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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 兪應孚( ?~1456)】 「불의에 꺾이지 않는 무인」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 유응부
유응부(兪應孚, ?~1456)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그는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습은 엄숙하였으며, 씩씩하고 용감하며 형 유응신(兪應信)과 함께 활을 잘 쏘아 새와 짐승을 쏘아 맞지 않음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항아리에는 식량이 없었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포천의 논밭에 나갈 때 하루는 말 앞에서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본 벽량이 활을 당기자, 활시위 소리와 함께 기러기가 떨어졌고, 이 것을 본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1453년에는 평안좌도 도절제사에 임명될 정도로 세종과 문종이 그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벽량이 함경도 절제사가 되었을 때, 남아의 호연지기를 읊은 시가 전한다.
장군의 위덕이 국경을 진압하니 (將軍持節鎭夷蠻)
변방에 먼지가 맑아지고 군사들은 졸고 있네 (塞外塵淸士卒眠)
긴 낮 빈 뜰에 구경하는 것이 무엇인가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백 마리 다락 앞에 앉았네 (良鷹三百坐樓前)
그러나 1455년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 되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 2품에 올랐으나, 다음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모의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를 세운 공신 중에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가리켜 말하기를, “권모(權某)와 한모(韓某)를 죽이기는 이 한 주먹이면 족한데, 어찌 긴 창과 큰 칼을 사용하겠는가?” 하며 이를 갈았다. 이들은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일을 순조롭게 하기 위하여 연회석상에서 칼을 차고 임금을 지키는 별운검(別雲劒)으로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과 유응부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왕은 운검(雲劒)을 차지 못하도록 명하였고, 또한 세자도 질병 때문에 연회장에 나오지 못하여 난관에 처하였다.
그러자 유응부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되오. 비록 세자가 나오지 않았만 주요 신하가 모두 있어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 호령한다면 하늘이 주신 기회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않될 것이요”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굳이 말리면서 이르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왕이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요. 만약 이 창덕궁에서 거사를 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듣고서 경복궁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 없으니 훗날을 기약합시다” 하여 이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자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려 성삼문 이하 6명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 와서 국문을 받았다. 세조가 친히 말하기를, “너는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느냐” 하니, 유응부는 똑바로 임금을 쳐다보며, “연회가 있는 날 한 칼로 족하(足下: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 세조를 가르킴)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였으나, 간사한 자(김질)의 밀고로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 족하(足下)는 빨리 나를 죽여라” 하였다. 이에 세조가 말하기를, “너는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으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였다.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벽량은 성삼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서생(書生:文官)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려. 지난번 사신을 초청하여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 하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하더니 오늘의 화를 자초하였구려.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는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 없는 선비에게 물어보시오”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세조는 더욱 화가 나 달군 쇠를 가져 오게 하여 그의 몸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 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들의 옥사를 친히 다스리며 세조는 하교하기를, “당대에는 난신(難臣)이요, 후세에는 충신(忠臣)이라” 하며 아직 왕권이 위태로운 지경에 그들을 벌주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였다. 벽량의 집에는 평소 거적으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는 양식까지 끊어지는 구차한 생활을 하였다.
죽던 날 그 부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살아서는 편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도 큰 화를 얻었다” 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에서 가산을 몰수할 때, 방 안에는 떨어진 짚자리만 있었으며, 아들은 없고 딸만 둘 있었다 한다. 정조 15년(1791)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이 내려지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목(忠穆)이 내려졌다.
세 의인(義人)을 모신 충목단
충목단은 무봉리 입구 길가 옆 왼쪽에 있다. 영조 22년(1746)에 건립된 유허비(遺墟碑)는 정․측면 각 1간의 정방형 사모집에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1.5m, 폭0.7m의 규모이다. 정면에는 ‘朝鮮國忠臣 兪摠管應孚遺墟碑’라고 세로로 새겨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사방 측면에 반쯤 벽을 치고 그 위는 나무로 홍살을 만든 비각((碑閣)은 단간 목조 기와집이다. 옆에는 ‘忠穆壇’이라 편액이 달린 솟을대문이 있고, 담장을 둥글게 두르고 안에 3개의 비단(碑壇)을 만들었다. 비단은 약간 볼록한 봉분 3개를 만들고 옆에 기단을 놓고 세웠는데, 가운데가 ‘총관유응부선생(摠管兪應孚先生)’, 왼쪽이 ‘한남군이어선생(漢南君李**先生)’ 그리고 오른쪽에 ‘병사양치선생(兵使楊治先生)’을 모셨다. 이어(李어)는 한남군(漢南君)으로 세종의 4째 서자(庶子)이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을 봉양하였다는 죄로 어머니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사약을 받고 죽자, 온순하고 효성스러웠던 그는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함양(咸陽)에 유배되었다. 1457년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죽음에 몰렸으나, 세조의 동정으로 살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양치(楊治) 선생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어느 분인지 알 수가 없으나 대략 단종 복위를 힘쓰다 죽은 분으로 생각된다.
이 사육신의 단종 복위를 일러 후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으니, 진정 세상에 의(義)는 무엇이고, 충(忠)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누가 신하가 아니리요마는, 지극하다 육신(六臣)의 신하 노릇함이여! 누가 죽지 않으리요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는 임금을 받들어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는 임금께 충성하여 신하된 절개를 세 웠다. 세조가 정승이 되어서는 공(功)을 주공(周公)에 견주고, 왕 위에 나가서는 덕을 우순(虞舜)에 짝하여 높고 크고 넓어서 이름할 수 없으니, 비록 육신(六臣)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그에게 무슨 누(累)가 되리오. 백이(伯夷)는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었으나 주나라 무왕(武王)의 덕이 떨어지지 않았고,엄자릉(嚴子陵)은 한(漢)나라의 광무제(光武帝)가 친구로서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고기를 낚았지만, 광무제의 공에는 부족함이 없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金石)같은 단심(丹心)만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가게 하였더라면, 단종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덕도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에 큰 화에 빠졌도다.” 이어 조문(弔問)을 표하였는데,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뭇 구멍이 막혔도다 (礪氣初濟 衆窮爲塞)
서리와 눈은 희게 덮였는데 소나무만 홀로 푸르도다 (霜雪皎咬 松獨也碧)
신하의 머리는 임금 위한 마음으로 희었거니 (有臣之首 愛君而白)
그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굽힐 수 없는 절개로다 (有頭可截 節不可屈)
다른 사람의 곡식은 죽을지언정 먹지 않았으니 (他人之栗 寧死不食)
백이․숙제가 뛰놀던 곳의 바람이요 도연명 동 (孤竹淸風 柴桑明月)
네의 달이로다
흙 가운데 귀신이 있으니 원통한 피가 한 웅큼이네 (土中有鬼 寃血一掬)
달군 쇠로 배를 지지는 잔혹한 형벌을 받는 상황에서, 유응부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용맹하여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며 형리들을 호령했다.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첫댓글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