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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니즘(Japonism) - 유럽의 일본 따라하기
강렬한 색채ㆍ구도 17세기 日 화풍이 만국박람회 전시 계기로 유행
19세기 후반 서양 예술계에 영향… 모네ㆍ마네도 ‘자포니즘’에 심취
에도시대 풍속화에 매혹된 인상파… 반 고흐도 모사해
일본 우키요에와 유럽 인상파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미술에 나타난, 일본의 화풍이나 문화를 선호하는 현상.
자포니즘(영어: Japonism) 또는 자포니슴(프랑스어: japonisme)은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풍의 사조를 지칭하는 말로써
필립 뷰르트 (1830-90)가 최초로 사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일본취미 (Japoneserie)”에 그치지 않는
일본 취미를 예술 안에서 살려내고자 하는 새로운 미술운동을 지칭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 유럽에서 30여 년 이상 지속적으로 일본을 동경하고 선호한
일본 문화에의 심취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서양의 미학적 관점에 변화를 주게 된
새로운 미술사적 영향으로 평가 받는다.
자포니즘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1855년 만국 박람회에 네델란드를 통해
일본의 채색화가 및 화가들이 제작한 1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된 것에서 찾는다.
당시 유행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본 채색판화(우키요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서양미술사 책에서 인상파를 기술하면서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일본이 직접 참가한 것을 중요하게 다룬다.
당시 일본은 박람회에 출품할 공예품들을 포장할 때
완충재로 망친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를 사용했는데,
이 그림이 훗날 인상파라 불리게 되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는 형태를 중요시하는 전통 아카데미 풍의 사실주의에 반해,
색채를 중시하며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여 단시간에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비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전통에 대한 저항으로,
모던한 현실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키요에를 얘기하기 전에 인상파 그림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미술사에서 인상파 혹은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등장하게 된 것은
1874년 파리에서 열린 그룹전이 계기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움직임, 질감의 변화를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하는가에 중점을 두었다.
이전의 화가들은 주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인상파는 그림 도구를 들고 밖으로 나가 야외의 밝은 태양 아래에서 그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들을 외광파(外光派)라고도 부른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이 없는 실내 화실을 벗어나
자연의 빛과 색채를 캔버스에 담으려 하였기 때문에 주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인상파 이전 회화는 주로 눈에 보이는 사실과 원근법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들인데 반해서
이들은 같은 장소, 같은 사물도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의 우연적인 장면을 화폭에 담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당시 유행처럼 번진 화풍은
바로 일본에서 건너온 풍속화 우키요에의 강렬한 색감과 독특한 구도였다.
우키요에가 보여주는 축약적 구도와 상식을 뒤엎는 배치,
그리고 일본 특유의 화풍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자포니즘의 뜻
서구에 미친 일본 문화 전반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단어이며,
좁게 본다면 유럽의 도자기, 정원, 미술 등에 한정된 영향을 일컫는 말이다.
가장 주요한 뜻은 미술 용어로,
19세기 경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본의 판화에 영향을 받은 화풍을 뜻한다.
주로 인상주의자들이 자포니즘에 심취했다.
유럽으로 유입되었던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는 그 특유의 평면성과 과감한 구성,
과장된 표현 그리고 유럽인에게 낯선 풍경을 통해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문화적 충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미술가와 유행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미술 분야에서는 이러한 사조를 자포니즘(Japonisme/Japonism)이라 부른다.
인상주의 화가나 아르누보 계통의 화가들이 이에 속하며 서양 미술사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다만 같은 자포니즘 화가들이라 해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작이나 영향을 받은 화풍을 구축한 것뿐만 아니라
열렬한 일본 미술품의 수집을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우키요에가 저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 신문지로 도자기를 포장하듯,
당시 일본의 도자기는 우키요에가 인쇄된 종이로 포장해서 수출되었다.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 등 미술 분야 전반에서
자포니즘의 광범위한 영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건축가 중에선 일본 미술작품 수집으로 유명했던 사람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유행(자포니즘) 속에서
일본풍으로 만들어진 서구 물건의 스타일을 자포네스크라고 칭한다. Japan(일본)+esque(식의).
게르만인들이 로마인들의 건축을 흉내낸 로마네스크와 마찬가지로,
진짜 일본인들이 만든 그림이나 도자기가 아닌 일종의 모방작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가키에몬 자기(右衛門 磁器)가 있는데,
물론 지금도 일본에서 이어져오고 있긴 하지만
유럽의 가키에몬 자기를 닮은 많은 도자기들은
실제 가키에몬 자기가 아니라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어쨌든 내 모든 작품은 일본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본 미술은 일본 자국에서는 퇴폐해졌어도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 사이에서 다시 그 뿌리를 박고 있구나.
내게 자연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일본 물건의 거래적인 가치보다는
예술가를 위한 그 실질적인 가치에 있단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인상파 화가들,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에 주목
그럼 이제 인상파 화가들이 서구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일본 목판화에 주목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인상파의 맏형이라 불리는 마네는 1865년 살롱전에
신화 속 여신이 아니라 매춘부를 그린 <올랭피아>를 출품하여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는 배경은 생략한 채 인물만 덩그러니 그린
<피리 부는 소년>을 출품하여 낙선하였다.
이 그림은 명암 대신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빨간색만의 강렬한 대비로
소년의 모습을 그렸기에 매우 평면적이다.
한편 <올랭피아> 속 여인은 금기시하던 외곽선을 뚜렷이 그렸다.
그래서 당시 비평가들은 평면적인 구성과 짙은 윤곽선으로 그린 그의 그림을
통속적인 판화를 지칭하는 ‘에피날 이미지(image d’Epinal)’라고 조롱했다.
이 같은 비난 속에서 에밀 졸라는 1867년 1월 1일 ‘La Revue du XIXe siecle’에
‘마네는 현대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답례하듯 마네는 1868년 ‘에밀 졸라의 초상화’를 그려 살롱전에 출품했다.
◇인상파 대가들을 사로잡다
당시 우키요에가 얼마나 인상파 화가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는
이들의 그림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우키요에의 흔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네(Edouard Manet)의 그림 ‘에밀 졸라의 초상’에는
일본 무사도 그림들이 배경에 그려져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세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맨 오른쪽에는 ‘올랭피아’가 있고, 그 뒤에는 스페인화가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승리’가 보인다.
그리고 올랭피아 왼쪽에 일본 스모선수를 그린 우키요에가 있다.
화면 중심부에는 앉아 있는 에밀 졸라 등 뒤에는 일본 병풍이 세워져 있는데,
병풍 속 그림은 전형적인 동양의 ‘화조화(花鳥畵)’다.
이로써 마네가 우키요에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에두와르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46.5cm x 114cm, 1868년, 오르세미술관
일본 미술이 서양 사회와 예술계에 유행한 계기는 네덜란드와의 무역과 만국박람회 전시였다.
그 후 일본풍은 특히 인상파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예술 전반에 나타났다.
이 같은 일본의 영향을 자포니즘(Japonisme)이라고 부른다.
요새 유행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서구에서의 소위 일본류(日本流) 열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Claude Monet;Madame Monet en costume japonais
끌로드 모네, 기모노를 입은 까미유, 1876년, 231,6cm x 142.3cm, 보스톤 미술관
모네(Claude Monet) 역시 19세기 우키요에의 영향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아내인 까미유를 모델로 일본 여인을 그렸다.
이 작품이 ‘일본 여인(La Japonaise)’이라는 그림이다.
모네는 1876년에 개최된 두 번째 인상파전에 ‘일본풍(La Japonaise)’이라는 제목으로
화려한 빨간색 기모노를 입고 춤을 추는 듯한 아내 카미유를 그려 출품했다.
그림 속 벽과 바닥에는 우키요에가 그려진 부채로 가득 차 있다.
당시 파리에 있는 미술품 가게나 골동품 가게에서는 기모노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부채와 같은 소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그림에는 그런 일본풍 소품들이 모두 그려져 있다.
파리에서 이처럼 일본 문화가 유행한 덕분에
이 그림은 인상파 전에 출품되어 좋은 평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높은 가격에 팔렸다.
그러나 정작 모네 자신은 자포니즘이 유행하던 당시
일본풍 그림을 하나의 습작 정도로 그렸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모네는 말년에 지베르니 집에 수련이 있는 연못을 꾸미고는
일본식 다리를 만들어 그 풍경을 즐겨 그렸다.
모네 : 수련이 있는 연못
반 고흐, 탕기영감의 초상, 92cm x 75cm, 유화, 1887년, 로댕미술관
반면에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경우는 아주 특별하다.
반 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우키요에의 화풍과 강렬한 색채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건너온 고흐는 얼마 안돼서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Arles)로 옮겨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아를 지방의 풍광, 하늘과 자연의 빛깔이
우키요에 그림에서 보는 풍광의 색채와 가장 비슷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반 고흐는 1887년 다수의 우키요에를 따라 그렸으며,
그 해 그린 물감 가게 주인 ‘탕기 영감’ 초상화 배경에도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다.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 그림의 배경에 후지산과 기녀 등
일본적인 풍물들로 채워 넣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일본 수도승으로 그린 자화상도 남겼다.
그는 우키요에 화법을 연구하기 위해 우키요에 화풍의 대표적인 작품인
안도 히로시게의 ‘오하시와 아타케의 천둥’을 그대로 모사하기도 하였다.
히로시게의 그림과 고흐의 모작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원작인지 모를 정도다.
우키요에 판화의 대가 안도 히로시게의 ‘오하시와 아타케의 천둥’
(왼쪽 그림, 1857년, 34㎝×22.5㎝,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을
모사한빈센트 반 고흐의 ‘빗속의 다리’
(오른쪽 그림, 1887년, 73㎝×54㎝,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히로시게: 카메이도의 매화정원, 1985년, 반 고흐: 꽃이 핀 자두나무, 1887년,
반 고흐, 1887년
Cover of Paris Illustre, 1886년 5월, Keisei Eisen 그림
우키요에는 에도(江戸)시대, 즉 지금의 도쿄에서 목판 인쇄로 제작된 일종의 풍속화다.
우키요(浮世)는 원래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의미의 우키요(憂世)로 쓰였다.
그러나 에도 시대 즈음에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상인계층 조닌(町人)이
문화 주체로 대두되며 뜬구름처럼 현실을 즐겁게 지내자는 긍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이 같은 현세관이 반영되어 현실을 낙천적인 서민의 눈으로 그린 그림이 바로 우키요에다.
우키요에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목판 인쇄를 했고, 소비자의 요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소재는 요즘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 브로마이드라 할 수 있는
가부키 배우부터 관광엽서라 할 수 있는 도시 풍경까지 다양했다.
우키요에의 시작은 목판본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94)는 소설 삽화를 독립된 그림으로 위상을 정립시킨 장본인으로,
우키요에의 아버지라 불린다.
◇ 우키요에, 일본 회화에 스민 서양화 기법
초기에는 손으로 그리다 수요가 급증하자 단색 판화로 전환했으며,
점차 기술 발전에 힘입어 다색 판화가 되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유일한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 항을 통해
서양 원화와 서양화 영향을 받은 중국 소주(蘇州)판화가 유입되었다.
그에 따라 서양 원근법이 적용된 그림이 등장하였으며,
필력을 중시하는 전통 수묵화는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서양화풍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물산학(物産學)의 발전과 더불어 난학(蘭學),
즉 서양 학문이 발흥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18세기 말 시바 고칸(司馬江漢)은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동판화와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 이 같은 서양화 기법을 응용한 우키요에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당시 유럽에도 널리 알려진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와
안도 히로시게(安藤広重)가 있다.
호쿠사이는 원근과 명암을 과장되게 표현하며 대상을 단순화시킨다.
그와 달리 히로시게는 서양화 기법으로 공간감을 잘 살리고
거기에 정감 어린 자연 정취의 동양적 서정성을 융합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반 고흐가 그의 그림을 여러 점 모사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키요에는 일본인들이 일본화에 서양화 기법을 융합해서
일본화한 대중문화상품이라 할 수 있겠다.
◇포장지 그림에 열광한 유럽
이 같은 우키요에 화집들은 1853년 일본이 개항하기 전
이미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었던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보다 앞서 18세기 유럽 귀족 사이에서는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시누아즈리(chinoiserie), 즉 중국풍의 장식이 널리 퍼졌으며,
특히 프랑스에서는 일본의 옻칠 공예품이 유행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후 중국풍을 즐기던 귀족층이 몰락하고
신고전주의 미학이 대두되면서 중국과 일본 미술품 거래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학자들을 중심으로 동양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며
1840년대부터 동양 유물 거래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네덜란드 전시관을 통해 일본 미술품이 거래되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해 미술비평가 자카리 아스트릭은
파리 일간지 ‘에탕다르(L’Etandard)’에 일본 예술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그는 일본을 ‘동양의 그리스’라고 소개하며,
일본 미술이 프랑스 회화발전을 위한 창작의 원천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1860년대 파리는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자포니즘(Japonisme), 즉 일본풍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일본 미술의 장식적이면서도 간결함을 높이 평가했다.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 아카데미 풍의 사실주의를 거부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파격적인 구성과 형태의 간결함, 그리고 풍요로운 색채로 제작된 우키요에는
그들 고민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연구대상이었다.
결과는 자유로운 표현과 시각의 솔직함 그리고 순간성을 기반으로 모던한 삶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서양화 기법을 참조해 발전시킨 우키요에가
한 세기 지나 유럽에 소개되어 자포니즘이라는 열풍을 일으킨 것을 보면서
문화접촉은 일방적인 듯 하지만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보편적 진리를 깨닫게 된다.
제임스 휘슬러(미국) 가 그린 도자기의 나라에서 온 공주, 1865년
첫댓글 잘몰랐던 일본의 유명한 목판인쇄 풍속화도
알게되네요
감사합니다.
네 우키요에가 정말 대단하지요
일본의 자랑거리입니다
유럽의 인상파가 깊은 영향을 받았지요
거기서 후기인상파, 야수파, 입체파를 거쳐
현대미술로 이어 지지요
현대 서양미술의 뿌리에
일본 우키요에가 있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