 서로 통교하고 자연스럽게 되면서도 사람들에게 거짓을 퍼트려 고통을 주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을 덮기 위해서,
복음 내용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죽일놈들이 되는 것이지요.
“이거 혹시 예수라는 시체를 누가 훔쳐간 것 아니야?” 라는 의심까지도 하면서 거짓된 사실을 유포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사회를 보면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그러다 보니 변호사 제도가 생기게 되고,
변호사는 직업이다 보니까,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배심원들을 통해서 승소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하지요.
그러다 보니까 증인들이 증언할 때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재판에서 있을 법한 상황을 미리 예측해서 연극하듯이 연습을 해서 재판에 나가기도 하게 됩니다.
‘얼마나 이것을 위한 증거를 잘 수집하고 증언을 잘 시키느냐?’에 따라서 ‘유능한 변호사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더 큰 로펌에 많은 돈을 주고,
진실이나 사실을 왜곡하려는 유혹이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실과 거짓을 모호하게 만드는 세상 가치에 속지말고,
참으로 오직 진리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 한 분 뿐이시고,
그 주님은 우리 양심 안에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을 잊지 않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요할 수 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실을 향해서, 주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겠지요.
그 방법은?
순간 순간 예수성심께 봉헌하고,
진리 자체이신 예수성심 안에 머뭅니다.
<Matthew28,8-15>
8 Mary Magdalene and the other Mary went away quickly from the tomb, fearful yet overjoyed, and ran to announce the news to his disciples.9 And behold, Jesus met them on their way and greeted them. They approached, embraced his feet, and did him homage.
10 Then Jesus said to them, “Do not be afraid. Go tell my brothers to go to Galilee, and there they will see me.”11 While they were going, some of the guard went into the city and told the chief priests all that had happened.12 The chief priests assembled with the elders and took counsel; then they gave a large sum of money to the soldiers,13 telling them, “You are to say,‘His disciples came by night and stole him while we were asleep.’14 And if this gets to the ears of the governor, we will satisfy him and keep you out of trouble.”15 The soldiers took the money and did as they were instructed. And this story has circulated among the Jews to the presen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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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5.즐거움에 대한 욕구
즐거움의 욕구 역시 기본적인 욕구이다.
학습은 바로 즐거움의 욕구를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또한 기본적인 유전적 지시라 여겨진다.
어린 시절 사회성 놀이를 하지 못한 암컷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를 잘 양육하지 못하듯이,
놀이를 배우지 못한 인간은 인생을 효율적으로 잘 살기 어렵게 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욕구가 단순하며 욕구 간에 갈등이 거의 없는 반면에,
인간은 욕구가 복잡하며 욕구 간에 갈등이 많다.
따라서 일생동안 배워야 하므로,
노령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놀이를 계속하고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사실상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흥미를 잃는다면,
노인들에게는 정신적인 퇴보와 치매의 위험 신호일 수도 있다.
인간은 무엇을 공부하여 결과를 얻고자 하지만,
놀이 없이 하는 공부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
어려운 과제를 쉽게 해결하게되고 오랫동안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웃음이 인간의 독특한 행동인데, 우리는 언제 웃게 될까?
1.새로운 진실에서 빠르고 강한 통찰력을 얻었을 때이다.
1)급소를 찌르는 농담은 웃음과 함께 통찰력을 얻게 된다.
농담에서 급소를 찌르는 말은 항상 새롭고 신속하고 자유롭게 통찰력을 주는 교훈을 전달한다.
2)또한 상호 비슷한 수준의 소통은 웃음과 함께 통찰력을 얻게 된다.
아이들이 농담할 때 어른들이 웃지 않는 이유는 그 농담이 대개 새로운 통찰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른들의 농담에 아이들이 웃지 않는 이유는 그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여 통찰력을 얻기 못하기 때문이다.
2.오랜 전통의 허위성을 생생하게 보여줄 때이다.
코미디언 조 루이스가 “나는 부자였던 적도 있었고 가난한 적도 있었는데 정말로 부자인 쪽이 훨씬 더 좋아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웃었는데,
그 이유는 ‘가난이 미덕이다’ 라는 말의 전통적 허위성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뜻밖의 진리와 지혜에 짧은 순간 직면했을 때 웃게 된다.
3.재미있는 사람들과 함께 놀 때이다.
우리가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웃게 되는데,
그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서로 나누면서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다른 욕구들과의 관계
사람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거나, 히말라야 빙벽을 위험을 무릅쓰고 등반하는 행위를 하거나(즐거움<->생존),
주말마다 부인과 자녀가 남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보고 있다(사랑 소속<->즐거움).
어떤 사람들은 권력에 대한 투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얻기 위한 시간이 전혀 없는 경우가 있고(힘 성취<->즐거움)
힘 성취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그 힘을 가지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낼 수도 있습니다(힘 성취+즐거움)
*생활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존중해 주고 좌절시키지 말아야 한다.
1.속 마음을 아는 체 하지 않기
1)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그들의 행동을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을 이끄는 것에 대해 아는 체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다만 어떤 욕구에 의해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는 물어볼 필요가 있다. 모든 행동과 말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2)지혜 추구
산이 있어서 오르는 것처럼, 아는 것 그 자체를 위해 앎을 시도하는 것 뿐이다.
거기에는 즐거움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다.
3)과유불급(過猶不及)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최상위를 차지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놀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 것이다.
4)욕구들의 조화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 중에서 인간이 가장 지적인 존재가 된 이유는 각각의 욕구들 사이에 계속되는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다른 바람을 충족시키려는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 특히 욕구들간에 끊임없이 존재하는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인간을 모든 생물체 중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가 되도록 만든다.
우리는 유전자에 의해 이끌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갈등을 피할 수 없고 오히려 이로인해 더욱 현명해질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고안물인 핵에너지를 저장하여 두는 분별력이 필요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생존하고, 소속하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러한 여러 욕구들을 충족하기 위한 ‘선택이론’을 가르쳐서 그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키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당신의 삶은 누가 통제하는가, William Glasser 지음, 김인자 옮김, 생활심리시리즈4, 한국심리상담연구소, 2016, p.46-53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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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제1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가 지니는 의미
제1장
기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선사하시는 통로
478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확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생전에 당신에게 치유를 간청했던 많은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의 청원에 귀 기울이시며,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에게 전달하십니다.[2615-2616, 2621]
청원 기도에 속하는 두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의 계획대로 들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철저하게 포기하는 것입니다.(카를 라너)
오늘날 우리는 유다교 회당장이었던 야이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분은 그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어린 딸은 병들어 죽었고, 더 이상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딸을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마르5,21-43 참조). 확실하게 입증된 치유력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표징을 드러내시고(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78)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절름발이와 나병 환자, 눈먼이가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인들도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에게 어떻게 청원했는지, 또 하느님은 자신들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주셨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자판기가 아닙니다.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실지는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40, 51
당신이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회개를 청한다면, 그에 대한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
마음을 모아 성모님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모님은 당신의 궁핍함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애로우시며, 참으로 자비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베르나르도 성인)
(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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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그리스도인의 기도
기도란 무엇인가?
저에게는 기도가 마음의 약동이며, 하늘을 바라보는 단순한 눈길이고, 기쁠 때와 마찬가지로 시련을 겪을 때에도 부르짖는 감사와 사랑의 외침입니다.(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유고’, C, 25r: Manuscrits autobiographiques(파리 1992), 389-390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03)/
제1장
기도에 대한 계시
기도의 보편적 소명
제2절 때가 찼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다
->2615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와 결합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14,16-17). 기도와 기도드리는 상황의 이 새로움은 예수님의 고별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요한14,23-26; 15,7.16; 16,13-15.23-27 참조). 성령과 하나 되어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해 본 적이 없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너희의 기쁨에 넘칠 것이다”(요한16,24)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다
->2616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공생활 동안에 이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을 앞당기는 징표들을 통해서 들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말로 표현되었거나(나병 환자(마르1,40-41 참조), 야이로(마르5,36 참조), 가나안 여자(마르7,29 참조), 회개한 죄수(루카23,39-43 참조)), 또는 침묵 중에 표명되었던(중풍 환자를 떠메고 온 사람들(마르2,5 참조), 예수님의 옷을 만진 하혈증을 앓는 여자(마르5,28 참조), 죄 많은 여자의 눈물과 향유(루카7,37-38 참조)) 믿음의 기도들을 들어 주셨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또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26)/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7)라며 탄식했던 소경들의 애원은,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의 전승 안에서 이렇게 인용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병을 치유해 주시거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 애원하는 기도에 늘 응답해 주셨다.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의 기도가 지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을 훌륭하게 요약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또한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 85, 1: CCL 39, 11769(PL 36, 1081) ‘성무일도’, 총지침, 7, 표준판(바티칸 1973), 24면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27)/
간추림
->2621 예수님께서는 그 가르침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깨끗한(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28)/
마음과 생생하고 꾸준한 믿음 그리고 자녀다운 대담성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촉구하시며,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청하라고 권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친히 들어 주신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29)/
제1편 신앙 고백
->40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말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단지 피조물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인식과 사고의 한계를 가진 인간적 방식으로만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56)/
제2장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
제1절 하느님의 계시
I.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신다
->51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善性)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다.”(계시 헌장, 2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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