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가 깃든 삶] 탕약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 녯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녯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백석(1912∼1996)
나는 시를 공부하고 아버지는 시를 쓰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어떤 시가 좋은가 토론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백석은 잃어버린 보물,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시인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흰 바람벽이 있어’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좋다고 한다. 나는 ‘북방에서’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좋다고 한다. 시에 등장하는 ‘갈매나무’라든가 ‘응앙응앙’ 운다는 당나귀를 떠올리면 마음이 폭신폭신해진다. 우리에게 이런 시인이 있음이 자랑스럽다.
좋은데 백석 시는 어렵기도 하다. 그가 시를 쓴 것이 벌써 100여 년 전이고, 그는 고어와 평안도 방언을 많이 사용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언어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백석 시를 읽다가 ‘뭐지?’ 하고 멈칫할 때가 많다. 그만큼 우리가 언젠가의 말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백석의 짧고도 재미난 시를 하나 소개한다. 한글날을 기념하여 문해력 시험인 듯 읽어보자. 토방은 무엇일까. 숙변은 우리가 아는 그 변일까. 밭어놓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깜하다는 말은 또 뭘까. 요즘 트렌드는 빈티지와 레트로라는데 시 따라 “녯적”을 떠올리는 것은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백석(1912~1996)은 북한의 시인, 번역가. 한국적 모더니즘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시인으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유학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며 등단하였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다. 해방 이후 고향인 이북에서 문예 활동에 전념했으나,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논조로 인해 1960년대 즈음 북한 문단에서 숙청당했다. 이후 량강도 삼수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외 지도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문단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으로,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 가운데 '석(石)'을 가져다 필명 겸 아호(雅號)로 삼고 백석(白石, 白奭)으로서 작품 활동을 했다. 등단 이전 1933년 12월 방응모 장학금 회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서명에 이미 '백석(白石)' 및 '백석(白奭)' 이름이 등장한다. 백석의 영향을 받은 인물은 화가 이중섭, 시인 신경림, 동화작가 김요섭, 윤동주, 북한의 한설야 등이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동아일보 2024년 10월 12일(토), 〈詩가 깃든 삶, 나민애(문학평론가)〉》,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