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꿀의 격감, 꿀벌의 위기> (하) 늘어나는 위험 요인
50년째 충남 공주시 동현동에서 양봉 중인 김무경(67)씨는 올해 중국가시응애의 피해를 입었다. 중국가시응애가 꿀벌에 기생하면 날개가 없거나 날 수 없는 수준의 작은 날개를 가진 꿀벌이 태어난다. 공주=윤성호 기자 지난 13일 충남 공주시 동현동 한 양봉 농가의 벌통 앞에 꿀벌 수백 마리의 사체가 흩어져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50년째 양봉업을 했다는 김무경(67)씨가 사체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집어 옮겼다. 속도가 나지 않자 이내 손바닥으로 벌을 쓸어 담아 한 줌씩 옮기기 시작했다. 집단폐사한 벌들의 사인(死因)은 ‘중국가시응애’(가시응애)라는 진드기. 크기가 가로, 세로 1㎜도 되지 않는 가시응애가 꿀벌에 기생하면 날개가 없거나 날 수 없는 크기의 날개를 가진 꿀벌이 태어난다. 기형 꿀벌은 성충으로 자라 제 역할을 하기 전 죽는다. 김씨는 벌통 입구에 놓인 연두색 테이프 형태의 방역제를 가리키며 “이게 진드기 잡는 약인데 아카시아꿀 따고 밤꿀 따느라 못 넣은 거야. 진작 넣었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200개가 넘는 벌통 입구에 놓인 연두색 끈이 눈에 들어왔다. 기후변화와 꿀벌의 적들
벌통 입구에 벌들이 나와있다. 노란색 벌통과 연두색 테이프 형태의 방역제 위 갈색점은 중국가시응애다. 공주=윤성호 기자 꿀벌의 적은 가시응애만이 아니다. 2003년 부산항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등검은말벌’도 양봉 농가의 골칫거리다. 환경부가 2019년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한 등검은말벌은 꿀벌을 잡아먹는 육식 곤충이다. 증식이 빠른 데다 방제가 어려워 한 마리씩 직접 채를 들고 잡아야 한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양봉을 하는 정상석(58)씨는 “등검은말벌이 전국 양봉 농가를 초토화하고 있다. 전에는 남쪽 지방 피해가 컸는데 지금은 여기(파주)까지 올라왔다”고 말했다. 농촌진흥청과 정철의 안동대 교수가 실시한 말벌 전국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말벌 중 등검은말벌의 비중은 2018년 49%에서 2019년 72%로 증가했다. 특히 개체수가 적었던 경기도와 서울, 강원도 등 고위도 지방의 증가 추세가 뚜렷했다. 등검은말벌로 인한 연간 피해액은 1700억원으로 추정된다. 2009년에는 ‘꿀벌 에이즈’로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이 토종벌을 괴롭혔다. 벌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기 전 괴사하게 만들어 봉군을 전멸시키는 병이다. 이 병은 백신도, 치료제도 없다. 농림축산식품부의 기타 가축통계에 따르면 2009년 38만3418군이던 재래종 꿀벌은 낭충봉아부패병 유행 5년 뒤 9만4383군으로 급감했다. 정부가 낭충봉아부패병에 면역력을 갖춘 품종을 개발해 2019년 겨우 13만1530군으로 회복시켰다.
최근 벌에게 치명적인 건 달라진 날씨다. 지구온난화로 평균 기온이 높아지면서 벌들이 꿀을 따오거나 다른 활동을 위해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열을 식히는 데 ‘낭비’하게 된다. 가로 20㎝, 세로 30㎝, 높이 20㎝ 정도 되는 벌통 1개에는 5만~6만 마리의 벌이 산다. 벌들은 폐쇄된 벌통에서 계속 움직이므로 열이 발생한다. 한겨울에도 벌통 안 온도는 20~30도다. 5~6월 채밀을 마친 양봉 농가의 숙제는 벌이 한여름 무더위를 버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벌통에 햇빛이 직접 내리쬐지 않게 천막을 치거나 벌통 인근에 큰 물통을 배치한다. 정씨는 “32도가 넘어가면 벌들이 알을 잘 낳지 않아요. 날이 더울수록 산란이 어렵죠”라고 말했다. 일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날의 수를 의미하는 폭염일수는 지난 30년간 평균 11일이었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폭염일수가 11일보다 많았던 해는 7년이다. 2018년 폭염일수는 31일을 기록했다. 벌이 활동하기 어려운 수준의 기온의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길어지는 장마도 벌에게는 스트레스다. 기상청 국가기후데이터센터에 따르면 2000년 이후 6월 평균 강수일수가 평년보다 길었던 해는 13년, 7월 평균 강수일수가 평년보다 길었던 해는 11년이다. 벌은 벌집 안에서 일하는 내역봉과 벌집 밖에서 꿀·화분을 따오는 외역봉으로 나뉜다. 장마 기간이 길어지면 내역봉과 외역봉 모두 벌집 안에 머무르는 날이 많아진다. 김영호 경북대 생태환경관광학부 교수는 “장마 기간 벌집 안에 벌이 오밀조밀 모여 있을 때 스트레스가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한겨울 등 벌의 사회활동이 멈춰지는 기간에도 벌들은 사나워진다”고 설명했다. ‘친환경’ 농약으로 방향감각 상실
농가에서 사용하는 농약도 꿀벌을 위험에 빠뜨리는 요인이다. 꿀벌은 반경 2㎞를 이동하는데 농가가 항공방제를 하는 과정에서 농약에 직접 노출되거나 물, 과수, 벼 등에 녹아 있는 농약에 간접적으로 노출돼 피해를 입게 된다.
김무경(67)씨가 벌통에서 꿀벌을 꺼내 취재진에 보여주고 있다. 공주=윤성호 기자 ‘친환경’ 농사 기조 확산으로 과거와 다른 농약이 사용되지만 꿀벌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다. 허주행 한국꿀벌수의사회 간사는 “기존 농약에 꿀벌이 노출되면 갑자기 몰살됐지만 최근 농약에 노출되면 꿀벌이 점차 사라진다. 친환경 농약도 작물에는 친환경이지만 꿀벌한테는 친환경이 아니다. 꿀벌의 방향감각, 귀소본능을 상실하게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꿀벌이 집단폐사하는 벌집군 붕괴 현상(CCD·Colony Collapse Disorder)의 원인 중 하나로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지목한다. 이 농약이 꿀벌로 하여금 방향감각을 잃게 해 벌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가 벌꿀과 다른 유익한 곤충에 대규모 부정적 효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증거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CCD는 관찰되지 않았지만 미국 캐나다 독일은 2006년부터 CCD로 인한 꿀벌 감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유럽연합(EU)은 2018년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의 실외 사용을 금지했다. 캐나다의 일부 주정부도 사용을 제한했다.
강원 화천군의 한 양봉농가가 벌통을 열어 모여있는 꿀벌을 취재진에 보여주고 있다. 화천=윤성호 기자 꿀벌이 활동할 공간도 점점 줄고 있다. 대도시 인근 유휴 공간에 물류창고, 골프장 등이 들어서거나 댐, 도로 등의 도시 개발이 이뤄지면서다. 밀원이 되는 과수들이 감소하고 채밀 공간이 줄고 있다. 김씨는 “경기도 의정부와 양주에서 벌통을 놔뒀던 곳에 2~3년 지나 가보니 물류창고가 들어섰다”면서 “올해 벌통을 둔 곳도 내년에 가보면 공장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양봉 농가는 개발 주체에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2019년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는 부산 골프장 소음·진동, 먼지, 농약 살포, 수질오염 등으로 꿀벌 폐사, 벌꿀 생산 감소 등의 손해를 입은 양봉 농가가 피해배상을 신청했다. 2018년에는 경북 댐 공사장 소음·진동 피해, 2017년에는 충북 임도 공사장 소음·진동 피해 등을 호소한 양봉 농가가 피해배상을 신청했다. “꿀벌 없으면 과일, 채소 사라져”
꿀벌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원 복원이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아카시아 나무 등 줄어든 주요 밀원을 복구하고 밀원 다양화를 통해 꿀벌이 맘껏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양봉 농가는 벌통 주변에 헛개나무, 피나무 등의 다양한 밀원을 심어 꿀벌 생태계를 자체적으로 조성 중이다.
꿀벌이 꽃에 앉아 쉬고 있다. 공주=윤성호 기자 도시 양봉을 통한 꿀벌 생태계 복원도 진행 중이다. 늘어난 도시 녹지공간을 양봉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아모레퍼시픽은 2016년 여의도 한국 스카우트 빌딩에 도심 양봉장인 ‘마몽드 꿀벌 정원’을 만들었다. 2017년에는 서울숲에, 2018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 꿀벌 정원을 만들었다. LS도 경기 안성시의 연수원 내 유휴부지에 토종 꿀벌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 강동구, 광진구, 노원구 등 지자체도 도시양봉학교 운영을 통해 꿀벌 키우기에 나섰다. 권형욱 인천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꿀벌이 없으면 꽃가루 수정에서 나오는 과일, 채소 등이 사라지고 바람으로 수정되는 쌀, 밀만 먹게 될 수도 있다. 밀원 다양화, 꿀벌 품종화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봉 농가를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기후변화 등에 개별 양봉 농가가 대응하기 어려운 만큼 국가 차원의 지원체계가 갖춰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2019년 양봉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해 양봉 농가 등록이 본격화된 만큼 양봉산업을 제도권 내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용수 국립농업과학원 연구사는 “지금까지는 예측 불가능한 기상 이변을 겪었다면 앞으로는 빅데이터를 이용해 예측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한다. 농업인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주=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https://news.v.daum.net/v/2021072100075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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