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驪興閔氏 大宗會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민병권[閔丙權]
해평윤씨 놀라운 힘 !
해평윤씨 영의정 윤두수 부친 윤변 가문이 여흥민씨 좌의정 민정중 고조 민사용 가문을 대적할 힘이 있는가? 민사용 가문이 어떤 집인가 ? 조선 조정을 쥤다 났다 하던 [슈퍼파우어맨과 퀸] 가문이 아니던가 ?
조선 왕실의 태조 이성계 이래로는 제일 호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흥선대원군을 [원 KO 펀치]로 권좌에서 날려버린 가문이 아니던가 ? 이런 가문을 해평윤씨가 따라 잡을 수 있는가? 있다. 해평윤씨 가문은 과환과 벌력에서 여흥민씨 가문과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다. 민사용 가문이 요직에 오른 정2품 판서급이 약 28명이다. 윤변 가문이 약 27명이니 바짝 추격하는 숫자이다. 민씨 가문이 종2품 참판급이 약 32명인 반면 윤씨가문이 약26명이니 이 숫자도 적지 않다. 민씨가 상신에서는 7명으로 윤씨 4명보다 앞섰지만, 문과 급제자 수에서는 83명의 민씨를 윤씨가 86명으로 앞질렀다.
이것이 범상한 일이 아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장,차관급 인사에서도 민씨 가문과 대등한 경쟁력을 보이면서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의 수에서는 오히려 앞선 이 윤씨 가문은 권력의 세계에서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 민씨 모양 왕비를 배출했는가 ? 했다. 왕비 한 명을 냈다. 그러나 이 왕비 한 명은 여흥민씨 명성황후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이 윤씨 가문이 배출한 왕비 즉 순정효황후는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계비로서 비극의 한가운데 있었을 뿐이다. 명성황후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이 윤씨 가문의 황후는 세도는 고사하고 나라의 주권을 잃은 비운의 주인공일 따름이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세도 가문이 아니면서 과환이 세도 가문과 경쟁력이 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왕비다운 왕비 하나 나오지 않은 이 윤씨 가문! 조선 최강의 세도 가문의 하나인 민씨 가문을 누르려는 이 기세는 분명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 가문이 자랑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평윤씨 윤변 가문 창업 쌍두마차
이 가문의 파조 윤변은 1493년에 태어났고 1549년 몰했다. 호는 지족암이고, 중종14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이 해에 조광조가 투옥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대궐에 가서 정암의 무죄를 호소했다. 이로써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드디어 1522년 문과에 급제하여 그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성균관 학유를 거쳐 해남현감, 군자감정 등의 벼슬에 그쳤다.
그러나 지족암이 세상을 떠난지 10년 가까이 되었을 때 이 집에 복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들 윤두수, 근수가 1558년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형은 영의정에 오르고 동생은 대제학이 되었다. 윤변 가문의 창업은 윤두수, 근수가 이끄는 쌍두마차의 이원 체재이었다.
해평윤씨 윤변 가문 왕기가 심청을 부리다 !
복은 왕기라는 놈이 갖고 다닌다. 왕기는 10년 가뭄에 가랑비 뿌리듯 아주 인색하다. 이 놈은 심청이 많고 변덕스럽고 제 멋대로다. 윤두수,근수는 한 뿌리에서 나온 한 형제라도 받는 기운이 달랐다. 살아서 두 형제의 기운은 골랐으나, 사후의 기운은 고르지 않았다. 대제학 윤근수의 집에서는 문과 다섯장에 유고나 유집이 있는 선비가 열두어명에 그치는 정도이었으며 모든 기운이 영의정 윤두수 집으로 몽땅 몰려 갔다. [윤두수 집은 별도로 보기로 하자] 같은 몸이나 다름없는 형제이지만 기운이라는 괴물은 한 형제를 시기하듯 다른 모습으로 바꾸고 바꾸어서 종내는 각각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래 두 동생 윤두수와 근수는 영의정과 대제학으로 영광을 극했으나, 위에 두 형 담수와 춘수는 포의로 세상을 마쳤다. 담수의 아들 현과 춘수의 아들 호가 각각 문과에 급제하여 숙부의 기운을 함께 받는 듯했으나 끝내 왕기란 이 괴물은 이 두 집을 외면하고 말았다. 담수의 집에서는 유고나 유집이 있는 선비가 약 8명을 배출했을 뿐이며, 춘수의 집에서는 호 이외에 문과 2장이 나오는 것으로 그쳤다.
해평윤씨 번성은 오음[윤두수]의 왕기 덕분 !
해평윤씨 윤변 가문의 번성은 오음 대감의 왕기 덕분이다. 문정공 영의정 오음 윤두수의 왕기는 조선 한양 왕업을 굽어보고 돈 임진강의 멋떨어진 기맥을 닮은 듯 500년을 두고 유유히 흐르며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오음이 누군가 ?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항복,이덕형 등을 수하에 두고 난리를 겪는 나라의 어려움을 혜쳐나아갈 길을 신중하게 이끌어 간 명재상이 아니던가 ? [오음 이야기는다음에 더 자세히...]
오음은 본인도 걸출했지만 자손도 뛰어났다. 정승,판서 아들 손자는 무조건 모두가 그 영광을 그대로 승습한다는 말은 시새움으로 하기 쉬운 말일 뿐이다. 오음 형제를 보면 알지 않는가 ? 정승보다 더 영광으로 여기는 대제학 윤근수 집은 그 후손이 번성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이것은 왕기가 빠져 나간 탓이다. 사람에 생명이 있듯이 가문에는 왕기라는 것이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사람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왕기는 정승, 판서,대제학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런 왕기가 오음 윤두수 집에 꼼짝 못하고 붙들려 있었다. 가만히 오음 집을 들여다보면 오음의 왕기는 그 아들을 잘 두었기 때문에 더 성해진 것이다. 오음의 집에 5룡이 나왔다. 그 이름은 방, 흔, 휘, 훤, 우이다. 다섯 명이 모두 급제를 했다. 앞에 4명은 문과, 끝에 1명이 무과 급제를 하였다. 윤방은 영의정, 윤흔은 지중추부사로 정민의 시호를 받았으며, 윤휘는 형조판서, 윤훤은 관찰사, 윤우는 방어사를 지냈다. 오음의 왕기는 손자 대에서도 성했다. 영의정 윤방의 아들 이지가 문과하여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지의 동생 신지는 선조의 딸 정혜옹주와 결혼, 해숭위가 되었으며 시.서.화에 능했다. 윤흔의 아들 취지가 동지중추부사, 윤훤의 아들 순지가 공조판서를 지냈다. 해평윤씨 윤변 가문에 변덕을 부리며 도망가는 왕기를 오음과 그 아들, 손자들이 합심해서 잡은 덕에 이 가문의 번성이 반백년 계속되었던 것이다.
해평윤씨 부마[윤신지] 집 융성 끝에 비극
임금의 사위[부마] 해숭위 윤신지는 시호가 문목공이며, 오늘 우리 국군의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도총관을 지냈다. 아들 지와 구가 모두 문과 급제하여 지는 이조참판, 구는 문학이 되었다. 이 집은 그 부마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판서 하나 못하고 또 당상관도 못하면서 벼슬의 막을 내렸다. 부마 윤신지 아들 이조참판 윤지의 집은 임금 사위의 화려했던 추억을 그리워하며 벼슬 하나 없는 포의의 집으로 500여년을 내려갔다. 이것만 봐도 왕비나 부마 집 자손은 그저 가만 앉아 있어도 벼슬 더미에 앉으려느니 하는 생
각은 빗나갈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부마 윤신지의 아들 둘이 임금 사위라는 체면을 겨우 살릴 정도의 벼슬살이를 끝으로 손자 증손 모두가 포의로 일생을 끝냈다. 그런데 부마의 증손자 윤상명 집에 왕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죽은 듯 사방이 잠잠하던 집에 기운이 돌았다. 상명의 작은 아들 득화가 문과하여 대사헌이 되고, 득화의 종손자 명렬이 문과하여 이조참판에 오르면서 활기가 생겼다.
이조참판 윤명렬 집, 대사헌 윤득화 집, 득화의 동생 포의 득녕 집 "치,선,구"자 돌림에 벼슬이 쏟아졌다.
1.명렬 집 아들에 치영 [문과 승지],손자에 종선 [문과 이조참판] 의선 [판돈녕] 횡선[ 문과 이조참의] 우선 [시종부경], 증손에 용구 [찬정]
2.득화 집 증손에 치정 [문과장원 교리] 치겸 [문과장원 우참찬 시호 정민], 현손에 경선[문과 우부승지]
3.득녕 집 증손에 치희 [문과 판돈녕 시호 문헌], 현손에 정선 [문과 이조참판] 용선 [의정대신 시호 문충]
이제 지질이도 행운이 없던 이 부마 집에 경사가 났다. 이조참판 윤명렬의 손자 의선은 순조 제3녀 상덕은 공주와 결혼하여 남영위가 되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옛날의 광영을 회복하였다. 부마 윤의선의 아들 용구는 문과하여 이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내며 이 때 이 집이 한창 꽃이 폈다.
그러나 의정대신을 6회나 지내며 국정을 돌보던 윤용구 집에 비극이 찾아왔다. 윤용구 손자 윤택영의 딸이 순종의 계비가 되면서 이 집에 큰 오욕이 넘쳤다. 이 순정황후 윤씨는 조선조 멸망의 한가운데 선 황후가 되었으며, 황후의 아버지 택영과 큰아버지 덕영은 둘 다 일본 정부가 주는 작위를 받아 씻지 못할 오욕을 이 가문에 남겼다.
해평윤씨 오욕과 영예가 변화무쌍 !
부마 윤신지의 종제[4촌동생] 동지중추부사 윤취지 현손 득우가 문과장원하여 예조참판을, 그 아들이 역시 문과하여 교리를 지냈을 뿐 200여년이 넘게 한미하기만 하던 이 집안에 오욕과 영예의 봇물이 함께 터졌다. 취지의 6대손 웅렬이 일본정부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와 큰아버지에 이어 몰아닥친 재앙이다. 빛나는 해평윤씨 윤변 가문을 어둡게 한 3대 재앙의 하나이다.
윤웅렬은1840년에 태어나 철종7년 무과에 급제하여 남양부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형조판서, 법부와 군부의 대신을 지냈다. 그 아들이 애국가를 작사한 윤치호이다. 서재필,이상재,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그 뒤 변절하여 친일파로 지탄을 받았다. 그 아들 영선은 농림부장관, 치호의 동생 치왕은 육군 소장이 되었다. 윤웅렬의 동생 영렬은 육군참장, 그 아들 치오는 학부국장, 그 아들 일선은 서울대총장, 그 아들 석구는 교수에 박사,석구의 동생 탁구는 원자력병원장[박사],탁구의 동생 종구는 서울의대 교수에 박사가 되었다. 윤웅렬의 아들이자 치오의 동생 치소 집에 대통령이 나왔다. 치소의 아들 보선이 대통령, 그 동생 원선이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치소의 동생 치명의 아들 유선이 한양의대 병원장, 치명의 동생 치영이 5선 국회의원에 내무장관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이 집안의 오욕과 영예의 상관관계는 서울 지하철 노선도보다 더 복잡하다. 영욕의 변화가 백두산 정상의 급변하는 기온보다 더 심하다. 조선조 500년 역사상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해평윤씨 윤현 집
윤현 집은 글하는 집이다. 윤현은 문과하여 지제교를 지냈으며 배위는 열행으로 정려가 내렸다. 윤현의 아들 기지 또한 효행으로 정려가 내렸으며 기지의 동생 열지는 시집을 남겼다. 열지의 후손에서 선비들이 나왔다. 아들 곤, 미가 둘 다 유집이 있고, 곤의 손자 협이 시집을 남겼다. 미의 아들 성로가 유고가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미의 후손 득복, 규동 모두 유고가 있다.
오늘날 사회 활동하는 이로는 협의 후손에 총무처 부이사관 무섭, 각동의 후손에 한국방송공사 차장 기로, 득복의 후손에 교장 정로, 정로의 아들 외환은행 차장 우진, 우진의 동생 한국종합긍융 과장 형진이 있다.
해평윤씨 윤이지 집
형조판서 정효공 윤이지의 아들 게, 점, 개 중 끝에 개만이 문과하여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을 뿐 게와 점은 포의로 일생을 끝냈다. 여기서 보듯이 판서의 아들도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문중을 연구해보면 상신이나 육조 판서의 아들 손자가 오히려 지지부진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큰 나무 밑에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고 하였다.
윤이지의 아들, 손자, 증손, 현손, 고손들의 사회적 활동이 미미하다가 6대손 "열"자 항렬에 이르러 활동이 왕성해졌다. 윤석렬 문과 교리, 윤홍렬 문과 공조판서 시호 경헌, 윤승렬 문과 대사헌, 윤우열 문과 병조참판으로 왕기가 솟아났다. 공조판서 경헌공 윤홍렬의 아들 치성이 문과에 이조참판, 윤치성의 손자 대에 이르러 다시 재상이 나왔다. 바로 윤정구이다. 윤정구는 문과하여 대사헌,대사성을 거쳐 1892년 강계와 성천의 안핵사로 나갔다. 그 뒤 춘천부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고 의정부 찬정에 이르렀다. 정구의 6촌 만구는 문과하여 지평, 승렬의 후손 하영은 문과하여 비서원승이 되었다.
윤이지 집에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선비로는 윤이지,형,홍렬, 치성, 치헌, 하영, 보섭, 택동, 양동, 노동, 취동, 희동이 있다.
해평윤씨 윤순지 집
윤순지는 1591년에 태어나 1666년에 몰했다. 자는 낙천, 호는 행명재이다. 1620년 문과하여 검열을 거쳐경연관을 지냈다. 1654년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와서 양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 사, 서, 율에 뛰어나고 겸손했다.
대제학 윤순지의 집도 아들, 손자, 증손 대에는 이렇다할만한 활동이 없었다. 현손 대에 이르러 조정에 출사가 활발해졌다. 득성은 문과장원 형조참판, 득맹은 문과 대사간, 득양은 문과 우참찬, 득훈은 문과 한성우윤을 지냈다. 형조참판 윤득성의 손자 익렬은 문과 예조참판, 익렬 후손에 승구는 문과장원 부승지, 승구 아들 달영은 문과 첨사, 달영의 동생 덕영은 문과 비서원승을 지냈다.
대사간 득맹의 아들 서동은 문과 이조참판, 득맹의 조카 익동은 문과 교리, 우참찬 득양의 손자 풍렬은 문과 병조참판, 풍렬의 아들 치성은 문과 대사성, 득훈의 당질 상동은 문과 대사간을 지냈다.
현대 인물로 형조참판 득성의 후손에 2대 국회의원 윤기섭, 예조참판 익렬 후손에 투자신탁 부장[계리사] 윤갑로, 한성우윤 득훈의 형 득문의 후손에 서울농대 학장 윤병섭, 한성우윤 득훈의 동생 득언의 후손에 서울대 교수[박사] 윤명로가 있다.
해평윤씨 윤의지 집
윤의지는 대제학 윤순지 동생이다. 윤의지와 그 아들 연과 증은 포의로 일생을 마쳤다. 연의 아들 세희는 문과하여 지평을 지냈다. 이 윤세희의 아들 대에 이르러 특색 있는 두 인물이 났다. 유와 순이다.
윤유는 1718년 문과하여 6조 판서를 지냈다. 신임사화를 일으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동생 윤순은 호가 백하이며, 1713년 문과하여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조선 후기에 제일 가는 명필이다. 백하 문하에서, 독특한 서체[원교체]로 유명한 이광사가 배출되었다.
윤유의 아들 득운은 시집을 남겼고 득운의 동생 득재는 문과하여 이조판서를 지냈다. 득운의 손자 욱렬은 1804년 무과에 급제하여 1811년 홍경래난 때 함종부사로 박천 송림과 곽산 등지에서 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전공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숙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이조판서 윤득재 손자 정렬은 문과하여 호조참판을 지냈다. 대제학 윤순의 아래 3대는 내리 지방관에 그쳤다. 현대 인물로는 윤순의 종조부 증의 후손으로 대전고 이사장 윤흥섭이 있다.
해평윤씨 윤계 집
영의정 윤두수의 아들 휘지[형조판서],휘지의 아들 면지, 면지의 아들 계의 집은 대를 이어 왕기가 성한 집의 하나이다. 왕기라는 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3,4대를 지속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그럼에도 이 윤계 집은 그 변덕스런 왕기가 6,7,8대를 두고 힘차게 뿜어져 나왔다. 이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윤계는 1622년에 태어나 1692년에 몰했다. 자는 태승, 호는 하곡이다. 1662년에 문과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지냈다. 조정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시호는 익정이다. 윤계의 아들 세기와 세수가 아버지의 기운을 받았다.
익정공 하곡 윤계의 아들 세기와 그 자손이 아래와 같이 현달했다.
아래
윤세기 문과 병조판서 시호[효헌], 윤세기의 아들 식 시집, 식의 아들 득경 문과장원 교리,득경의 아들 문동 문과장원 형조참판, 문동의 손자 치용 공조판서 시호 효헌, 치용의 동생 치정 문과 이조판서 시호 문정,치용의 아들 우선 문과 이조판서, 치정의 손자 길구 문과 예조참판 익정공 하곡 윤계의 아들 세수와 그 자손이 아래와 같이 현달했다.
아래
윤세수 문과 관찰사, 세수의 아들 섭 문과 부사, 섭의 동생 흡 도호부사, 흡의 동생 급 문과 이조판서 시호 문정, 섭의 손자 시동 문과 우의정 시호 문익, 시동의 종손자 치담 문과 이조참의, 흡의 후손 우석 문과 도정, 급의 아들 득의 문과 대사간, 득의 증손 치성 문과 이조참판
해평윤씨 좌의정 윤두수의 선견지명 Writer 한국명문
한양에 입성한 왜군이 선조가 머무는 평양성을 공격해오자 조정은 몹씨 다급해졌다. 선조는 연안에 귀양가 있는 윤두수를 급히 불러 올렸다. 윤두수가 어전에 불려오자 임금은 " 경이 난국을 풀어나갈 재주가 있어 특명으로 부른 것이요. 짐의 뜻을 저버리지 마시요."라고 말하며 허리에 차고 있던 곱게 수놓은 주머니를 주었다.
신각은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부원수로 임진에 있을 때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 나가 남병사 이혼과 합세하여 양주 해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때 신각은 혼자 적의 머리를 70급을 베었다. 임진왜란 초기의 처음 가는 큰 승전이었다. 이양원이 험지에 있어 조정과 연락이 끊겨 상황 보고가 제때 이러어지지 못했다. 신각이 김명원 진영으로부터 이탈, 군명을 어겼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이 때 우의정 유홍은 신각의 참수를 주장하였다. 윤두수는 " 오늘의 국난에 신각 같은 유능한 장수를 벤다는 것은 국가의 큰 손실이오
니 파직을 시켰다가 나중에 다시 쓸 수 있도록 함이 가하다."고 호소했다. 윤두수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각을 처형하라는 어명이 내려갔다. 그 뒤 유도대장 이양원의 승전 장계를 받은 임금이 놀라 그를 죽이지 말라고 선전관을 뒤따라 보넀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이 때 평양성이 위급해졌다.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함흥으로 가자는 조신들의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덕형은 "함경도는 군사가 많고 군량도 많아서 왜적을 막아내기에 적합합니다."고 하였다. 심충겸도 "함흥은 길이 험악하고 궁벽하여 왜적이 감히 침범할 수 없습니다."고 이덕형 편을 들었다. 이항복은 "여러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은 전장에서 늙어온 장수 이일의 의견을 들었다. "전하, 함흥성은 평양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험하고 튼튼합니다.고 이일이 고하였다.
좌의정 윤두수는 함흥성은 크기만 하고 성곽이 낮으며 사방이 험한 곳이 없어 방어하기가 어려우니 의주로 가자고 간청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그 뒤 함흥성이 함락되었어도 임금은 안전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윤두수의 선견지명에 대해서 탄복하였다.
윤두수는 평소에 봄바람이 돌듯 따뜻하면서 평화로왔으나 큰일을 당하여서는 단호하였으며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유성룡, 이덕형, 이항복과 함께 국난 극복에 크게 공헌한 명재상으로 해평윤씨 윤변 가문이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해평윤씨 백발을 휘날리며
기로소란 정2품[판서급] 이상의 현직에 있는 고위 관료가 70세를 넘으면 경로의 예우로 참여시킨, 국가 차원의 경로당과 같은 친목기구이다. 임금도 참여하였으며 법제화되어 관청 서열 제1위로 존엄성이 있었다.
해평윤씨 윤변 가문은 상신과 요직에 있는 판서급 인물 약 27명 중 10명이 기로소에 들었다. 반남박씨 야천 가문이 기로소에 든 인물이 몇 손가락 겨우 꼽을 정도이며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해평윤씨 가문은 장수를 하는 집인 것 같다. 아래에 판서급 이상으로 해평윤씨 윤변 가문의 27명, 반남박씨 야천 가문의 35명,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의 32명의 성명과 관직, 수명을 기록하였다.
아래
해평윤씨 반남박씨 여흥민씨
윤두수/영의정/68------- 박세채/좌의정/64-------- 민정중/좌의정/64
윤방/영의정/77/기로소------박응순/국구/54-----------민유중/국구/57
윤시동/우의정/68-------- 박종악/우의정/60---------민진장/우의정/51
윤용선/총리대신/75-------- 박종훈/좌의정/67------- 민진원/좌의정/72
윤신지/도총관/75--------- 박회수/좌의정/75---------민응수/우의정/66
윤의선/판돈녕/64--------- 박규수/우의정/67---------민백상/우의정/50
윤흔/지중추/74/기로소----- 박정양/총리대신/64-------민규호/우의정/42
윤휘/형판/73/기로소------- 박태항/형판/90-----------민진주/이판/54
윤이지/형판/89/기로소------박필주/이판/68-----------민진후/예판/61
윤해/호판/70--------- 박동선/병판/78-----------민백흥/에판/59
윤세기/예판/65----------- 박동량/형판/66-----------민치성/예판/80
윤유/이판/63----------- 박황/병판/51-------------민종현/이판/53
윤급/이판/73/기로소------ 박세당/이판/73-----------민태혁/예판/60
윤득제/이판/61----------- 박태정/도총관/48---------민명혁/예판/65
윤득양/우참찬/57--------- 박태순/형판/51-----------민치구/공판/79
윤홍렬/공판/73/기로소------박사익/예판/61-----------민치서/공판/72
윤득규/도총관/85/기로소----박사수/호판/53-----------민영위/이판/68
윤치겸/우참찬/81---------- 박종덕/이판/55-----------민치상/형판/56
윤치희/공판/73--------- 박준원/형판/70-----------민영목/이판/58
윤치용/공판/73----------- 박종갑/형판/57-----------민두호/찬정/73
윤치정/이판/65---------- 박종래/이판/85-----------민세호/공판/89
윤우선이판/77/기로소------ 박윤수/이판/71-----------민영상/이판/72
윤정구/찬정/62----------- 박종보/호판/47-----------민승호/병판/44
윤용구/내무대신/85------- 박종경/이판/52-----------민겸호/병판/44
윤근수/대제학/79기로소---- 박기수/이판/71-----------민응식/이판/59
윤순지/대제학/75/기로소----박주수/예판/49-----------민정식/판윤/66
윤순/대제학/61----------- 박기수/형판/55-----------민영익/병판/54
--------------------- 박원양/공판/80-----------민병한/찬정/73
------------------- 박제소/형판/67-----------민영철/군부대신/47
------------------- 박제헌/공판/55-----------민태호/이판/5
--------------------- 박제인/이판/66-----------민영달/형판/65
--------------------- 박선수/형판/71-----------민영환/병판/44
--------------------- 박제경/이판/80
--------------------- 박제관/이판/62
--------------------- 박태상/이판/60
위에서 세 가문의 상신과 판서급 고위 관료의 수명을 살펴보았다. 반남박씨는 40대에 세상을 떠난 이가 3명, 50대에 세상을 떠난 이는 9명이다. 여흥민씨는 40대에 세상을 떠난 이는 5명, 50대에 세상을 떠난 이는 11명이다. 반남뱍씨와 여흥민씨 두 가문에서 40대와 50대에 세상을 떠난 이를 합치면 28명이다. 두 가문 상신과 판서급 고위 관료 67명 중 거의 반에 육박하는 28명이 4-50대에 별세했다.
관운은 복 중에도 큰 복이다. 관운보다 더 큰 복은 수명이다. 하늘은 수복을 좀처럼 함께 주지 않는다. 관운이 있으면서 오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위에서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해평윤씨 가문의 고위 관료는 관운이 좋으면서 모두 오래 살았다. 환갑 전에 세상을 떠난 이가 하나도 없다. 평균이 70세가 넘었다. 이것은 네 가문이든 내 가문이든 경하할 일이다.
해평윤씨 명필이 수두룩
명필 추사 김정희 집안의 파조라 할 수 있는 김호윤 가문과 총리대신 김홍집 집안의 파조라 할 수 있는 김만균 가문이 경주김씨의 2대 명문이라 할 수 있다. 김호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은 영의정 정헌공 김흥경이다.
영의정 김흥경의 손자 김이주는 문과에 병조판서를 했다. 이주의 아들 노영은 문과장원 예조참판, 노영의 동생 노경은 문과에 이조판서를 했다. 추사 김정희는 이조판서 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예조참판 노영에게 입양 계대하였다. 추사는 이와 같이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추사는 역대 명필의 장점만 골라 독창적이고도 뛰어난 글씨를 써서 한, 중, 일 삼국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 경주김씨 김정희를 비롯하여 청주한씨 석봉, 양천허씨 목, 전주이씨 안평대군과 같이 명필을 낸 가문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해평윤씨 한 가문에만도 명필이 많이 나왔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명필로 백하 윤순을 들 수 있다. 백하는 대제학 윤순지의 종증손이며, 이조판서 윤유의 동생으로 역시 대제학을 지냈다. 백하는 정제두의 문인이다. 정제두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조선조 양명학을 처음으로 연구 발전시켰다. 백하는 정제두의 동생 광주부윤 정제태의 사위가 되었다. 백하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서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조선조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의 한 사람이다. 왕희지,동기창, 미불 등의 글씨체를 섭렵하여 한국적인 서풍을 일으켰다. 특히 행서가 아름다왔다. 영의정 홍서봉, 좌의정 이 태좌, 종증조 대제학 윤순지 등의 묘비와 묘표를 썼다.
대제학 윤근수는 호가 월정이다. 월정은 문장은 말할 것도 없고 글씨가 뛰어나 당대의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글씨는 "영화체"라 하여 격찬울 받았다. 이조판서 윤급은 호가 근암이다. 근암 역시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라는 독특한 서풍을 이룩하여 그 성망이 높았다.
이 집안은 이 이외에도 명필이 수두룩하다. 영의정 윤두수, 부마 윤신지, 형조판서 윤휘, 이조판서 윤유, 이조판서 윤치정, 찬정 윤정구, 내무대신 윤용구, 대제학 윤순지, 예조참판 윤지, 예조참판 윤득화.... 모두 해평윤씨가 자랑하는 명필이다.
해평윤씨 한말 의사 윤용구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한국인으로 일본제국 주의 정부의 귀족 77명이 탄생했다. 매국의 대가로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6명[추가1명] 도합 77명이 일본 귀족이 되었다. 이 77명 중에서 독립의사가 12명 탄생했다. 이 중에서 작위를 물리친 사람이 8명, 독립 운동을 하여 실작된 사람이 4명이다. 그 12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안동김씨 석진, 여흥민씨 영달, 임천조씨 경호, 기계유씨 길준, 풍양조씨 정구, 남양홍씨 순형. 청주한씨 규설, 해평윤씨 용구[이상 8명]
안동김씨 가진, 청풍김씨 윤식, 연안김씨 사준, 한산이씨 용직[이상 4명]
이 명예로운 명단에 오른 윤정구는 일찌기[1871년] 문과하여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탁지부, 법부, 내무부의 대신 등에 십수회 벼슬이 내렸어도 나가지 않으면서 서울 근교 장위산 아래 숨어 지냈다. 나라가 망하고 남작이 수여되었으나 뿌리쳤다. 한일합방시 작위를 물리친 8대 의사와 독립운동으로 실작된 4대 투사의 뜻이 그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온갖 부귀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우리의 영원한 님들이 이닌가? 이 8대 의사의 하나인 석촌 윤용구는 해평윤씨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어느 대목인가에서 심판할 때 의인이 십 명 가까이만 있어도 구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듯이 나라가 망할 때 의인 열둘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나라에 산다는 의식을 일깨워 주는 의미 깊은 숫자라 할 수 있다.
일제가 만들려던 매국노 77명 중 의인 12명은 15%의 비율이다. 오늘날 한국민의 4-5%에 해당하는 소수 대재벌이 한국의 부를 거의 차지하고서도 건전만 하면 자본주의 국가가 굴러 간다. 4-5%도 그러한데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조 명문들의 15%가 일제의 총칼로도 무찌를 수 없는 철옹성 이었다. 국가는 일시적으로 망해도 우리 국민은 영원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쇠망했어도 조선 명문은 건전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