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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만 개방한다는 지리산 도솔암을 가보기위해 길을 나선다. 금요일날 시중산악회 홈페이지에 7암자순례길 예약할려고 홈피 들어가보니 마감되어 자리가 없띠만 토요일날 혹시나 싶어 홈피 들어가보니 누군가 취소를 했는지 예약이 되었다. 05:30집 출발 만촌역4번 출구로 간다. 아내가 차태워줬다. 함양삼산골 휴게소 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산행출발위치인 음정마을에 08:40분쯤 도착한다. 곧바로 준비하여 산행 시작한다. 작전도로로 약2km쯤가서 오른쪽으로 직등입산한다. 이 후 계획대로 도솔암, 영원사, 삼정산,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 이렇게 진행한다.
음정마을 산행시작(08:43)
마기목열매가 많이 열렸다.
여기서 산길로 들어간다.(08:48)
작전도로 차량출입통제(09:07)
옆으로 돌아 간다.
이위치 작전도로에서 우틀 산속으로 들어간다.(09:26) 과거에는 여기도 등산로였다고 오늘 인솔자가 알려줬다. 희미한 흔적은 있어보인다.
저리 올라와서 작전도로를 횡단하여 위로 계속가면 도솔암으로 이어진다.
도솔암 스님께서 우물가에 나오셔서 물을 떠서 방문객한테 주신다.(10:10)
우물
도솔암(10:13)
* Ai에 물어본 도솔암
지리산 **도솔암(兜率庵)**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산 능선(해발 약 1,200m)에 위치한 유서 깊은 암자입니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수행 도량인 '지리산 칠암자(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 중 첫 번째로 꼽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도솔암의 역사와 연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청매 선사의 수행처 (조선 시대)
도솔암은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약하고 지리산 일대 사찰을 중건한 **청매 선사(靑梅 禪師, 1548~1623)**가 은거하며 가부좌를 틀고 치열하게 수행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본래 인근의 큰 고찰인 영원사(靈源寺)에 속한 부속 암자(속암)로 출발했습니다.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맑고 빼어난 맛의 샘물이 흐르는 터로 수행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2. 근현대 수난과 소실 (한국전쟁)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6·25 전쟁)을 거치면서 지리산 일대가 빨치산과 토벌대의 격전지가 됨에 따라, 작전상의 이유로 영원사를 비롯한 삼정산의 암자들이 대부분 불타 없어지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이때 도솔암 역시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한동안 터만 남은 폐허로 방치되었습니다.
3. 현대의 중건 (1980년대)
오랫동안 잊혔던 도솔암은 1985년 무렵, 정견 스님이 그의 스승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혜암 스님을 모시고 오면서 다시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법당에 걸린 '도솔암' 현판 글씨 역시 혜암 스님이 직접 쓴 것입니다. 본래 영원사의 부속 암자였으나 현대에 들어와 해인사의 말사로 독립하여 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도솔암
전기가 잘 닿지 않는 해발 1,200m의 첩첩산중에서 스님들이 홀로 은둔하며 자급자족하는 참선 수행 도량의 가풍을 엄격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암자 앞마당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쾌한 조망을 자랑하지만, 현재는 국립공원 비법정 탐방로(비탐 지역)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 년중 부처님오신날 하루만 일반인 출입허용
저기물길은 자연적인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공양 후 그릇 세척하는 장소로 사용되고있었다.
도솔암에는 연등이 달려있다.
도솔암 마당에서 천왕봉 방향~~~
셀카도 한컷 남기고...
도솔암에서 내려서면서(10:22) 이런 안내판이..
영원사(10:49)
백초월 스님과 영원시
영원사 출신인 백초월 스님은 대한민국 독립운동 사에 큰 공적을 남긴 불교 독립 운동가이시다.
초월스님은 경남 고성군 영오면에서 1878에 출생하셨는데, 14세의 나이로 이곳 영원사로 출가하셨다. 해인사의 강원 선원에서 수학을 하셨으며, 지리산 일대의 의병할동을 지켜보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셨다. 30대 초반에 영원사 조실 .강백 이셨고, 범어사와 해인사의 강사를 역임하셨다. 그리고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학림의 불교 강사로 내정될 정도로 당시 최고의 강백이셨다
1911년 이곳 영원사가 화재로 전소되자, 영원사 주지로 재건불사(1914~1917)를 주관 하셨다. 그 이 후에는 용화사(법주사 청주 포교당)에서 포교에 전념하셨다. 이때, 3.1운동 (1919)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서울로 올라가 진관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불교계 민족대표이셨던 백용성스님과 한용운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시자, 초월스님은 중앙학림에 불교의 독립운동본부(민단본부)를 두고 학인스님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 하셨다.
천은사, 화엄사, 통도사, 범어사 등에서 모은 독립자금을 상해의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 제공하셨고, 불교청년들을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군에 보내셨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일제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결코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다. 초월스님은 .출옥하신 이후, 불교사상에 근거한 일심교(-D)라는 항일 결사단체를 만드셨고, 동학사, 월정사. 봉원사에서 강사를 하시면서 스님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셨다. 1939년 10월. 용산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낙서를 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동안 수감되셨는데, 출옥한 후에도 독립자금을 모금하시다 청주감옥에 수감되셨고, 안타깝게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6월 29일, 옥중 순국하셨다. 초월스님은 입적하신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던 참다운 보살, 큰스님 이셨다.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진관사 칠성각 보수를 하다 초월스님이 사용하신 태극기와 독립운동자료가 발견되면서, 초월스님의 독립운동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초월스님에 대한 연구와 선양사업이 시작되었다. 2016년 11월 17일, 진관사에서 3개 자치단체인 고성군(옥천사,출생), 함양군(영원사,출가), 은평구(진관사, 독립운동)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백초월스님 선양사업을 공동으로 추진
지리산영원사
영원사는 상당히큰절인데 연등이 없었다..
영원령(빗기재)으로 올라가는 길(11:01)
빗기재(11:23)
간간이 지리산 천왕봉을 조망하면서 진행한다.
삼정산(11:53)
1. 이름의 유래
산 아래에 있는 세 개의 '정' 자가 들어가는 마을, 즉 하정(下丁)·음정(陰丁)·양정(陽丁) 마을을 품고 있다고 해서 **삼정산(三丁山)**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현재도 지리산 벽소령이나 영원사로 향할 때 이 마을들을 거쳐 가게 됩니다.
2. 최고의 지리산 '북사면' 전망대 남쪽에 삼신봉이 있다면, 북쪽에는 삼정산이 있습니다. 삼정산 능선에 올라서면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 사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하봉에서부터 중봉, 천왕봉, 제석봉, 세석, 벽소령,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장엄한 하늘금(스카이라인)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명소입니다.
도솔암 (해발 약 1,160m): 청매 선사의 수행처이자 천왕봉 조망이 가장 빼어난 곳.
영원사: 신라 시대 창건되어 한때 100칸이 넘었던 큰 절이자 고승 109명이 수행한 곳.
상무주암: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음을 얻고 머물렀던 절벽 위 암자.
문수암: 암자 뒤편에 임진왜란 때 주민들이 대피했다는 '천인굴'이 있는 곳.
삼불사: 삼정산 능선 중 아늑한 터에 자리 잡은 참선
도량.
약수암: 늘 맑은 약수가 솟아나며 보물(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간직한 곳.
실상사: 평지에 자리 잡은 단아한 고찰로, 칠암자 순례길의 마침표를 찍는 곳.
스틱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올라 왔다.
지리산 천왕봉에 구름이 걸쳐있다.
상무주암(12:06)
고려후기 승려 보조국사가 수행승들과 함께 창건한 암자 라고 한다
문수암(12:26)
삼불사(12:45)
삼불사에서 100m내려오면 약수암, 도마마을 갈림길이 나온다.(12:53)
여기서 고민을 했다. 도마마을3.2km를 내려갔다가 약수암으로 올라올지 약수암으로 바로갈지, 삼정산 인증때문이었다. 등산로에 사람이 너무 많아 복잡하고, 시끌시끌하기도하고 시긴적 여유도 있고 해서 홀로 퍼뜩 내려가서 함양방문인증(도마마을주차장)을 하고 진행하기로 맘 먹는다.
급내리막을 거의내려오니 저런 비석이있다. 850m거리 급경사 돌길을 14분 소요 내려왔다. (12:07)
멋진별장이 나오면 산길은 끝이다.(13:20)
도마1교(13:35)
여기는 오르go함양 함양방문인증을 위해 내려왔다. 삼불사에서 3.2km라고 이정표가 있고,
45분소요되었다.
여기 약수암까지 올라오는데 도마마을을지나 농지끝나는 지점에서 입산 마구잡이로 올라가다가 등산로를 만나 힘들게 약수암에 이른다..(14:20)
약수암
실상사(15:00)
○ 실상사홈페이지자료
구산선문 최초가람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 (萬壽川)변에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상사의 역사 개관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스님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스님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826년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선강태자(宣康太子)와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산파 (實相山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1586년 지리산을 다녀간 양대박은 『두류산기행록』 에서 “ 절은 폐허가 된 지 1백년이 지나,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 있고, 철불이 석상(石床) 위에 우뚝 앉아있었다"라고 실상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로 봤을 때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 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가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또는 1934년) 홍수 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 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찔레꽃이 붉은것도 있다.
노래가사에 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