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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방울로 골프하면 솔프
채은숙의 편지를 다 읽고 난 제비는 고개를 꺼덕였다. 비로소 채은숙의 석연찮았던 지난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사장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사연들과 쁘리쌰로 통해 옮겨들은 이야기들에 상당부분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풀렸다.
최사장이 대전까지 밤길 고속도로를 달려 술에 취한 채은숙을 집에 데려다 줬을 때도 그렇고, 골프할 때도 가끔 이상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아무리 밤늦은 시간이라지만 술에 취한 언니를 집까지 데려온 초면의 최사장에게 당돌함을 넘어 무례한 언행을 했다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깊은 의문을 나타낸 사람은 제비였다.
그 이후 채은숙의 집을 몇 번 들락거렸던 최사장이 화장실갈 때마다 재빠르게 화장실 옆방 문을 막아서며 마치 보초처럼 서 있더라는 말도 무슨 사연이 있었으려니 막연히 추측했다. 전혀 그 방이 최사장에게 보여서는 안 될 무속인만의 비실秘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쁘리쌰와 제비의 머릿속에 항상 의문으로 남았던 사연이 있었다.
채은숙이 올인 가입 첫 라운드 중 우연히 결혼이야기가 나왔을 때다. 처음엔 나이부터 고향 가족이야기로 시작된 이야기가 만혼을 넘도록 결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서로 묻고 대답했다. 그때 채은숙은 쁘리쌰에게 이해하기 힘든 말을 했다. 무심코 내 뱉은 채은숙의 말이었다.
“제가 결혼하면 동생은 죽게 될 거에요.”
그 말의 실수를 알아차린 채은숙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여동생이 이유 없는 병을 앓아 뒷바라지 하느라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서둘러 변명했지만 쁘리쌰는 채은숙의 설명에 완전 공감이 가지 않았다.
쁘리쌰뿐 아니었다.
두 여자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던 제비도 그 부분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여동생이라지만, 병명미상의 병을 앓는 여동생 때문에 자신의 일생을 포기한다는 말엔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결혼하지 않은 채은숙의 이유는 여동생에 대한 형제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정이나 책임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사장의 말을 연결시켜보면 여동생은 정신질환이나 지적장애도 아니었다. 그래서 의문은 계속 남아 있었다. 겨우, 여동생에 대한 지나친 모성애가 채은숙에게 짐이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채은숙을 각별하게 대했던 쁘리쌰와 제비였다.
제비는 채은숙의 편지를 덮고 쁘리쌰를 쳐다봤다.
함께 편지를 읽은 네 사람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깊은 한숨만 내 쉬었다.
누구도 채은숙이 무속인 이라고는 전혀 짐작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채은숙의 편지는 큰 충격이었다. 채은숙은 모든 사고나 행동이 보통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여자가 여동생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심각한 침묵 속에 밤은 계속 깊어 가고 있었다.
카페아웃인 창밖의 어둠속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자정을 훨씬 넘어 그치기 시작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제비와 쁘리쌰 그리고 진회장과 오진희, 네 사람의 대화는 없었다.
오로지 소파 등에 목을 놓고 깊은 상심에 빠져 있는 최사장을 애처롭게 바라 볼 뿐이었다.
카페아웃인의 다섯 사람 심정만큼 시간도 더디게 가고 있었다.
밤 두시.
긴 침묵을 깨고 제비가 최사장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사랑이 어디 있소? 사랑은 환상에 빠져도 안 되지만 현실에 집착해도 안 되는 거야. 화가가 물감을 섞어 신비하고 아름다운 색을 내듯, 두 사람의 인연을 사랑으로 승화하려고 노력도 해보지 않고 단념할거야?”
.
“똑 도르르 똑 독 또르르.”
이른 새벽. 벼랑 끝의 암자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따라 제비와 쁘리쌰 그리고 진회장과 오진희가 산길을 오르고 있었고 그 뒤에 최사장이 따르고 있었다.
간신히 암자에 다다른 다섯 사람은 초겨울 같은 냉기에 입김을 서리며 암자 안을 향해 인기척을 냈다.
“계십니까? 스님.”
“이 새벽에 뉘신고?”
노년의 스님이 방문을 열며 말했다.
다섯 사람은 얼른 합장하며 노스님께 말했다.
“급한 용무가 있어 찾았습니다.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노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무 때나 와도 부처에겐 무례가 아니오.”
제비가 말했다.
“이 암자 가까운 곳에 동굴이 있다기에 왔습니다.” 노스님이 다섯 사람의 행색을 훑어 본 후 어질게 말했다.
“보아하니 죄인 사냥꾼들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연유일까?”
“어제 기도하러 온 여인을 찾습니다. 사는 거처에 들렸더니 가르쳐 주더군요.”
“어떤 관곈고?”
“우리는 올인이라는 골프모임의 회원들입니다 만,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골프모임이라?”
“네. 그렇습니다.”
노스님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도 골프는 좀 하는데.”
그리고 노스님은 컬컬 웃었다. 다섯 사람이 노스님의 말이 신기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붉은 기운으로 희미하게 동터 오는 마당에 골프채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솔방울이 가득 담겨 있는 싸리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노스님이 방에서 나와 작은 마루에 서며 말했다.
“나는 솔방울로 치지. 그래서 나를 솔프 한다고들 하지. 그래서 나를 솔퍼soulful 라고 한다네. 컬컬컬.”
“네에? 솔퍼요?”
제비가 노스님의 말귀를 알아듣고 감탄했다.
“대단하십니다. 솔퍼라면 영혼을 감동시킨다는 뜻이죠?”
“컬컬컬.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어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노스님은 암자 뒤의 동굴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비온 뒤의 산마루에 핏빛 같은 동이 터 오고 있었고, 새벽이슬에 바위는 미끄러웠지만 다섯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잡으며 동굴을 향해 빠르게 올라갔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말에 맥이 풀리긴 했지만 다섯 사람은 채은숙의 여동생이 했던 말을 굳게 믿었다.
“언니는, 세상에서 혼자 갈 곳이라곤 그 동굴 밖에 없어요.”
얼마나 올랐을까 소나무 사이로 작은 동굴입구가 보였다. 동굴입구가 보이자 한달음에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간 사람은 뒤쳐졌던 최사장이었다.
동굴 안은 이미 동틈 빛이 가득 들어와 생각보다 밝았고 입구보다 넓었다.
몇 발자국 들어갔을 때 마치 빙하처럼 흘러내린 촛농이 하얗게 굳어 있었고, 아직도 한참 탈 만큼의 초가 열 댓 개 바위 끝에 걸려 펄럭이고 있었다.
그 아래 무복을 입은 채은숙이 쓰러져 있었다.
의식불명의 채은숙을 발견한 일행은 숙연해져 부동의 자세를 취했지만 최사장은 와락 채은숙을 끌어안았다.
최사장의 울부짖음이 동굴 안에서 공명했다.
“이게 뭐야? 무당은 이래야 되는 거야? 무당은 인간이 아니야? 나도 박수 되면 될 거 아니야! 바보같이 굴지 마! 우리는 하나야! 하나로 살아야 할 운명이란 말이야! 그게 우리의 인연이야. 우리의 사랑이야!”
최사장은 태어난 후 43년 만에 처음으로 통곡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포효하는 최사장의 통곡소리가 동굴 밖으로 울려 나가 새벽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첫댓글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워보는 시간이었슴니다.
잘읽었슴니다.~감사합니다.
좋은 밤 행복한 시간되십시오
오늘밤 달빛이 더 고왔으면 좋겠네요
스님 말이 웃깁니다. 솔푸
최사장 깊은 사랑만큼이나 슬픔도 크지 안았나 봅니다.
채은숙이도 어차피 모두다 알게 된이상
사랑의 제결합을 할수있었으면 할것 같네요..
ㅋ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행복한 시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