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허물
- 신철규
빛 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영원히 멈추지 않는 회전문에 갇혀 있는 느낌
네가 해를 등지고 있을 때 너는 찡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 과일을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영점을 맞추는 사수처럼
한쪽 눈이 찌르르 감겼다
진갈색 마룻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빛
끈적끈적한 그림자
우리가 서로를 안을 때 네 심장은 내 심장보다 조금 아래에서 뛴다
같은 높이에서 뛰기 위해 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릴 때
윗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꿈에도 모르는 일
물속에서 물고기들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닫을 눈꺼풀이 없어서
무서워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실명(失明)은 빛을 잃는 것
우리가 꿈속에서 함께 지었던 집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고
희미한 이름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려간다
봉인된 기억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빛처럼
방심(放心)하면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귓속으로 들어간 말을 바람이 씻어낸다
깨진 병은 어떤 물도 담을 수 없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에 먼지들이 살아 움직인다
창틀 위 유리컵에 담긴 구름
기포를 뿜으며 가라앉는다
-시집 『심장보다 높이』창비시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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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순흥 선비문화수련원 뜨락에서 열린 제39회 전국죽계백일장에 제출된 작품을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당일치기 백일장에서는 기본 실력이 60% 운이 40% 비율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심사라는 게 좋은 작품을 찾아내는 것보다 허물을 찾아내는 데 더 관심을 가지거든요
'허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저지른 잘못이나 결점, 뱀이나 매미 누에 따위가 벗는 껍질, 살갗 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까풀"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나마 대학일반부 작품은 비교적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 구성력이 흠잡을 데가 적었습니다만
고등학생 부문은 여러모로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언어의 정확성에 둔감했고, 글제를 해석하는 힘도 미약했으며 이미지를 드러내고 구성하는 능력도 미흡했습니다
아무래도 입시 교육 때문인가 싶었는데 아주 다행으로 중학교 운문에서 대상감을 찾아냈습니다
'징검다리' 라는 글제를 독창성 있게 해석하여 삶의 의미를 잘 빚었더라구요
중학생 나이에 걸맞는 징검다리가 닳지 않은 끈적한 그림자처럼 시의 여운을 길게 놓았습니다
서로를 안을 때 네 심장은 내 심장보다 조금 아래에서 뛴다. 서로 심장의 높이가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심장의 높이를 가진 일치할 수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타자와의 다름 때문에 그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빛처럼 달려오는 사랑을 놓치고 맙니다
다름부터 먼저 인식하고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슬픔으로 관계의 빛은 껍질 만을 남깁니다
한 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빛처럼 관계가 깨져버린 마음엔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을 겁니다
시상식에 참가해달라는 전화연락을 받지 않았음에도 시상식에 나온 어린이가 결과를 물어올 때
어떤 가능성이나 꿈이었을 입상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을까 봐 빙그레 웃어주었습니다
위 시에서처럼 화자는 빛이 아주 떠났다고 느끼지 않고, 빛 속에 갇혔다고 합니다
백일장 참가자 모두가 문학의 숲을 완전히 떤지 않고 계속 머물기를 기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