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다송리사람들영농조합법인 대표가 토굴속 장독에 저장된 간장류의 보관 기간을 수첩에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익산=현진 기자
[농촌 Zoom 人] 김진호 다송리사람들영농조합법인 대표
발효식품 만드는 ‘고스락’ 가니 4000여개 장독 진풍경 이뤄
각종 식물·카페 등 어우러져 산책하며 여유 즐길 수 있어
‘동결건조 유기농 생청국장’ 등 20여개 가공식품·간편식 나와
질 좋은 유기농콩만 사용해 지역 농가에 활기 불어넣어
속도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시대, 묵묵히 ‘느림’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유기농산물로 건강한 발효식품을 생산하는 김진호 다송리사람들영농조합법인 대표(45)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다.
전북 익산시 함열읍 다송리에 있는 고스락에는 장독 4000여개가 있어 진풍경을 이룬다.
김 대표가 일하는 전북 익산시 함열읍 다송리 ‘고스락’을 찾았을 때 한번도 보지 못한 이색적인 풍광이 펼쳐졌다. 9만9200㎡(3만여평) 대지 곳곳에 산책길이 이어졌고, 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소나무 숲이 ‘늘 푸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룡점정은 따로 있다. 4000여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장독이 흐트러짐 없이 놓여 있으니 따로 마련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방불케 한다.
“잘 지켜야 할 전통이 빠르게 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선 그렇지 않습니다. 홀대받던 장독이 귀하게 대접받고, 장류와 식초는 납품 시간에 쫓기지 않고 각각에 맞는 발효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으니깐요.”
김 대표는 원래 공무원이었다. 2006년부터 익산시청 건설부서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다 2009년 동갑내기 아내 고세림씨를 만났다. 고씨는 고스락 터를 닦아온 창업자 고태곤 회장(71)의 딸이다.
“장인께서는 ‘건강한 전통 발효식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이 강하셨어요. 조경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단순히 생산단지를 만드는 걸 넘어서 누구나 방문해 쉴 만한 공간을 꾸며야겠다며 소나무를 포함한 갖가지 식물을 심으셨답니다.”
제품 생산에만 초점을 맞춘 조합 경영 탓이었을까. 어느 순간 더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체기가 왔다. 힘에 부친 고 회장이 점점 규모가 커지는 고스락 운영 전반을 맡기에도 무리가 따랐다. 가족의 어려움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김 대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2015년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조합 경영 일선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때부터 고스락엔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방문객에게 흙으로 빚은 것들이 주는 편안함을 오롯이 즐길 쉼터를 제공하겠다며 2018년에는 카페를, 지난해에는 한정식당을 열었다. 휴일이면 하루 2000명이 드나드는 지역명소로 자리매김했다.
다송리사람들영농조합법인에서는 다양한 발효제품을 현장에서 판매한다. 사진은 고스락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는 된장·고추장·청국장 등 유기가공식품.
신제품 연구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원광대학교·전북대학교 등 인근 대학과 협약을 하고 기능성 제품이나 간편식을 개발하는 데 역량을 쏟았다. 이런 노력 끝에 나온 <동결건조 유기농 생청국장>은 대박이 났다. 건조 과정을 거치며 청국장향이 덜 나고, 주전부리처럼 씹는 맛이 좋아 온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건강식으로 소문이 난 것.
<애플초 글레이즈>도 주력상품이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1∼2인가구, 요리에 건강한 감칠맛을 내고 싶어하는 엄마 소비자들 사이에서 인기란다. 사업 초기 된장·고추장에만 국한된 제품 가짓수는 어느새 20여개로 늘었다.
“손님들은 이곳에서 식사하고, 커피 한잔 마시고, 장독대 주변을 산책하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답니다. 이런 고스락을 찾는 이들에게 우리농산물, 전통장류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어 자연스레 사명감이 듭니다.”
고스락은 지역사회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도 한다. 질 좋은 유기농콩만을 사용하는 터라 지역 농가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고 있다. 여기서 거둬들이는 콩만 해도 연간 10∼15t이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류숙희 익산시농업기술센터 소장은 “고스락은 매년 시에서 운영하는 행복나눔마켓에 참여해 1000만원 상당의 유기가공식품을 기증한다”면서 “인근 농가는 물론 지역 관광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고스락은 우리 지역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그리는 고스락의 미래가 궁금했다.
“고스락이란 말뜻을 아세요? 순우리말인데 최고, 정상이란 의미거든요. 우리가 취급하는 콩·고춧가루·쌀·양파 모두 유기농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첨가물 범벅인 가짜 발효식품이 얼마나 많나요. 기본적으로 생산·유통·관광을 아우르는 6차산업을 지향하겠지만 다소 느리고 더디더라도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겠다는 원칙은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갈 겁니다. 저와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농업 기반은 더욱 탄탄해지고 국민은 한층 건강해지겠죠.”
취재를 마치고 떠나려는 기자를 그가 돌려세웠다. “4월 중순쯤 다시 오세요. 그때쯤이면 꽃잔디가 흐드러지게 필 텐데 투박한 질그릇과 화사한 꽃이 기묘한 조화를 이룰 겁니다.”
출처 농민신문 익산=이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