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은혜. 벌써 고등학생 다됬구나... 벌써... 그 니가 간다는 그 고등학교가 기숙사 생활을 해야하는 곳이라면서? 엄마가 짐은 부쳐줄테니까, 잘가고... 꼭 방학 때 들려야 한다. 알았지? 용돈도 꼬박 꼬박 통장에 넣어..."
"엄마 그만 좀 해. 이러다 늦겠다. 나 갈거니까 이 손도 좀 놓고."
기숙사 생활.
그건 내가 선택한 최상의 선택이었다.
일부러 기숙사 생활이 가능한 곳으로 원서를 넣은 나였다.
물론 기숙사 생활을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됬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꼭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하는 학교라는 핑계를 대고 기숙사를 신청했다.
그래서 일까. 차마, 이 가난에 찌든 지긋지긋한 곳을 일분 일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제발 그 손 놔달라고는 말 못하고 그저 늦겠다는 말만을 늘어놓았던 나.
그런 내 손을 놔주는 듯 하시던 엄마는 내 손을 펴서 자신의 손을 올려놓으셨다.
"은혜야. 니 아부지 그렇게 세상 떠나삐고 나서, 힘들게 살아왔던 거 니도 알제? 미안하데이... 니 하고 싶다고 한 거 다 못들어주고, 좋은 옷도 못 사주고... 좋은 밥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 엄마가 다 미안타. 알았제?"
"됐어. 그 딴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 손이나 놔요. 나 가야하니까..."
"이거 받아라. 엄마가 니 한테 주는 선물이다. 새로 사주지 못해서 미안테이... 그래도 잊어뿌지 말고 쓰라. 알겠제?"
"알았으니까. 이 손 놔요. 늦겠네 진짜."
엄마가 내 펴진 손 위에 올려놓은 건 시계였다.
금빛이 많이도 바래버린 그런 볼품 없는 시계.
내 손위에 올려진 엄마의 손이 참 까칠까칠 했다.
나는 대충 시계를 차고는 버스 정류장까지 달렸다.
"헥헥..."
숨이 가빠 헥헥거리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시간은 등교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고
그렇기에 교복을 입은 나는 굳이 뛸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버스는 내가 도착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왔고 나는 얼른 올랐다.
아침이긴 하지만 내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단체로 약수터라도 갔다 오신 건지
저 마다 물통을 하나씩 안고 계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근처에 가려던 나는 그냥 돌아서 한 아줌마가 있는 자리로 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에게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늙은 냄새가 싫었다.
추한 그들이 싫었다.
들어서서 주춤하다가, 자신에게로 발을 옮긴 걸 안 건지 아줌마는 나를 바라봤다.
딱 봐도 우리 엄마와는 다른 사람.
그리 부자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교양은 있어보였다.
우리 엄마가 저런 사람이었다면 하는 생각을 할 동안
그 아줌마는 나를 천천히 훑는 듯 했다.
그러다가 내 손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줌마는 애써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을 막고서는
피식피식 튀어나오는 웃음을 뒤로 한채 말했다.
"어머, 요새 애 같지 않게 엄청 오래 된 시계를 차고있네? 이거 한 20년 전인가 유행했던 시계였는데... 옛날 생각 난다 얘. 호호호..."
아줌마의 웃음 소리가 내겐 비웃음으로 밖에 안 들렸다.
정말 비웃음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진 나는 얼른 시계를 빼버렸다.
어느 덧 학교에 적응한지도 한달.
한달에 한번 집으로의 외박이 허락되는 학교.
친구들이 다 집으로 간다기에,
나도 그들의 틈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집에 간다고 해버렸다.
그렇게 도착한 집.
"아이고. 우리 은혜 아이가. 와 그동안 전화도 안 했노."
"다녀왔습니다."
다시는 오고싶지 않았는데, 결국 내가 오고 말았다.
오늘이 엄마가 쉬는 날이었던 걸 잊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엄마는 아주 반갑게 날 맞으시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니 고생 마이... 아이고, 은혜야. 니 시계 어쨌노?"
"무슨 시계?"
"앞전에 니 고등학교 가는 날 내가 준 시계 안 있나?"
"아 그거? 모르겠는데?"
"야 이놈의 가스나야. 그게 어떤 긴데... 그게 어떤 긴데!"
엄마는, 참 오랜만에 내게 불같은 화를 냈다.
그래 그랬었지.
엄마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까지만 해도 날 못 잡아 먹어 안달이었지.
잠시 2년 동안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집구석.
싫었다.
죽기보다도 싫었다.
"아 진짜. 그 깟 시계가 뭐라고? 나보다 그 깟 시계가 더 중요하나 엄마는!"
"아니 이놈의 가스나가 진짜!"
"엄마는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빡 안할게 분명하다. 엄마가 나 낳은 게 맞긴 하나? 나 같은 거 왜 낳은 건데? 그 깟 시계보다도 못한 년. 뭐라고 낳았는데?"
"뭐라꼬? 이게 말이면 단 줄 아나!"
정말 화가 난 듯 시퍼렇게 변한 엄마의 얼굴.
나는 신경질 적으로 가방을 뒤져서 쳐박아 두었던 시계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마당 저 쪽으로 던져버렸다.
"이 깟게 뭐라고. 나 다시는 집에 안 올거다."
"뭐... 뭐? 은혜야! 은혜야!"
엄마의 부름을 뒤로하고 뛰었다.
내가 갈 곳은 학교 밖엔 없었던 건가 보다.
그렇게, 처음으로 돌아간 집이
내게 마지막 같게만 느껴지고 말았다.
엄마에게 전화 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슬퍼보이던 엄마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 마음 보다도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엄마는 내게서 조금씩 잊혀져 간 것 같다.
수능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고서,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한껏 수다를 떨고 있었던 때였다.
갑자기 방으로 전화가 왔다.
담임 선생님이셨다.
"은혜야, 빨리 교무실로 와바라. 큰일 났다."
"네? 대체 무슨..."
"글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 테니까, 교무실 말고 그냥 운동장으로 나온나. 선생님이랑 같이 가야겠다."
"네..."
무슨일이냐며 걱정스레 묻는 친구들이었지만,
그 보다도 알 수 없는 예감에 몸서리 치는 나였다.
기분 나쁜 예감 때문에...
운동장에 나가보니 선생님이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런 선생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고 은혜야. 니네 어머니 돌아가셨단다."
"예? 엄마가요? 선생님, 거짓말 하지마세요. 우리 엄마가 왜요? 왜 죽는데요..."
"은혜야. 놀라지 말고 듣거래이. 니네 어머니께서 암이셨는가 보드라."
"암이요? 우리 엄마가 대체 왜 암에 걸렸는데요! 왜!"
"폐암이라 카드라..."
폐암.
아빠가 죽은 것도 폐암 때문이었는데...
그 망할 놈의 담배는 아빠를 데려가고도 모잘랐던지, 이젠 엄마를 데려가 버렸다고 했다.
어째서 내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다.
어째서...
"니 고등학교 다니는 삼년 내내, 내가 니 담임 안했나? 그기 다 니 어머니 부탁 때문인기라. 끝까지 니한테는 비밀로 해달라 하시면서 꼬박 꼬박 등록금 내고, 니 수업할 때 지켜보고... 내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아나? 몇번이나 니한테 말할라 켔는데, 한사코 말리셨데이... 안된다고... 안된다고."
"은혜에게... 은혜야. 엄마다. 미안하다. 그 동안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엄마라 하면서 못살게 굴어서 미안하다. 그래도 은혜야. 엄마한테는 니가 제일 소중했었다. 엄마 물건들 다 팔아가지고, 니 통장에 돈 만들어서 다 부쳤다. 다 니꺼다. 니 대학가고, 시집갈 때 써야 된다. 알았지? 참말로 미안하다. 그래도 엄마 니 준다고 돈 모은 거 하나도 안 쓸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서 약도 안 먹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니까 꼭 아껴써라. 그리고... 은혜야. 엄마한테 니 보다 소중한 건 없다. 이 시계는 니 아빠가 니 가졌다고 처음으로 사준 선물이다. 그래서 니 준거 였지 다른 마음 없었다. 진작 알았으면 창피하게 이런 시계 차고 다니라고 말 안했을긴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은혜야..."
엄마의 편지는 그걸로 끝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건지.
엄마의 사투리는 온데간데 없고, 어색한 표준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니지? 이거... 엄마가 쓴거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말하라고... 나는... 나는 엄마한테 그런 대못 박았는데, 왜... 왜! 나같은 거 뭐가 이쁘다고! 더 살지... 그 돈으로 더 살지 그랬어! 더 살지! 악착같이 살아서 나 보란 듯이 사는 거 지켜봐야지! 그래야지!! 엄마 그 돈 없어도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랬어! 왜!"
첫댓글 엉엉엉..단편보면서 울긴 첨이네요! 잘봤습니다!
태양님 우셨다니;; 반쯤은 성공한 모양입니다 ^-^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효도를 해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효도하는 것도 좋지만 살아계실때 하는게 더 좋은거니까.. 후후. 케리아 님. 정말 소설 잘쓰시네요. 부러워요^^
사랑하나봐님. 잘쓰긴요 ^-^... 저도 처음엔 되지도 않는 로맨스 쓰고... 에휴. 그래도 지금은 되도록 로맨스 보단 감동을 줄 수있는 글이나, 공포? 스러운, 사회 비판 적인 글을 쓰려 노력합니다. 하하;;
히히. 저랑은 딴판;; 저는 로맨스를 많이 쓰거든요. 공포도 가끔씩 쓰고.. 하튼!! 작가가 원하는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소설이겠죠?^^ 우리 앞으로도 소설 열심히 써요~
사랑하나봐님 헤헤 저도 원래 그랬어요. 얼마 전 부터야 조금씩 깨닫고 있죠. 로맨스 보다 감동을 주는 소설이 더 가치있다는 걸요. 물론 인기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