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의 자서전 2
고등고시 준비 때문에 암자에 올라간 명식이의 짐만 챙겨서 다락 속에 넣고 내 짐은 지하실에
내려다 두었다. 김회장의 수행비서 노릇을 하려면 당분간 은주 누나와 헤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은주 누나는 당분간만 헤어지는 거라고 해도 못내 섭섭해 했다.
"누나, 이제 슬슬 바람이나 좀 피우라구. 쓸만한 사내가 아직은 많이 있으니까.
어차피 알찌감치 맘 다져먹고 시집가란 말야."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은주 누나는 내 팔뚝을 꼬집었다.
"나 없는 사이에 맘 놓고 골라야 돼. 젊은 청춘 아깝게 썩여봐야 남는 것 후회뿐야."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니."
"나도 매형 소리 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혼자 청승맞게 사는 거 보기두 싫어."
나는 밤 늦게까지 은주 누나에게 시집가라고 졸랐다. 은주 누나는 싫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친정에서 다리를 놓는 사람이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누나는 자꾸 미루기만 했었다.
누나는 찬성도 반대도 없는 애매한 대답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그것이 여자의 심리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혜는 내 전화연락으로 당분간 만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 직장운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자주 못 만나게 되는 것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척을 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나를 도와줄 만한 녀석들을 불러 모았기 때문이었다.
넙치 형은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그런 큰 회사 근처에는 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내가 여러 번 사정을 해도 넙치 형은 거절했다. 나는 넙치 형 정도의 사내를 찾아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이상의 실력자들이 있겠지만 세파에 물들고 못된 일에 찌는 사내들을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받아들고 김포로 달려갔다. 몇 달이 걸릴지 모르지만 넙치 형이 김회장 곁에 바싹 붙어주기만 하면
웬만한 일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거물 하나 살리고 봅시다. 내가 오죽하면 이런 부탁 하겠습니까"
"난 부자 몸종 노릇하기 싫다."
넙치 형은 한사코 반대했다. 그도 감정적으로 부자가 싫은 모양이었다.
김갑산 영감을 단순한 돈벌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얘기했다. 그의 마음이 조금씩 눅는 것 같았다.
"꼭 내가 나서야겠니?"
"그러니까 찾아온 거 아닙니까. 형, 한번만
"좋다. 한번 부딪쳐 보자."
"지금 당장 올라가죠."
"여기 정리나 좀 하고 가자. 나만 믿고 사는 애들인데...... . 호적초본에도 없는 월급쟁이 되나보다."
"괜찮은 거 한건 하고 죽어야죠. 형도 여태 그냥그냥 살았지 뭐 뽀족한 일 한 거 없잖아요."
"내가 뭘....."
넙치 형은 말끝을 흐렸다. 넙치 형은 나보다 차라리 나은 실력자이면서도 아직까지
좋은 일이라고는 내놓고 자랑할 게 없었다. 한 지역을 맡아 운영하는 지역의 왕초로
군림할 뿐이었다. 그에게 좋은 일을 할 기회도 물론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저 먹고
살고 애들 뒷바라지나 하면서 대우받는 산에서 내려운 뒤에 어째서 그런 길로
들어섰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넙치 형의 지원을 받기로 약속하고 회사로 달려갔다.
"오늘부터 수행비서를 하시오."
비서실장이 근엄하게 말했다. 나는 그 근엄한 얼굴을 한대 쥐어 박고 싶었다.
그러나 김갑산 회장과의 연극을 위해 마음을 지그시 누른 채 업무인계를 했다.
내 업무인계는 간단해서 서류작성만 해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수행비서 자리는
인수받을 일이 많았다. 김갑산 회장의 자잘구레한 사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회장실 안의 책상이 바로 내 자리였다. 내 옆에는 여비서가 한사람 있어서 잔일은 전화며
집무실의 대화가 모조리 도청되고 있는 방에서 근무한다는 건 촉각이 서서 못견딜 일이었다.
그렇다고 도청장치를 갑자기 없애서 의심을 사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넙치 형은 운전사로 취직이 돼고 다른 애들은 대학졸업장과 그 대학의 총장 추천서를 미끼로
내가 계획했던 자리의 말단 사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넙치 형과 같은 차 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자신감을 주는 것이었다.
'도청장치가 갑자기 고장나는 수도 있겠지.'
김회장이 이런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시 신호를 보냈다.
애들이 도청장치를 멎은 것을 확인한 김회장은 내게 넌지시 말했다.
"오늘 밤에 황변호사 만나게 해놓게. 서류 준비하고 녹음할 것도."
열흘 만의 공작이었다. 김회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게 행동했지만 나와 넙치
형은 단 일초라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도청장치가 되는 곳에서 눈치로만
행동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피가 마르는 일이었다. 김회장은 평소처럼 아무
스스럼 없이 행동하고 말했다. 그것은 내 눈에 불가사의하게 보였다.
역시 그는 거물이었다. 일단 퇴근을 한 김회장은 간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는 집 뒤켠에서 차를 타고 황변호사와 만나기로 한 교외로 나갔다.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다. 김회장은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하고 녹음테이프에 자신의
목소리를 상세하게 담았다. 황변호사가 뒤처리를 하는 동안 김회장은 나와 넙치 형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자네들 덕분에 내 할 일을 이제야 했네. 겨우 이제 말일세."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재산분배나 사회환원의 차원이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재산의 반은 사회로 되돌려 주었고
나머지 반도 공평하게, 자식들 입장으로 보면 인색하기 그지 없도록 작성되었다. 우리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수고들 했네."
김갑산 영감이 등받이에 깊숙히 기대며
"아직 그 말씀 하시긴 이릅니다. 우린 지금 쫓기고 있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넙치 형이 백미러를 텃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모른 체하세요."
넙피 형이 재빠르게 말했다. 나는 넙치 형이 돌려주는 백미러를 통해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는 몇 대의 차를 노려보았다.
"형, 속력 내요. 어서."
내가 재촉했다. 김갑산 영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 말도 할 것 같지 않았다.
"눈치채면 여기서 덮친단 말야. 강 건너기 전에 눈치채게 해선 안 돼. 쟤들도 강 건너야 시작할 거니까."
"무슨 얘기예요."
"강 건너야 호젓하잖아."
한끗 위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행이 아까부터 시작된 모양인데도 넙치
형은 이제야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만큼 치밀한 성격이었다.
"속력 좋은 차 두대, 튼튼한 차 두대야."
넙치 형이 한 손을 뒤로 빼서 조그만 깡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요."
"폭약이다. 조그맣지만 성능 좋으니까 조심해. 심지에 불 붙이고 3초 기다려야 돼. 넌 저 커브에서 뛰어내려."
"형은?"
"난 회장님 책임질 테니까 넌 까만차 두대만 바람 빼놔. 그리고 황변호사한테 가봐. 그쪽이 더 급할지 모르니까."
"저 자식들 콩알(총) 잘 박겠죠?"
해."
우리가 작전계획을 짜는 동안 김갑산 영감은 눈을 감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내가 김회장의 어깨를 잡았다. 김회장은 눈을 뜨고 가볍게 웃었다.
"날 여기 내려주고 가게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할일은 다 끝났잖은가."
"유서를 뺏겼을지 모릅니다."
"거기 자네들 사람 있잖은가."
"거긴 없어요. 아무 말씀 마시고 가만 계세요. 제가 엎드리라고 하면 시트를 잡고 엎드리세요."
"나 때문에 괜히 고생들 하네."
김회장은 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넙치 형은 속력을 놓았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자동차 테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두 대는 우리 차의 방향을 막기 위한 것 같았고 나머지
두 대는 우리가 탄 차를 박살내기 위한 것 같았다.
"지프차 조심해라."
"알았어요."
"돈다, 준비해."
나는 김회장을 엎드리게 해놓고 문을 열었다. 넙치 형이 몸을 비틀며 핸들을 마구 꺽었다.
"뛰어!"
넙치 형 목소리가 강렬했다. 자동차는 커브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나는 재빨리 뛰어내려 언덕 아래로 굴렀다. 넙치 형은 둑길을 타고 내달렸다.
자동차 두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커브길을 회전했다. 나는 폭약을 둑 위에 던졌다. 앞서 달리던
차가 폭약을 통과했다. 뒤차가 커브를 돌아 나왔다. 폭약이 터졌다.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섰다.
차에서 뛰어 내리는 사내들 손엔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쉭쉭쉭쉭.
무서운 마찰음이었다. 내가 던진 표창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네 명의 사내를 맞혔다.
나는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뒤따라 오던 지프차의 속력에 당황했다. 무서운 질주였다.
네 사내가 놓친 권총을 발길로 걷어찼다. 폭약은 지프차 앞에서 터졌다. 지프차가 지프차를 들이받았다.
지프차가 충격으로 굴렀다 랜드 크루사에는 건장한 사내 둘이 쓰러져 있었다. 두 사내를 끌어내리고 표창 맞은
사내 가운데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를 운전석에 앉혔다.
"허튼 짓 하면 작두질 당한다. 황변호사 있는 데로 가자."
내가 뒷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작두질이란 형벌이 얼마나 지독스러운 것인지 아는 녀석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딘지 모르겠는데요."
"능청 떨지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너, 회를 쳐야 정신 차리겠어?"
"글쎄 무슨 말씀인지 알아야 모시든지 하죠."
"걸레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예?"
"이 새끼야, 걸레가 그 따위로밖에 안 가르쳤냐구."
"걸레 형님 아세요?"
"네 밑천 확 뽑아주랴?"
나는 녀석의 사타구니를 잡고 목을 눌렀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봐줘요. 하란 대로 할게요."
녀석이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잔소리 더하면 채칼질 한다. 이거 뵈냐?"
'알았어요. 갑니다."
녀석은 내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보더니 갑자기 고분고분해졌다.
채칼질이란 것이 어떤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걸레 패거리라면 구차하게 설명하고 겁 무자비한 행동으로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왕초인 걸레 밑에서 배운 게 그것이었다. 이렇게 큰일을 청부 맡을 수 있는 조직은
걸레 패거리밖에 없었다. 걸레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해방되기 전부터 왜놈들을
못 살게 굴던 지하조직이었는데 해방 이후에도 걸레라고 하는 두목은 여전히 비밀리에
승계되어 내려오는 역사가 깊은 패거리들이었다.
"너, 걸레 본 적 있어?"
"없어요."
"그럼 누구 명령받고 왔냐?"
"형님, 혹시 할배 아닙니까?"
"이 새끼 딴소리는."
"아무래도 할배 같아서 말입니다."
"누구한테 들었냐? 나 본 적 있어?"
"첨인데요."
"그런데 어떻게 알아?"
녀석이 나를 알아본다는 게 신기해 보였다. 그런 소굴에서 빠져 나온지 벌써 여러 해째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곰배 형님이 그러던데요."
"곰배가?"
전혀 뜻밖이었다. 곰배라면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 바닥에서 의리 지키다가 오른손목이 잘려 나간 진짜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곰배가 꼈냐?"
"그러니까 우리가 나섰죠."
녀석은 갑자기 활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걸레 밑에 곰배가 들어갔단 말야!"
"이번 일만 해주기로 했어요."
"이번 일만? 왜?"
"곰배가 말야?"
"그래요. 손 씻은 곰배 형님이 오죽하면 나섰겠어요."
"곰배가 나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냐?"
"첨부터 알았어요. 우리들 보구도 할배가 있으니 특별히 조심하라고 일렀어요.
정 안되면 곰배 형님이 할배하고 담판하겠다고 했어요."
"무슨 갚을 일이 있다더냐?"
"곰배 형님 공장 차렸던 거 몰라요?"
"안다."
"그것 말아먹은 게 김갑산예요. 공장 확장하다 사고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때
주식 사십구 프로 가지고 뛰어 들어와서 야곰야곰 파먹고는 곰배 형님 알거지로 내쫓은 게
김갑산 그 개새끼라구요. 할배 형님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곰배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기 때문에 마음의 갈등을 누르기 어려웠다.
곰배가 명동바닥에 뛰어든 것은 열두 살이란 어린 나이 때였다. 물론 처음에는 구두닦이 소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차츰 선배들 눈에 뜨이는 재질을 보였다 곰배는 파격적으로 열다섯 살에
정식단원으로 승격하여 아낌없이 실력 발휘를 하기 시작했다. 스물여덟 살짜리 청년에게 명동의 일류
신사들이 형님이란 칭호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족보와 서열 때문이었다. 손목이 잘린 뒤에 곰배는
무슨 사업인가에 손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렇게 거덜 내고 나이로 따져서 내가 형편없는 후배인
것만은 속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족보로 따지자면 새카맣고 서열로 따져서야 겨우 맞먹을 정도였다.
곰배하고 한판 붙었을 때 우리 둘은 선배들이 말려서야 겨우 악수를 할 정도로 실력이 엇비슷했었다.
그 뒤로 내가 닦은 실력으로 그런 실력자들 서너 명까지도 해치울 수 있었지만 그때는 곰배 실력이
일급에 속했었다. 어쨌든 그때의 실력대결 이후에 우리는 서열을 나란히 갖게 되었다.
"어떻게 할래요. 곰배 형님한테 가실래요."
녀석이 속력을 늦추고 물었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황변호사 어디 있지?"
"걸레 형님네 애들이 데리고 있을 거예요. 그 쪽은 우리 일 아녜요."
"그럼 곰배는?"
"집에 있어요."
"그럼 우선 걸레 애들 있는 데부터 가자."
"곰배 형님부터 만나는 게 좋을걸요."
녀석은 힘있게 말했다.
"너, 곰배 밥 먹냐?"
"그래요."
"배는 곯지 않냐?"
가보면 알 거 아녜요."
녀석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잔소리 말고 걸레네 애들 있는 데로 가라."
녀석은 뒤를 흘끔 쳐다보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오토매틱의 성능 좋은 랜드
크루사는 질주하기 시작했다. 더 잔소리를 곰배한테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만큼 실력을 갖추고도 의리를 지키기 위해 손목을 잘렸고
곧게살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곰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참아야 한다. 힘겹더라도 참아내야 한다. 이 순간에 옛정과 곰배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른다.
"빨리 달려."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곰배 형님 불쌍하지도 않아요. 할배는 곰배 형님 잘 알잖아요."
녀석이 악받친 듯 한마디 했다.
"모가지가 비틀어지기 싫으면 아가리 닥쳐."
녀석은 시속계를 쳐다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곰배처럼 성실하게 살려는 젊은이에게 이럴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도대체 더러운 부자편에 서서 뭐를 어쩌자는 겁니까? 왜 그렇게 변했습니까.
하나님에게도 그런 곡절이란 게 있나요? 제발 정신 좀 차리쇼. 왜 그렇게 추잡하게 변한 겁니까.
노망 든 겁니까. 하나님도 망령드는 겁니까. 사람들이 하나님 좀 믿고 살게 해주쇼.
내가 지금 곰배 편만 들면 김갑산 영감인지 늙은이인지는 뒈집니다. 곰배는 그럴 만한 실력자라구요.
그런데도 나는 지금 곰배편을 김갑산이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 비록 조잡한 실력이지만 당신과 정말 한판 붙어보고 싶어요.
사람은 장난감이 아니잖아요. 어린애들도 장난감 가지고 그렇게 치사하게 굴지는 않아요.
하나님. 뭐, 속 좀 탁 까놓고 얘기 좀 합시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젠 정신을 좀 차려요.
니기미, 사람 좀 봐줘요.
별장 뒤의 숲길에서 내린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곰배한테 가서 이대로 전해. 내가 일이 끝나는 대로 갈 케니까 딴짓하지 말고 그냥
자 이게 내 진심이더라고 전해."
나는 칼을 꺼내 내 왼쪽 팔뚝을 푹 찔렀다. 피가 튀었다. 옛날에 우리들이 하던 의리의 의식이었다.
결코 내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증표였다. 녀석이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곰배 형님이 알아들을 겁니다. 몸 조심하세요. 걔들 다섯 명인데 모두 콩알 가졌어요."
"알았어 임마. 내 이름이 장총찬이야."
녀석이 콧김도 세게 웃고 차를 향해 뛰어갔다.
나는 숲길로 해서 별장 뒤꼍으로 다가갔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
들어가는 순간에 해치우지 못하면 콩알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 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표창을 꺼내들고 몸을 숨겼다. 살금살금 걸어오는
사내는 조금 전에 돌려보낸 곰배의 부하 녀석이었다.
"너, 왜 왔어?"
"할배 형님이 걱정이 돼서요."
"돌아가. 어서!"
"할배 형님 혼자는 안 돼요."
"내 걱정 말고 어서!"
"쟤들이 나는 아직까지 믿어요. 그러니 내가 들어가서 안심시킨 뒤에 신호를 하면 들어와요."
나는 강인한 인상을 녀석에게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곰배가 후배들을 키운
"좋다. 먼저 들어가라."
"이게 신호예요."
녀석은 딱성냥을 꺼내 보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들어간 뒤에 나는 뒷문에 바짝 붙어서 녀석이 신호를 보내기만 기다렸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만약에 녀석이 나를 속였다면 나는 그 순간에 그들의 콩알을 먹고 죽게 될지도 모른다.
녀석이 그쪽 애들에게 다른 작전을 세우게 한다면 벌써 나는 포위된 상태인지도 모른다.
초조했다. 후회도 생겼다. 차라리 뛰어 들어가서 후닥닥 해치울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하라면...... 적어도 곰배에게서 훈련을 받은 녀석이라면...... 그리고 내가 팔뚝을
찍었을 때 내 의리를 짐작한 녀석이라면......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한 순간, 딱성냥이 켜졌다.
나는 문을 걷어차며 뒹굴었다. 둘러섰던 사내들 손에는 술잔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날렵하게 벽 쪽에 기대어 표창을 날렸다.
쉭쉭쉭 쉬익!
무섭게 빠른 속도였다. 다섯 명의 사내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녀석이 재빠르게 권총을 내 쪽으로 걷어찼다.
"권총을 다 챙겨라."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변호사가 절룩거리며 뛰어나왔다. 녀석이 권총을
"할배 형님 땜에 걸레한테 나는 언젠가 죽게 되겠죠."
녀석이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내로 태어나서 한건 올리고 죽는 건 자랑스런 거다. 걱정마. 내가 죽기 전에 너
먼저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니까."
녀석이 사내들을 묶었다. 나는 황변호사 손에 묶인 철사를 풀어주었다.
황변호사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유서가 바뀌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너는 빨리 가서 차 끌고 와."
녀석이 차를 끌고 왔다. 나는 다섯 사내들을 뒷자리에 몰아넣고 황변호사 옆에 앉았다.
"김회장 집으로 가자."
녀석이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숲 길로 헤드라이트의 불기둥이 자빠지며 달렸다.
황변호사가 비스듬히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할배 형님, 우리 곰배 형님 복수 좀 해줘야 합니다."
녀석이 콧노래처럼 말했다.
"달리기나 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황변호사가 뭐라고 지껄였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곰배와 김갑산 영감과 넙치 형 생각뿐이었다.
중심가로 들어선 차가 곡예하듯 달리고 있었다. 녀석의 운전솜씨가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김회장집 대문은 열려 있었다. 안마당에는 여러 대의 자동차가 있었다. 김갑산 회장 집 일이었다.
경비원이 내 얼굴을 쳐다보고 빨리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넙치 형이 몰고 온 차가 눈에 띄어서
안심이 되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했다. 김회장 방엔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김회장은 소파에 깊숙하게 기대 앉은 채 내 손목을 잡았다. 넙치 형이 그 앞에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형, 별일 없었어요?"
"놓쳤어."
넙치 형이 이렇게 말하고는 텃짓으로 둘러 선 사람들을 가리켰다.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이 무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회장의 자녀들도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들도 다섯 놈이나 잡아 왔어요.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수고했네. 자네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정말 고맙네."
김회장은 힘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김회장의 손을 꼭 쥐었다.
"이 자리에서 밝히죠. 장본인도 저기 있고 하니까요."
나는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을 가리켰다.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그만두게."
김회장이 화는 듯이 말했다.
"그만두다뇨.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사위하고 배다른 자식이 회장님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냥 두란 말입니까?"
나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아무리 늙은이지만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만두래도. 무사했으면 됐잖아."
김회장이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저 친구들은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합니다. 유서도 조작했어요. 황변호사에게 칼을 대고
유서도 바꿔치게 했습니다. 저 녀석들을 족치면 다 나오게 됩니다. 뭐가 두려워 이러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제가 직접 경찰에 고발하겠어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이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 누굴 어떻게 보구 이래. 무슨 근거로 그 따위 헛소리를 하는 건가. 감히 어느 앞이라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있어, 이놈들아. 너희들이 사람새끼냐? 늑대도 그렇게 철면피하진 않아, 이놈들아."
기획실장을 올려찼다. 카펫 위에 벌렁 자빠졌다. 몸을 피하는 비서실장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기획실장 위로 나가 떨어졌다. 나는 분에 못 이겨 두 사내를 사정없이 갈겼다.
김회장은 눈을 감고 고개만 흔들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 해라. 이렇게 해결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넙치 형이 내 어깨를 잡았다.
"형, 이거 놔요. 이 새끼들은 죽어도 싼 놈들예요. 저의 부모를 죽이려던 흉악한 패죽여야 해요."
"그건 다 알아. 회장님도 알고 계셔."
"그런데 왜 내버려 두라는 겁니까? 뭐가 무서워요. 무섭고 두려운 거 있으면 말해요.
내가 다 때려부술 테니까."
넙치 형은 나를 소파에 강제로 밀어 앉혔다. 그때까지 김갑산 회장은 입을 꼭 다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카펫 바닥에 누워 있었다. 마누라인 듯한 여자 두 사람이
눈을 내리깔고 피를 닦아 주고 있었다. 변명하거나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두들겨 팼기 때문에
내 가슴은 더 답답했다.
"이봐, 이 천하에 죽일 놈들을 뒈지게 내버려 두지 않고 왜 껍죽거려?"
두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고는 말없이 일어났다.
"참으쇼. 회장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까요."
전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발길로 그를 걷어찼다.
"아가리 닥쳐. 너도 한패지. 이 새끼야 날 속일 생각 말아."
전무가 나뒹군 채 엉금엉금 기어서 사람들
쪽으로 갔다. 김회장이 눈을 떴다.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황변호사 이리 오게."
변호사가 절룩거리며 걸어왔다.
"내가 말한 대로 이 자리에서 유언장 다시 만들게."
"알겠습니다."
황변호사는 가방을 열고 아까처럼 다시
"장 군하고 이리 들어오게."
김회장이 안방을 가리켰다.
나와 넙치 형이 따라 들어갔다.김회장은 보료 위에 앉아서 담배를 빼물었다.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겠나?"
"말 같은 소릴 하십쇼."
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 말 같은 소린 아냐. 그러나 내 신세가 돼 보면 이런 것도 말이 된다는 걸 알 걸세."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무슨 약점 잡히신 겁니까?"
"그런 건 없네."
"그렇다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회장니을 죽이려고 한 것도 자식입니까?
그런 자식을 믿고 살아 있다는 게 원통하지도 않단
"첫째는 내가 부끄럽네. 둘째는 내 자식일세. 셋째는 내가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네. 그게 이유일세.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말일세."
나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늙은이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너무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데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재산을 분배하고 조용한 데 가서 쉴 생각일세. 자네들하고 말일세."
"우리요?"
나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이렇게 반문했다.
"평생 살 수 있는 걸 만들어 놨네. 자네들도 하고 싶을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거고. 싫은가?"
뭔가 해야지요."
"누가 하지 말랬나. 다만 내 곁에, 나 죽을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달라 이거지."
"비서실장하고 기획실장한테도 분배하는 겁니까?"
"그 아이들도 내 자식 아닌가."
"딱하십니다."
"자네 눈에도 내가 딱해 보이는 모양이구만."
나는 피식 웃었다. 김회장이 나와 넙치 형에게 하얀 사각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내 성의일세. 많지는 않지만 그거면 자네들이 뭐든 해볼 수는 있을 걸세."
"이게 얼맙니까?"
내가 물었다. 김회장이 웃었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웃음이었다.
넙치 형이 봉투를 밀어내 놓고 말했다.
"저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건 넣어 주십시오."
김회장이 또 웃었다.
"자네들 마음 알아. 그러나 이건 내가 할 일일세. 나 좀 편히 죽게 해주게나."
나는 그 순간에 곰배 얼굴이 떠올랐다. 이 정도의 돈으로 곰배가 잃었던 공장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시 시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회장님, 그룹 산하의 B공장 사려면 얼마나 줘야 합니까?"
"그건 왜 묻나? 그게 욕심나는가?"
"그렇습니다."
"그건 이미 상속한 거라네."
"꼭 달라고 해도 말입니까?"
"저 혹시 그 B공장 인수하실 때 기억나십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나지."
"그 공장 본래 주인 기억하십니까?"
"잘 모르겠네. 젊은 사람이 고전한다고 해서 인수하라고 했지. 손해는 봤겠지만
적당한 값은 치렀을 걸세."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공장 주인은 제가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알거지신셉니다.
합자형식으로 했다가 한푼 못 받고 쫓겨났습니다. 그때 인수 책임자는 누굽니까?"
"무슨 얘긴지 알겠네. 자네가 이미 실컷 매질했잖은가."
"그럼 기획실장 말입니까?"
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기획실장이 곰배를 알거지 만든 게 확실한 것 같았다.
"그 공장 돌려주실 수 없나요?"
"만약 인수할 때 억울하게 했다면 보상을 해줄 수 있지만 공장을 되돌려줄 순 없지.
시설비며 확충사업으로 몇십 곱은 들어갔을 테니까."
"그 공장 상속자는 누굽니까."
"바로 그 녀석일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주신 돈을 그 사람을 주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사실은, 아까 회장님을 쫓아온 녀석들은 그 친구의 부하들입니다.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이
좋은 조건으로 그들을 매수한 있었지만 회장님한테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더 악착같이 꼬인 것이지요. 회장님이 모르시는 일인지는 모릅니다만 그 친구는
회장님이 그런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알겠네. 내가 사실을 조사해 본 뒤에 충분하게 보상하도록 하겠네."
그때 황변호사가 복사한 서류와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들어왔다. 김회장이 확인을 하고 다시 도장을 찍었다.
"황변호사가 가족을 모아 놓고 직접 발표를 하게. 한 부씩 사본을 만들어서 돌려 보게 해주고."
"알았습니다."
황변호사가 나갔다. 김회장이 넙치 형에게 차고 있던 시계를 내주었다.
'주게나."
넙치 형이 절을 하고 받았다.
"이건 자네가 간직해 주게."
김회장은 반지를 빼서 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걸 받았다.
"그만 가겠습니다. 내일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고생 많았네."
나와 넙치 형은 밖으로 나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네가 조금 심했던 모양이다."
"저런 새끼는 좀 당해야 해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비서실 직원에게 물었다.
"늑골이 나가고 무릅뼈가 금갔답니다."
"둘 다 말야?"
"비서실장님이 더 심해요."
"뒈지진 않을 거야. 서너 달 고생 좀 하겠지."
우리는 밖으로 나와 랜드 크루사가 기다리고 있는 마당으로 갔다. 녀석이 하품을 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곰배 형님한테 간다고 전화했어요."
"그래 가자. 형도 같이 갈래요?"
"나도 오랜만이니까 얼굴이나 보러 가자."
녀석은 신바람이 났는지 속력을 놓았다. 계속 질주하면서 일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모든 게 잘 됐으니까 걱정 말고 가기나 해."
속도계의 바늘이 140을 가리키고 있었다.
응암동 산꼭대기의 연립주택 앞에서 내렸다.
"저 끝 방입니다."
녀석이 가리킨 곳은 초라하게 생긴 방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소주병 옆에 앉아 있던 곰배가 벌떡 일어났다.
"기다렸다."
그러고는 넙치 형에게 꾸벅 인사를 햇다.
"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죄송합니다."
"넙치 형이 너 보고 싶대서 같이 왔다."
두 사람이 악수를 했다. 곰배는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까칠했다.
"긴 얘기 말자. 애들한테 얘기 다 들었다. 네가 그렇게 당한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그 늙은 여우가 그럴 리 없단 말이다. 난 돈이필요한 놈이 아냐. 돈
벌려면 벌써 벌었어. 난 복수가 필요한 놈야."
곰배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런 곰배의 어깨를 죄어 잡았다.
"안다. 네 맘 모르면 내가 여기 오질 않았어. 그 늙은이, 그래도 사람 되려고 악 쓰더라.
그게 가상한 일이 아니고 뭐냐."
"나를 달래려고 하지마. 난 해내고 말 테니까."
"이 새끼가 내 말도 못 믿는구나. 임마, 나도 너 이상 성질대로 사는 놈야. 내가 그
늙은이한테 이걸 받은 건 그 늙은이가 그래도 사람 같아서 받았어. 넙치 형도 지켜봤기
곰배가 꿈틀거렸다.
"너 내 말 안들으면 그냥 안 둔다."
내가 소리 질렀다. 곰배가 피식 웃었다.
"한판 붙자. 네 실력 안 본 지도 오래됐다."
"그럼 이기는 놈 말 듣기로 할래?"
"그게 우리 방식이지."
우리는 뒷산으로 올라갔다. 넙치 형이 승부를 빤히 안다는 듯이 웃으며 따라왔다.
우리들의 과거를, 우리들의 의리와 사내다움을 아는 넙치 형이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둘이 악수나 하고 붙어라."
넓은 능선이 나오자 넙치 형이 정식으로 결투를 붙여 줬다. 곰배와 나는 악수를 하고 웃옷을 벗었다.
우리는 한 발짝씩 다가섰다. 녀석의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빈틈이 없었다.
서너 번 자리를 바꿔 잡은 우리는 공중으로 떴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 다시 겨루었다.
곰배가 계곡으로 또르르 굴렀다. 내가 뒤쫓아가서 멱살을 옭아 쥐었다. 곰배가 이빨을 앙다물고 말했다.
"내가 졌다."
달빛은 여전히 밝았다. 넙치 형이 안 주머니에서 사각봉투를 내밀었다. 곰배가 넙치 형을 쏘아봤다.
"나하고 한판 더 붙자. 이번에도 이긴 사람 맘대로다."
"난, 형한텐 져요."
"그럼 됐다. 이것도 받아라. 김회장이 너 주라고 한 거니까."
소리내어 울었다. 곰배의 울음소리는 메아리 되어 되돌아오고 있었다.
곰배 손에 들려진 하얀 사각봉투 두 개가 달빛을 받아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밤새 마신 술이 덜 깬 채 넙치 형과 나는 곰배네 집에서 나왔다.
김갑산 회장은 이미 기자회견을 끝내고 짐을 싸고 있었다.
"회장님, 작별인사하러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고기는 물가에서 놀아야잖습니까."
"가끔 뭍에 올라앉아 세상 구경도 해야잖나, 이 사람들아."
"돈 떨어지면 용돈 타러 놀러가게나 해 주세요."
"싸움 한판 하고 날렸습니다. 엊저녁 달빛 하나는 기차게 밝았습니다."
"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B공장 보상금 나오면 저희들이 근사하게 한잔 사겠습니다."
"먹고 사는 건 걱정없게 해준다고 약속했잖는가. 이 늙은이 한번 믿어 보게나."
김회장은 짐 꾸리는 걸 팽개쳐 두고 몇 번이나 사정을 했다. 같이 가서 1년 만이라도
같이 있어 주면 충분한 대가를 해주겠다고 했다.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질 사내 녀석들에게 회장님 심심풀이나 되라는 말이십니까?"
김회장은 넙치 형을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나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한참만에 나온 김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자네들, 내 친구라는 거 잊어선 안 되네. 그건 약속할 수 있나?"
"거럼, 거럼. 김갑산 너는 내 친구다."
내가 이렇게 소리 질렀다.
짐 싸던 일꾼들과 가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장총찬, 넙치, 너희들은 내 친구다."
김회장이 맞받아 소리쳤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김회장 얼굴에 행복이 충전되는 걸 나는 그 순간에 느꼈다.
넙치 형도 나와 꼭같은 표정이었다.
첫댓글 어찌 되었든...노년에 마음 통하는 친구를 얻게된것은 큰 축복이고 성공한 인생인듯...^^
그리짧게 직장을 끝내게 되나 봅니다....소설은 신나효...감사합니다
잼나게 잘봤읍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
잘 읽고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
즐겁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