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도.베를린필
요하네스 브람스 (1833 - 1897)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낭만파의 후미를 멋지게 장식한 브람스는 오페라를 제외한 많은 분야에 걸쳐 뛰어난
명작들을 남겼는데, 바이올린 협주곡은 작품 77의 이 한 곡밖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브람스의 최대걸작의 하나 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고금을 통틀어서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그것들과 더불어 3대 협주곡의 하나로 불리는 명곡 이다.
곡의 구조는 별로 신기하지 않으며 베토벤의 협주곡과 매우 비슷해서 지극히 클래식하다. 또 구조 이외에도 베토 벤과 브람스 간에는 여러 가지로 유사한 점이 있다. 예컨대 똑같이 D단조라는 것, 전원적이고 목가적 정서가 많이 담겨져 있는 것 등을 우선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브람스적인 것이 그의 다른 곡보다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제1악장 서두에 나오는 제1주제 의 견실한 맛, 그에 이어지는 중후한 부분 같은 것은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 징은 이 협주곡이 1878년에
작곡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납득된다. 즉 1875∼80년경, 특히 1877년부터 79년까 지의 3년 동안은 브람스가 장년에 접어들면서 가장 많은 일을 한 시기다. 제1, 제2의 교향곡, 《대학 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등이 잇달아 태어났다.
이 시기에 브람스는 주로 빈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했고, 여름에는 시타른베르거 호반의 투창에서 작곡에 전념하 였다. 그리고 그 여름의 창작시기에는 번거로운 세상사에서 떨어져 철저히 작업에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 의 체취가 풍기는 텁텁한
곡들을 쓰기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들은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뒤였기 때문에 기교적으로도 무리가 없고, 원숙한 브람스 자신의 모습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1877년 9월에 브람스는 바덴바덴에서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의 연주를
들었다. 그리고 그 연주에서 얻은 감명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게 된 직접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작곡에 임하여 언제나 신중했던 브람스는 얼 른 손대지는 않았다. 겨우
붓을 들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피서를 겸해 투창에 머물던 1878년
7 월경 이였다. 그리고 8월에는 4악장으로 되는 협주곡의 구상이 완료되었다. 그 뒤 8월 21일에는 요아힘에게 제1악 장의 독주 바이올린 파트를 보내어 그의 의견을 구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그것을 놓고 서로 의견이 교환되었다. 요아힘에게서는 이런 회답이
왔다. [당신이 4악장으로 되는 협주곡을 쓰고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보내준 독주
파트는 면밀히 조사해서 몇 군데 수 정해 봤습니다만, 전체 스코어를 보기 전에는 분명한 의견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브람스는 처음에는
교향곡처럼 4악장으로 구성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11월에 브레슬라우에서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간 두 악장은 없애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지요 - 그 대신에 조용한 아다지오를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협주곡은 처음에 예정했던 4악장 형식에서
전통적 3악장 형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서 빼버린 두 개의 악장은 나중에 《피아노 협주곡 제2번》(작품 83)의 중간 악장에 전용되었다고도 하고, 이 바이올린 협주
곡에 이어 스케치된 제2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쓸 예정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지지부진한 가운데서도 브람스는 요아힘과 연락을 취하면서 바이올린
파트를 여러 가지로 수정했다. 연주기교 면에서 보아 어려운 대목에서는 요아힘은
[나처럼 손이 큰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람스는 요아힘의 충고를 그대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요아힘은 브람스의 그와 같은 태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요아힘은 브람스의 지나친 신중성에 안달을 하면서 이듬해인 1879년 1월 1일에 초연하기로 날짜를 정해 놓고, 그에 맞도록 하라고 거듭 브람스에게 독촉했다.
그리고 손수 카덴짜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초연은 예정한 날짜에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있었는데, 요아힘이 독주를 맡고 브람스가 오케스트라를 지휘
했다. 그리고 서둘러 마무리했고 연습도 충분치는 못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고 좋은
평도 받았다. 그 성공에 기분 이 좋았던 요아힘은 런던을 비롯한 각지에서 여러 차례
연주했고 자기의 주된 레퍼토리로 삼았다.
또 벨기에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자이도, 그 곡을 자기의 주곡목으로 채택해서 많이 연주했다. 그리고 요아힘의 제자들도 당시 15세였던 마리에 졸다트를 비롯하여 모두가 이 곡을 다투어 연주했다. 그렇게 해서 이 곡 은 급속히 세계에 퍼졌다.
관현악 부분을 피아노로 편곡한 악보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클라라 슈만에게 보내 어져서 그곳에서 클라라의 피아노와 요아힘의 수제자
후고 헤르만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다. 또한 이 곡은 작곡에 있어서 많은 의견을 주었던 친구 요아힘에게 헌정되었다.
그런데 현재 쓰이고 있는 악보는 초연 당시의 것과는 다르다. 요아힘과 다시 서신 왕래를 하면서 많은 충고를 받았다. 이 곡이 짐로크사에서 출판된 것은 1879년 가을이었다.
악기편성 : 독주 바이올린,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4, 트럼펫 2,
팀파니, 현5부
제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 3/4박자 △
소나타 형식. 처음에 오케스트라에 의한 주제의 제시부가 있다 그런 뒤에 독주 바이올린이 곁들여져서 독주 제시 부가 따른다. 제1주제는 선이 굵고 견실한데, 어딘가 목가적 취향도 담겨져 있다. 독주 제시부 다음에는 오케스트라만의 연주가 따르고 곡은 전개부에 들어간다. 곧 독주 바이올린도 가담하여 제시부의 재료를 여러 각도로 처리 한다. 그러다가 오케스트라에서 다시 제1주제가 연주되면서 곡은 재현부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독주 바이올린에 의한 기교로 카덴짜가 연주되고 이어 코다로써 맺어진다.
그런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카덴짜는 요아힘이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의 것이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다.
제2악장 아다지오, 2/4박자 △
3부 형식. 먼저 관악기군에 의해 느릿하게 시작되는데 그 가운데서 오보에가 떠올라
아름다우면서 일말의 애수가 깃들인 선율을 연주한다. 사라사테는 이 부분에 대해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이 연주되는 긴 시간, 바이올린을 든 채 스테이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참기 어렵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윽고 독주 바이올린이 이 선율을 장식하는데, 그 뒤 곡은 중후한 중간부에 들어간다. 이어서 제1부를 자유롭게 재현시키는 제3부로 넘어간다.
제3악장 알레그로 지오코소, 마 논 트로포 비바체, 2/4박자 △
불규칙한 론도 형식. 이 악장의 연출지정은 원래 <알레그로 지오코소(빠르고 즐겁게)> 뿐이었는데, <논 트로포 비 바체(너무 지나치게 빠르지 않도록)>를 곁들여 지시하지 않으면 연주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요아힘의 충고를 받 아들여 지금과 같은 지정이 되었다. 집시 스타일의 색채감이 풍부하고 경쾌한 주제가 특징저이다. 끝부분은
터키 행진곡 스타일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인다. 이 협주곡이 완성된 수년 후, 당시 10세 될까말까한 후베르만이 이 곡을 연주 한 일이 있었다. 천재나 신동이 따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브람스도 연주가 진행됨에 따라 끌려 들어가서 그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내밀고 경청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그는 악사 대기실로 달려가 연주 도중에 박수가 터져 서 기분을 잡쳤다고 비관하는 이 소년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으면서 이런 말로 위로했다. [그렇게 예쁘게 켜는 게 아니었어]라고.
자료출처-www.orfe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