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사이(?)
박병률
여자 동창, 영미 씨한테 전화가 왔다.
“친구, 연극표가 있는데 낼모레 구경 갈까요?”
“그러지 뭐.”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했다. 영미 씨는 남편과 사별한 지 오래되었다. 동창 모임 때 내가 영미 씨랑 대화만 나눠도 “영미랑 무슨 이야기 했어?”라고 나한테 물어보는 여자 동창이 있었고, 영미 씨가 남자 동창들하고 수다를 떨면 몇몇 친구들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다. 그런 까닭에 둘이 연극을 본다는 건 누가 봐도 오해 살 일 같았다. 동창 필수랑 같이 가려고 “표 한 장 더 있는가?”라고 물었다. 표가 있어서 세 사람이 함께 연극을 볼 수 있었다. 필수도 부인이 죽은 지 꽤 오래되었는데, 막내아들이 올해 대학에 들어갔단다.
연극을 보는 중에 중간중간 불이 꺼지고 여기저기서 유령이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영미 씨가 무서운지 소리를 지르며 내 팔을 붙잡았다.
연극을 본 지 사나흘 지났을까? 영미 씨한테 전화가 왔다.
“친구, 나 때문에 자네가 피해를 본 것 같아서 미안해요.”
“뭔 소리여?”
“나랑 연극 봤다고 자네 부인이 화를 냈다며?”
“누가 그려, 집사람은 모르는데?”
“혼자된 것도 죄가 되는가?”
영미 씨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나도 덩달아 목청을 높였다.
“영미 씨, 배우자를 잃은 슬픔이 가장 크다는 여론조사를 본 적이 있네, 누가 뭐라 해도 못 들은 척하고 힘내시게!”
영미 씨한테 힘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는데, 뜬소문을 듣고 영미 씨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미 씨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연극 볼 때 유령이 나온다고 큰소리를 지르며 내 팔을 붙잡았을까? 영미 씨도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세상 밖으로 토해내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도 어떤 일로 힘들고 괴로울 때가 있었다. 한이나 불만 따위로 맺혀있는 감정을 친한 친구한테 털어놓으면 속이 후련했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오래전 영미 씨와 필수, 상을 당했을 때 문상 갔던 일이 떠올랐다. 영미 씨 상가에서는 영미 씨가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어떻게 사냐고.’ 울먹거렸다.
필수도 부인상을 치를 때 초등학교에 다니는 늦둥이 아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손님을 받았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아들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 슬픈 모습이 내 안에 자리 잡았는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영미 씨와 필수, 두 친구한테 안부를 자주 묻는 편이다.
영미 씨는 남편과 사별한 지 7년이 넘었는데, 주변에서 돈 많은 ‘홀아비’ 소개해 준다고 여기저기서 재혼하라고 부추긴단다.
그 말을 듣고 필수와 영미 씨를 향한 내 마음이 한층 더 커졌다. 동창 모임 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필수도 혼자된 지 오래됐잖아! 자네도 알다시피 ‘거시기’는 동창끼리 재혼해서 잘 살지 응. 어릴 적 함께 ‘소꿉놀이’를 하며 놀던 소꿉친구라며?”
잠시 후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티브이〈황금연못〉에 주로 65세 이상 노인들이 나오는 프로가 있거든, ‘부부가 함께 살다가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떴을 때 재혼을 할 것인가?’라고 사회자가 물었는데, 노인들은 대부분 재혼하는 것보다 연인처럼 만나서 차도 마시고 영화도 보면서, 자기 삶을 누리는 게 좋다는 의견이 많았단게. 자식 눈치 볼 필요 없디야.”
재혼해서 잘 사는 친구와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버무려가며 농담 반 진담 반 두 사람 속마음을 떠봤다. 내가 웃으면서 영미 씨한테 “필수 어뗘?”라고 물으면 영미 씨 얼굴이 빨개지면서 “호랭이 물어가네.”라고 생뚱맞게 굴었다.
‘호랭이’는 호랑이의 방언인데, 마음은 딴 데 있고 할 말이 없을 때 ‘호랭이 물어간다’라고 고향 사람들이 가끔 쓰는 말이다. 필수한테 “영미 씨는 어떤가?”라고 물으면 “술이나 한잔 따라.” 하며 자기 앞에 있는 술을 단숨에 마신 뒤 빈 잔을 나한테 내밀었다.
저녁 무렵 지난 일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고 창밖을 바라봤다. 가을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세차게 내렸다.
“단풍잎 다 떨어지면 어쩌지?”
혼잣말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영미 씨한테 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영미 씨 오랜만이네.”라고 하자 영미 씨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친구! 고마워요. 지난 토요일, 필수 씨랑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어요. 나뭇잎이 곱게 물들었어요.”
성동문학 제21호
박병률
전북 정읍 출생
한국산문 등단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한국산문작가협회회원, 성동문인협회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수필집<행운목 꽃 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