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형태의 무장은 1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바랑기의 무장으로 추측된다. 저 모습은 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삽화에서 보이고, 저런 형태의 머리쓰개는 비잔티움 미술에선 유대인과 관련 있다. 그러나 비싼 갑옷은, 화가가 바랑기를 저 삽화의 모델로 삼았음을 나타낸다. 방패에 있는 까마귀 모양의 엠블렘 또한, 이들이 스칸디나비아 출신임을 암시한다.
바리의 산 니콜라 성당의 입구에 있는 노르만 기사(1087) 바리는 이탈리아 본토의 제국 마최후의 요새로 1071년 로베르 기스키르의 공격 당시 노르만인에게 함락되었다. 이 조각에서 기사들은 바이외 태피스트리(윌리엄의 영국 정복을 나타낸 태피스트리)의 무장과 흡수하다. 팔꿈치 아래로 낮게 창을 잡는 법과 위로 창을 잡는 법이 모두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라.
비잔티움의 군대가 언제나 상당한 수효의 용병을 보유했던 건 사실이지만, 테마 제도가 몰락한 결과로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관료 집단과 장군들의 갈등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용병 부대가 고용되었으며, 하여 당시 수적으로는 물론 질적인 전투력도 약화된 테마의 부대를 대체했다.
니케포루스 2세의 치세에는 아시아의 궁기병 외에는 군대의 대부분이 비잔티움 토착민 군대였지만, 11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절반 이상의 군대가 종족별로 구분된 용병으로 대체되었다.
용병 대부분은 투르크인으로 구성되었고 그중에서는 페쩨네그인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지만, 다른 국가 출신도 많았다.
1차 십자군 때 프랑크인들의 연대기는 알렉시우스 1세의 군대에 소속된 많은 용병을 묘사한다. 특히 페쩨네그인, 쿠만인, 우쩨인, 투르크인이 다수였으며, 어떤 익명의 연대기에 따르면 1,095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리스에는 ‘불가리아인, 알란인, 쿠만인, 페체네그인, 이탈리아인, 베네치아인, 로마인, 다키아인, 영국인, 아말피인 그리고 심지어 투르크인들과 많은 이방인, 유대인과 개종자, 크레타인, 아랍인 그리고 모든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중 일부는-베네치아, 아말피, 유대인- 의심할 여지없이, 군대에 물품을 대는 상인이나 숙련공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티움 군대가 붕괴된 이후 구성되었을 것이며, 안나 콤니니는 그녀 아버지의 치세의 용병들을, ‘모든 나라에서 온 기병과 보병’이라고 표현한다.
다수는 제국의 위성국 및 봉신국들에게 지원 받는, 그들만의 독자적 지도자들과 장교들 휘하의 독립적인 부대였다. 이런 부대들은 시마키-Symmachoi(동맹군이란 뜻이다.)로 언급되었고 옛 로마의 시마키아리와 같았으며, 이 용어는 11세기에 페쩨네그인, 세르비아인, 우쩨인, 러시아인을 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9세기와 10세기 절정기에 가장 큰 테마가 4,000명의 상급 기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용병의 수효는 결코 적지 않다. 1,049년에는 15,000명의 페쩨네그인 용병이 고용되었으며 만지케르트 이후에는 즉시 3,000명의 노르만인이 고용되었다.
그리고 1,078년에는 2,000명의 셀주크인과 6,000명의 알란인, 8,000명의 노르만인 그리고 페쩨네그인과 이탈리아인이 알 수 없는 수효로 고용되었다. 1,091년에 40,000명의 쿠만인이, 레부니움 전투에서 비잔티움의 편에 서서 싸웠다.
그에 따른 필연적인 문제로, 용병들의 충성심은 늘 의심스러웠고-특히 자신들의 전투력을 부풀리던 프랑크인 용병들이 그랬다-, 이들이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는 뇌물과 비싼 급여로 유혹하는 것이 반드시 시행되었다. 그리고 급여가 지불되지 않을 경우(실제로 그런 일도 잦았다.), 전투 중에 배반하거나 비잔티움의 영토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끔찍한 날 : 1,071년 만지케르트
아르메니아는 한때 제국의 신병 보충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나, 형편없이 약화된, 사실상 방어 능력이 거의 없는 테마의 소속병들에게 맡겨졌고 1,067년에 셀주크의 손에 넘어갔다. 그 결과 투르크는 끊임없이 제국의 심장부인 아나톨리아를 습격했고, 아르메니아를 확보하지 않으면 제국 동방 전선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리고 1,071년에 아르메니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초기의 셀주크의 술탄인 알프 아르슬란(‘山사자’라는 뜻)은 시리아로 출정하여 파티마조의 다마스쿠스를 노렸고, 그 다음으로는 이집트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비잔티움이 소유하고 있는 몇몇 지방을 공격했다. 그의 부관 중 하나인 아프신이 1월에 만지케르트와 아르기스의 요새를 손에 넣었지만 그의 비정상적으로 많은 군대는 폭설 탓에 짜만두스의 고갯길에 발이 묶여, 봄이 올 때까진 움직일 수 없었다.
반면 기회를 잡은 로마누스 4세는 셀주크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준비했고, 1,071년 봄에 거대한 군대를 만지케르트에서 9.6km 떨어진 에르주룸에 주둔시켰다. 황제가 거느렸던 병력은 아직 확실치 않다.
두 기록에서는 30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20만, 40만 그리고 60만까지도 불어나며, 마테오스 우르하예찌(Matthew of Edessa)는 심지어 100만이 넘는다고까지 기록했다. 어쨌든 모두 과장된 수치겠지만 이 기록들은 황제의 병력이 전례가 없던 어마어마한 군대였음을 말한다.
12세기의 무슬림 연대기 작가인 이마드 앗딘은, 비잔티움 군대에 러시아인, 하자르인, 알란인, 쿠만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프랑크인(대부분 노르만과 게르만인이었을 것이다.)이 참가해 있었다고 하며, 마테오스 우르하예찌는 크리미아의 고트족, 페쩨네그족 그리고 불가르족까지도 고용되었다고 말한다.
비잔티움 토박이로 구성된 군대는 서방 테마 대부분 그리고 모든 동방 테마에서 차출되었으며, 최정예였던 아나톨리아의 군대는 수효로 보면 극히 일부분밖에 되지 않았다. 황제는 여기에 추가로, 바랑기에 타그마타의 기병대까지 이끌고 참전했다.
이 군대의 대부분은 기술자, 노예, 짐꾼 등이었다. 전자는 공성기를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했고, ‘수천 대’에 이르렀다던 짐마차 중 대부분은 공성기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싣고 있었다. 아마도 그 거대한 군대 중 실제로는 40% 정도만이 전투원이었을 것이다.
단지 소수만이 비잔티움인으로 이뤄진 부대였고 그중에서도 정규군은 더 적었을 것이며, 남은 대부분은 질이 낮아 훈련, 장비, 전술 훈련, 숫자 모든 면에서 예전의 군대와는 비교하기 힘들었으며, 이는 로마누스의 군사 경험 부족으로 더더욱 상황이 나빴다. 설상가상으로 몇몇 용병들, 특히 게르만인들은 끊임없이 약탈을 시도하고 있었으며, 결국 황제는 다른 부대를 불러 게르만인들의 폭동부터 처리해야 했다.
알레포 근처에서 숙영하고 있던 알프 아르슬란은 5월 초가 되어서야, 로마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다마스쿠스와 모술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즉시 그의 군대를 되돌렸고, 그 와중에 많은 수의 군대가 흩어졌으며 특히 믿을 수 없었던 이라크인 보조 부대들이 뿔뿔이 흩어져 약탈하고 다녔다. 거기에 셀주크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면서 많은 말을 잃어버렸다.
시리아에 있던 비잔티움의 정찰병은 알프 아르슬란의 후퇴와 손실을 알아차렸고, 로마누스는 아르메니아의 전선에서 방어하며 죽치고 있기보다는, 즉시 전 부대를 동원하여 술탄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누스는 6월 혹은 7월에 바스푸라칸으로 진군한 후, 그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많은 수의 프랑크와 투르크 보조 부대들을 노르만 인 장군인 루셀 드 뵐렐의 지휘 아래 맡겨, 만지케르트와 아클라트로 진군시켰다. 비잔티움 군대의 진군로를 알아차린 알프 아르슬란은 황제를 막기 위하여 모술에서 북상했고, 그의 최고의 장군-사료에 따르면 투르크인 순다크-에게 5,000명의 군대를 주어 아클라트로 보냈다.
당시 술탄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술탄에게는 4,000명의 맘루크 밖에 없었고 흩어진 군대는 재결집에 실패했으며, 상황은 심각해서 도저히 동쪽의 근거지로 가서 원기왕성한 군대를 보충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그 군대를 출격시켜 자신의 군대와 합류하게 했고 10,000명에 달하는 그 지역의 쿠르드인 부족들을 긁어모아 군대를 편성했다.
로마누스는 알프 아르슬란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부대-기록에 따르면 2만명에 달했던-를 급파했다. 이들은 대부분 쿠만인과 러시아인 중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루지야인 지휘관인 요세포스 타르카니오테스가 이들을 통솔했다. 이들은 아클라트로 접근 중인 프랑크인 및 투르크인 용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했고, 아클라트 앞의 한 마을에서 투르크인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소규모의 공성전을 펼친 후 어렵지 않게 만지케르트를 탈환했다.
첫댓글 만지케르트 라는단어가 들어가니 읽을수가없다
으허헝
만지케르트 라고 하니 읽기 전부터 가슴이 아프네요. 왜 비잔틴 하면 찬란한 느낌보단 처량한 망국의 느낌이 강할까요... 이것도 이미지 때문이려나요? 강대한 이슬람을 홀로 막아내다 결국 산화된 고독한 전사의 이미지?
ㅇㅇ
서유럽 야만족들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보존해주고 이슬람을 막아줬는데 뒤통수를 쳐.. 눈깔을 다 뽑아뿔라마
만약이란없지만 이원정이 성공만햇어도....아흑ㅠ 잠깐만 눈물좀 흠치고ㅠ
비잔티움 최대의 재난 ..만지케르트 이름부터 눈물이 나오네
야르무크도 있어요. 그나저나 눈깔 뽑은 보람없이 56년만에 말아드시네요ㅉㅉ
@데미르 카라한 토탈워 마인드로 열심히 유럽 최고의 강국으로 만들어놨는데..ㅜㅜ 바빠서 후계자를 안남겨서
@바실리우스 2세 예나 지금이나 밀리터리 마니아는 인기가 없죠 ㅠㅠ
@바실리우스 2세 크킹덕목의 부재는 망국의 지름길
알프 아르슬란은 용감한 사자란 뜻이고 루셀 드 뵐뢸은 바이외나 바울레울이 맞는것 같습ㄴ다
이제 곧 털릴....?? ㄷㄷ
그래도 알렉시우스 황제 때 중흥을
아아 만지케르트라니 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