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란 무엇인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생존의 근원을 이루는 이웃의 총체이며, 사회와 역사를 위해서 정의롭게 살아갈 동반자들의 총체적인 개념이다.
평화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기준이요, 민족과 국가의 울을 넘어서서 인류공영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평화를 깨뜨리고 폭력과 압제를 자행하여 민족을 침략하고 괴롭히는 자들이 있으며, 이기적인 욕심과 안락을 위해서 일시적인 강자에게 기생하여 민족과 이웃을 팔아먹는 자들이 있다. 이는 아직도 정의와 평화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한계이며, 자신을 불태우면서 세상을 밝히고 생명까지 내던지면서 정의를 실현하는 의로운 분이 나오게 되는 까닭이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서까지도 동양평화를 주장하였던 안중근의사는 그래서 우리 민족의 혼을 대표하는 의로운 스승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 침략과 전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을 확장시켜나갔던 일본제국주의의 핵심이자 원흉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자신의 의로운 정신을 취조과정과 재판과정에서 당당히 밝혀 민족의 자부심을 드높이고 일본침략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안중근의사. 의사께서는 “조국이 해방되거든 나의 시신을 고향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중국 여순감옥에서 교수당하여 매장된 뒤 95년이 지난 지금도 의사의 유해는 머나먼 이국땅에 묻혀있을 뿐 이렇다할 조치를 못하고 있다. 2000년에 삼중스님을 비롯한 불교인사들과 민족혼을 소중히 생각하는 뜻있는 분들이 여순감옥을 찾아가 의사의 묘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추모재를 올린 적이 있을 뿐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최근, 의사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연유로 남북한이 합의하여 유해를 송환하기로 중국과 협조가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기미독립정신을 오늘에 계승, 실천하고자 하는 민족운동단체인 3.1동지회김해지부의 뜻있는 20여명의 회원들이 지난 11월 26일부터 3박4일 동안 중국 여순과 대련을 방문하여 안의사의 유적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여기에서는 여순감옥에서 의사의 민족혼을 느끼고 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행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원한의 붉은 벽돌집, 항일운동, 정치범의 여순감옥
인천에서 17시간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대련, 중국발음으로는 ‘따리엔’인 항구도시인데, 경남의 창원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은 깔끔한 계획도시였다.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반도 최남단의 도시인 이 대련은 요녕성 소속으로 인구 약 600만명의 도시이며 항구, 공업, 관광도시로서 위도상으로 평양과 비슷하여 중국 전체 전체에서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와 분명한 사계절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을 갖는 지역이라고 한다. 이 대련시 소속의 한 구에 속하는 곳이 여순(중국발음 뤼순)으로, 군항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외국인 출입금지구역인데, 현지 여행사의 어려운 교섭으로 방문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순감옥 입구의 푸른색 건물에는 한자로 ‘旅順日俄監獄舊址’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여순 일본러시아 감옥터’이라는 뜻인데, 이름에서부터 여순과 여순감옥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여순이라는 장소자체가 청일전쟁으로 요동지방을 차지한 일본을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몰아내고 러시아가 조차지로 점령하였던 지역이며, 1902년에 여순감옥을 짓기 시작하여 러시아군의 병영과 야전병원으로 사용하였는데,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여순을 재점령, 감옥을 확대 건축하여 1907년에 완공하고 ‘관동도독부감옥서’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감옥 전체가 푸른색의 시멘트 건물과 붉은 벽돌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푸른색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본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전체의 2/3정도가 붉은색의 일본이 지은 건물로 되어 있었다. 부지 2.75만 평방미터, 감방 253개, 지하감방 4개, 15개 부설공장이 있는 2,000여명 수용규모의 감옥이다.) 그런데, 붉은 벽돌건물은 지금의 서울 서대문감옥공원에 있는 일제시대의 일본이 지은 감옥과 색깔과 내부구조가 꼭 같았다.
그리고 이 감옥의 용도 자체가 사상범, 정치범, 공안관계로 체포된 사람들을 수감하였고 사형을 집행하였으므로, 항일운동을 하였던 조선과 중국인, 공산주의활동을 하였던 중국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고, 그래서 중국은 이 감옥을 1971년부터 역사전시관으로 바꾸어서 관리하였고, 1994년에 대련시정부가 ‘애국주의기지’로 지정하여 한 해에 약60여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입구에 입장료 중국돈 20위안(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600원 정도)이라는 글자가 걸려있었다. 군복을 입은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서 입구의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음침하고 무거운 감옥 특유의 분위기를 느꼈다. 맨 처음 들어간 ‘몸수색실’에는 붉고 푸른 죄수복(당시에 사용한, 그러니 7,80년은 된 옷들)이 수십 벌 걸려 있어서 당시의 살벌하고 엄혹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하였는데, 잡혀온 사람들은 감옥을 출입할 때 이 몸수색실에서 엄동설한에도 모든 옷을 벗고 간수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감방들, 또 사람을 큰 대(大)자로 엎드려 눕게 하여놓고 매질을 하는 고문실 등은 보는 사람을 섬찟하게 하였다. 4평 정도 되는 감방안에는 나무로 된 큰 통이 하나, 작은 통이 하나 있었는데, 큰 통은 변기이고, 작은 통은 식수통이라고 한다. 서대문감옥과 너무도 같은 내부구조와 행형(行刑)방식에 치가 떨리는 마음을 속으로 삼키면서 걸어갔다. 필자 또한 1978년에서 79년 사이의 일년 동안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된 적이 있으며, 서울 서대문 감옥(당시 이름은 서울구치소)에서 몇 달간을 특히 이 일제가 건축한 붉은 벽돌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다. 1945년 이후 건설된 교도소 건물은 감방 내부에 화장실이 따로 만들어져 있고, 수세식으로 되어서 냄새가 거의 없으며, 최근에는 바닥에 전기온방장치를 하여 겨울에도 동상이 걸리지 않도록 해놓았다고 하지만, 30여년 전인 당시의 서울구치소의 일제가 지은 붉은 벽돌감방은 이 여순감옥과 똑 같은 구조로 겨울에는 영하10도 이하의 찬 기온에 감방안의 물이 꽁꽁 얼고 뼛속으로 찬 기운이 파고들었고, 방안에 식수통 1개, 변기통 1개가 놓여 있어서 방안에서 변을 보고 뚜껑을 덮어야 하는 현실이었다. 여순은 위도상으로 서울보다 더 높은 평양 정도의 위치이다. 당시의 겨울은 지금보다 더 차디차고 더 외로웠을 것이다. 그 차가운 겨울 견디면서 애국지사들은 꺼져가는 생명을 다하여 조국해방을 외쳤을 것이다. 그래서 해방된 조국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의사의 방과 교수형 집행장
감옥을 돌아보던 중 다른 방보다 넓고 책걸상이 놓여 있으며, 한 쪽 벽에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걸려있는 방이 있었는데, 그 방 앞에 동판으로 된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그 안내문에는 한글과 중국어로 안중근 의사가 이 방에 수감되어 있었고, 이또오히로부미를 사살했다는 기록과 함께 안의사의 사진도 새겨져 있었다. 일행은 이또오라는 일본 당대의 거물 정치인을 죽인 이유로 안의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적이라도 장수에게는 다른 대접을 하였던 관례를 생각해보면 그러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안의사께서는 거사후 체포되어 취조받고 수감되는 과정에서 의연하고 고매한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당당하게 피력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안의사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안의사의 감방앞에서 묵념을 하고난 뒤 건물을 돌아서 교수형장에 가보았는데, 안의사가 교수당한 곳은 아니고 1934년에 신설되어 수많은 애국지사와 항일운동가가 처형당했던 곳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에서 밧줄이 내려오고 마루바닥의 구멍이 밑으로 떨어지면 형이 집행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여순감옥에서만 1945년 패전때까지 수천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2년부터 1945년까지만도 700여명이 처형당했다고 하며,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한 다음날에도 교수형을 집행하였다고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인무도함에 치가 떨렸다. 발굴된 유해들을 합장해놓은 묘소가 있어서 그 앞에서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동양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감옥 전체를 돌아가면서 보도록 되어있는 전시장건물을 돌아서니 드디어 한 건물 모서리에 안의사께서 교수형을 당하신 장소라는 설명이 있었다. 안의사님의 순국에는 안의사 어머님의 초인적인 거룩한 행동의 이야기가 동반하고 있다. 안의사님이 사형을 언도받고 나서 학소를 하여 또 재판을 받으려하자, 안의사님의 어머님은 면회하는 자리에서 “너가 부모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에 부담을 지고 있는 같은데, 일본에게 항소를 하는 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니, 항소를 포기하고 조선의 남아답게 의롭게 죽어라.”고 하셨다고 한다. 세상에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게 의롭게 죽어라고 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안의사님의 어머니는 자식과 부모, 생과사의 애착과 분별을 초월하여 의로움을 택하게 하신 탁월하신 분이었다. 면회 후 안의사는 즉각 항소를 포기하고 어머님이 주신 희디 흰 모시한복을 입고 촬영을 하는데, 지금도 남아있는 백의민족 안의사의 흰 한복사진은 안의사 최후의 정식 생전사진이다. 안의사님은 그렇게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셨고, 그 이후 1934년에 교수형장 건물을 따로 지었으므로 안의사님께서 순국하신 이 건물은 이후에는 창고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한글로 안의사의 순국장소에 대한 설명을 해놓은 중국인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아! 단재 신채호선생님!
건물속을 지나가면서 줄줄이 이어진 감방들을 둘러보는데, 조선인 신채호선생님이 계셨다는 안내판이 적힌 감방이 있었다. 조선인 신채호, 이방에 수감되었다는 기록, 아! 그렇지, 단재 신채호 선생님, 탁월한 사학자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선생님, 선생님은 학자로서의 길만을 걷지 않고 온 몸을 내던져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민족사관을 수립하여 당시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셨고, 뒤에는 민중이 주체가 된 폭력혁명의 의한 독립을 쟁취해야 함을 주장하였던 단재, 선생님은 몸소 독립을 위해서 백방을 뛰면서 활동하시다가 1928년 지룽항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바로 이 여순감옥에 수감, 해방의 밝은 날을 보시지 못하고 1938년 차디찬 감옥의 바닥에서 옥사, 순국하셨다. 그 방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너무도 쓰리고 벅찬 감회가 가슴을 채웠다. 지금의 우리 조국의 학자, 정신적인 지도자 중에는 단재 선생님같은 분이 있을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더 많은 수의 친일, 어용학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조국의 역사가 지금에 와서 바로 잡히고 있고, 아직도 친일학자의 후예들, 친일파의 후손들을 감싸주고 있는 정치집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국의 역사는 시련 속에서도 자주, 민주, 통일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고 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송건호선생님, 문익환목사님 등, 단재 신채호선생님의 기상과 정신을 이어받은 실천적인 지성인들이 이제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가까운 지역인 마산 출신의 강만길교수가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부치하에서는 감옥에 갇혀있던 분인데, 지금은 상지대학총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국가의 중요행사 등에서 위원장을 맡고 계시고, 문익환목사의 정신으로 후학생을 가르치게 되는 문익환학교가 정식의 중고등학교로 개교된다고 한다. 바로 십수년 전인 군사독재치하에서 반체제인사, 간첩보다 더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대문짝 기사를 만들었던 분들이 이제 사회적인 지도자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변화를 사람들은 영남지역의 사람들은 얼마나 수용하고 있을까?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시대변화가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는 시대가 이제 제대로 된 것인데, 개발독재, 군사독재의 향수에 젖은 사람들은 언제 역사를 바로 볼른지, 그래도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급성장, 세계의 중심축을 바꾼다.
이번여행에서 배를 타고 내린 대련은 중국성장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계획도시이자 산업과 무역의 중심도시이다. 공원과 주택들을 돌아보니 서울의 목동이나 과천시를 돌아보는 듯 50층 이상의 고급아파트와 깨끗하게 정리된 가로와 도시의 숲등이 놀라움을 선사했고, 어디에서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아파트, 공장 등의 건축현장들이 연평균 10% 지속성장을 유지하고 있는 ‘눈뜬 사자’ 중국을 실감하게 하였다. 현재의 세계에서 초강대국 미국에 대등하게 대항하고 미국이 겁내는 유일한 국가인 중국, 십사억 명이 넘는 엄청난 구매력과 세계의 공장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중국,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교와 그 자본들, 그리고 화교계와 중국계가 경제계를 거의 다 장악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나라들,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전환점으로 세계의 중심축을 바꿀 중국의 거대한 힘, 대련에서 그 단적인 모습을 느낀 것 같아 한편 두렵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주변의 역학관계의 변화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미국과 소련의 힘만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던 60년 전의 환경과는 다른 조건들이 우리민족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더해주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우리의 다음 세대, 우리의 후손, 후배들은 우리에게 ‘당신들은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 조국의 역사에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하고 물을 것이다. 그 물음에 떳떳이 ‘최선을 다했노라’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두 손모아 기원드린다. -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들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오는 역사의식에 다시 뜨거움을 보태는 글이었습니다.안의사의 지행합일정신과 애족혼 단재 신채호선생의 민족정신은 현대를 실이기는 우리가 두고두고 귀감으로 삼아야 겠습니다.중국의 급성장과 위기와 기회를 슬기롭게 대처하자는의견에 공감합니다.후손에 부끄럽지 않는
우리들 모습이어야 하는데 권위주의에 순치된 답답한 세대들 ...옳게 알지도 못하면서 어깨힘주며 비판하는 나이든 사람들.. 그걸 부채질하는 기득권 보수언론들....안의사나 단재선생의 혼이 말한다면 얼마나 준열하게 나무라실지.....결국은 시민의식을 높이는길이 나아갈길이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