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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과 겨울에 이어 이곳 소백산 비로봉은 나에겐 벌써 세번이라는 의미 깊은 산행이 된다.
불가에서 비로자나불은 일명 노사나불이라고도 하는데 법 즉 진리를 부처화한 법신불로서 수인 (손모양)은 두손을 움켜 쥐 듯한
형태의 지권인을 하고 계시는데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과 그 아래에 위치한 비로사의 명칭은 아무래도 이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부터 유래된 듯 하다.
혀를 길게 빼 물고 죽을 힘을 다하여 비로봉에 도착하니 정상석 주위에는 인증샷을 찍을려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느림보님들로
그 아름다움이 온통 가득하다.
혹여 렌즈에 피사체로 잡힐까 우려되어 황급히 비로사로 하산하는 길목, 철쭉 군락지 속으로 몸을 숨겨 버렸다.
함께 산행을 하시는 벗님들이 가끔 나에게 물어 본다. 왜 산에 와서 사진을 찍지 않느냐는 것이다. 오직 죄 없는 술만 쳐 먹고.
물론 나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다.
난 젊은 시절 어둠 속의 킬러란 암호명으로 전세계를 누비며 활약하던 첩보원 이었을 뿐 아니라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론 청부업을
주로 하는 해결사 노릇을 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로 인해 모진 봉변을 당했던 적색국가의 정보원들이
끊임없이 내 동선을 찾아 눈을 부라리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산악인인 느림보님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가 크게 다치는 경우를 가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하다.
잠시 비로사가 위치한 남녘땅을 내려다 보노라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고향땅 어느 양지 바른 곳에 고요히 누워 계시는 어머님
생각이 간절하다.
안주머니를 뒤져 1951년 6월 10일자 소인이 찍힌 빛 바랜 편지 봉투 한장을 꺼내 든다.
용늪과 광치 계곡의 순수 원시림이 유명한 이곳 양구 대암산 북사면 7부 능선에서, 퇴각하는 미 해병사단의 옆구리를 우회
공격키 위해 최정예 2개 사단을 집결 시킨 중공군 쨩꼴라 개새끼들과 사투를 벌인 지도 무려 닷새째가 된다.
대암산 방어를 맡고 있는 우리 부대가 무너지면 미 해병사단은 전멸하고 만다.
죽음으로 고지를 사수하라는 엄명이 떨어진 터라 이미 실탄을 비롯한 여러 전투 보급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지도 오래여서
하루 한끼 물을 부은 건빵과 몇 모금의 미숫가루로 주린 배를 채우며 악전 고투하고 있다.
잠시 전투가 소강 상태를 보이는 오후 시간에 참호 속에서 소총을 부여 안고 잠시 졸고 있노라니 남쪽 능선길로 한복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린 민간인 몇 사람이 무거운 지게를 지고 올라 오는 것이 보인다.
지게 위에는 메밀꽃 보다 더 눈이 부시게 흰 주먹밥이 그득하게 실려져 있다.
중대 서무계원이 참외 보다 더 큰 주먹밥 두 덩어리와 함께 자랑스런 내 아들 육군 이등중사 돌삐 보아라고 하시는 어머님의
군사 편지를 채 뜯기도 전에 쏟아져 내리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까막눈인 어머님이신지라 이웃마을 박 참봉 어른이 대필해 주신 한 통의 군사우편을 끝까지 읽어 내리는데 무려 네시간이 걸렸다.
너를 태우고 매정하게 떠나 버린 군용 트럭의 뿌연 먼지가 가라 앉고 또 가라 앉고서도 이 애미는 동구 밖 정자나무 아래 털석
주져 앉아 해가 저물도록 울다가 네 큰누나 등에 업혀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 왔다.
한동안은 무슨 빽을 썼는지는 몰라도 멀쩡한 사지 육신을 가진 면장과 양조장집 아들들이 가라는 군대는 가질 않고 읍내 다방이나
들락이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한편으론 부럽기도 또 한편으론 밉기도 하였지만 양구 일원에 있는 펀치볼과 도솔산 전투에서 용맹
무쌍 하게 적과 싸워 일계급 특진과 함께 내 자랑스런 아들이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에미가 비록 청상과부가 되어 일평생을 땅만을 파 먹고 사는 무지렝이 이지만 전란에 휩 싸인 나라를 구하고져 한 몸을 애끼지
않은 내 아들 돌삐를 생각하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
난 매일 밤이면 뒷뜰 장독대 옆에서 냉수 한사발 정성스레 올리고 두손 모아 천지 신명께 자랑스런 내 아들 육군 이등중사 돌삐가
부디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무사 귀환하기만을 빌고 또 빈다.
그리고 네 장가 밑천할려고 사 두었던 암소가 지난 봄에 쌍둥이 낳아서 그 재롱이 여간 곱지가 않다.
그리고 힘든 농사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다리꺼리에 사는 떡순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집을 찾아 와서 여러모로 나를 잘 보살펴 주고 있다.
난 이미 오래 전에 떡순이를 내 며느리감으로 마음속으로 점지해 두었다.
낯짜기에 박하분이나 쳐 발르고 읍내를 싸 돌아 댕기면서 꼬리나 치고 다니는 점례같은 년 보단 엉덩이가 펑 퍼짐하여 떡뚜꺼비
같은 손주놈 쑥 쑥 잘 뽑아 올리는 떡순이가 아무렴 백번 낫다.
언능 제대하고 돌아 와서 여름이면 콩밭에서, 가을이면 뽕나무 밑에서 슬쩍 함 자빠뜨려 버리면 만사 오케이 아니겠니?
호옥 겨울철에 제대를 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론 우리같은 촌구석에 모텔같은게 없어서 걱정이라고?
염려허덜 마라. 소싯적에 니 애비가 나한테 주로 써 먹던 숫법이 있다.
뒷뜰에 둘 둘 말아 놓은 멍석이 있지않니
두 년놈이 끼집어 들어 가면 춥지도 않은 뿐 더러 방음 효과가 있어 웬만큼 소리 질러도 옆집에선 들리지도 않는다.
마지막 남은 한덩이 주먹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니 중대장님께서 전 중대원을 집결시키시곤 힘들게 구해 오신 막소주를
한댓병 꺼내, 반합 뚜껑에 그득하게 부어선 한사람 한사람에게 정성스레 돌리시며 오늘 야간전투엔 아무래도 아무래도
사단 포병 사령부에 진내 사격을 요청할 예정이라신다.
전체 중대원이라고 해 봐야 이미 반 이상이 전사를 했으며 그 남은 반도 대부분 부상을 당한 상태이다.
진내 사격이란 적의 공격으로 아군 진지가 무너져 함락의 위기에 쳐 했을 경우에 아군의 포로 아군의 진지를 포격하여 밀려 들어
온 적과 함께 공멸하는 최악의 방어 수단이다.
어머님 생각과 함께 남들이 흔히들 말하는 총각 딱지 함 떼 보지 못하고 몽달 귀신 신세가 된다고 하니 잠시 콧등이 찡하다.
방앗간집 아들넘이 함 해 봤다고 사흘 밤낮을 자랑스레 떠들고 다니던 그 빠 멋인가 하는 것 나도 함 해 보고 군대 올껄 하는
생각만 간절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하는 쌍욕 중에 빠X리 란 말이 있다.
조선일보에서 오랜 필명을 날렸던 칼럼리스트 이 규태 선생의 글을 보면 이 말은 이성과의 두꺼비 맘보춤이 아니란 것이다.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던 말로 버클리라고 하는데 이성 교제가 몹시 어려웠던 조선 사회에서 총각이 총각을 어쩌구 저쩌구 하는
영어론 애널이라고 표현하는... 좌우간 이만하고.
칠흑같은 그믐밤이라 지척을 분간키가 어려운 새벽 두시경이 되니 꽹과리와 피리를 요란하게 불어 대는 쨩꼴라 넘들이 불개미
처럼 새카맣게 밀려 온다.
애인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하는 엠원 소총만을 부여 안고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노라니 갑자기 화기 중대 60밀리 박격포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이 온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며 마치 폭죽 놀이를 하는 듯 하다.
적의 선발대가 아군 진지 코 앞에 올 때 까지 우린 미동도 않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는데 갑자스레 타 타 타 하는 엘엠지(소대
경기관총) 가 불을 뿜기 시작함과 동시에 소대장님의 일제 사격 명령이 떨어 진다.
총구가 벌겋게 달아 오를 때 까지 우린 쏘고 또 쏘았다.
소대 전령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황급히 소리 친다.
곧 이어 진내 포격이 떨어 진다는 소리를 듣자 말자 우리는 상부에 뚜껑이 있는 유개 벙커로 황급히 스며 들었는데 채 일분이
지나지 않아 대암산 후사면에 위치한 사단 포병 사령부 105밀리 곡사포에서 둥 둥 거리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를 간신히 쓸어 내리고 몸을 빠져 나오니 이미 오른팔에 적의 방망이 수류탄 파편으로 중상을 입으신
소대장님께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소리 치신다.
전 소대원들은 착검하라.
선지피가 엉켜 붙은 탄띠에서 대검을 꺼내 들어 엠원 소총에 착검을 하니 이어 최후의 돌격 명령이 떨어 진다.
마지막 남은 힘을 몰아 우리 전 중대원은 힘찬 함성과 함께 적의 아가리로 불사조처럼 용맹하게 뛰어 든다.
철모도 없이 달려 드는 빡빡머리 중공군의 대갈통을 개머리판을 후려 치니 허연 골수가 사방으로 삐져 나온다.
난 오직 살아서 돌아 가 어머님을 뵙고 그너무 원한의 총각 딱지나 함 떼 봐야 겠다는 일념 하나로 적의 몸통을 찌르고 또
찔르는데 오른쪽 허벅지가 절구 자루로 얻어 맞은 듯 하여 내려다 보니 이미 내 다리를 관통한 적의 창검이 벌건 혀 처럼
날름거림과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에 감각이 없어 진다.
흙구덩이 쳐 박힌 내 입가로 몽매이게 부르는 어머님 소리만이 가늘게 가늘게 이어 진다.
지난 여름에 올랐던 비로사 길로 오늘은 하산을 하게 되는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철쭉 숲 사이에 있는 자그만 공터에서
난 한참을 서성인다.
정상에는 그늘이 없다 하여 이곳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던 그 얼굴들과 그때 그 모습들이 활동 사진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 간다.
늘 그립고 보고 싶은 분들 이시다.
강 대장님,관주님,호랑이님,곰순님,태백산님
눈을 떠 보니 하얀 제복을 입은 간호 장교님이 내 두손을 부여 잡으며 눈물을 글썽인다.
후방에 있는 통합병원으로 후송된지가 벌써 한달이 넘었는데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며 오른쪽 다리는 완치가 되면 약간의 절룩임
만 있을 뿐이라며 안심을 시키신다.
본능적으로 한가지만 여쭈어 보았다.
가운데 토막은?
싱싱하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겨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는데 난 통합병원에서 무려 6개월을 재활치료를 받으며, 웃으실 때 송곳니
가 몹시도 예쁘시던 그 간호장교님께 여러 모로 많은 신세를 졌다.
어머님이 보내 주신 편지도 읽어 주시고 또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를 대필도 해 주셨는데 난 여러 날을 심중에만 두고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병원 내에 있는 산책로에서 내 휠체어를 밀어 주시던 그 간호장교님께 약간은 수줍었지만 끝내 하고 말았다.
저어어 간호장교님! 전 당신을 사모하고 있답니다 라고 하는 개뼊따귀 같은 소리가 물론 아니다.
집에 돌아 가서 멋지게 함 써 볼 예정이라며 여러 번을 간청했더니 간호장교님이 비번날을 택해 감사하게도 아무도 몰래 포경
수술을 해 주신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급하게 하시느라 꿰맨 자리가 약간은 너덜 너덜 했지만 히 히.
집으로 돌아 오니 이미 고무신을 꺼꾸로 신고 읍내에서 포목상을 하는 집꾸석으로 시집을 가 버린 떡순이년 얘기는 정말
생각 조차 하기 싫다.
군대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지는 노랫 자락 한토막만 간절히 생각난다.
논산 훈련소 제대를 하고 기쁜 마음에 집으로 오니 앞집 떡순이 뒷집 점례년
마음 변해서 시집을 갔네 이너무 마한년들 친정 오기만 해 봐라
새쪽에 팔뚝 같은 말X 나간다.
현충일은 공식 행사가 많아 우리 친구들은 해 마다 그날이 다가 오면 이 삼일 전에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를 찾는다.
이곳은 이름도 계급장도 없는 무명 용사에서 부터 대통령까지 저 마다의 애잔한 사연을 안고 고요히 누워,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시는 호국 영령이 되어서 우리를 수호해 주신다.
보병으로 근무하다 발목 지뢰를 밝고 김포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사고 당시 감염된 파상풍으로 끝내 순직하고만
최 성철과 포병 관측임무를 수행키 위해서 L-19 (정찰기)에 자원하여 몸을 싣고 포탄 탄착 지점을 유도하다 심한 비구름으로
시계 비행이 어려워 어느 이름 모를 고지 정상에서 조종사 홍 대위님과 장렬히 산화한 최 복남
이 작은 글은 나라를 위해 총각 딱지 함 제대로 떼 보지 못하고 그 아까운 몸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불 사른 두 전우에게
바쳐 올립니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입니다.
다음 산행은 양구에 있는 대암산 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피로 물 들었던 그날의 동족 상잔을 기억하며 경건한 마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암산이 있는 양구군 해안면의 지명은 돼지 해자를 씁니다.
뱀이 워낙 많아서 그런 지명을 도입했다고 하니 산행시 많은 조심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탄천변에서 예비역 육군 이등중사 돌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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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치 한편 전쟁드라마를 본듯 합니다..... 믿기로했씀다..캭캭..
전쟁 씬이 아주 극렬한...
가만보자..돌삐님이 말띠신데...그러면 1951년에는 키가 얼만 했을까
곰곰 생각해보다가
허벅지 부상을 그토록 심하게 당했으니..믿어야지요..
나라 위해 순국하신 우리의 호국 영령들께..진지한 마음으로 경례
돌삐님과 내가 띠동갑인데
이제 까지는 나보다 아래쪽 말띠인 줄 알았는데
중공오랑캐와 싸웠다니 내 윗쪽 띠동갑인가 보네요
아이구 깜짝이야 돌삐님이 1951년에 군장병
요것이 어찌된일인지
아하~~ 그랬군요. 돌삐 중사가 바로 2소대 소속이었다니~~!!
바로 내가 1소대 알오티시 소대장 아니었습니꺼~~~!!
양구 대암산 전투 지금도 기억이 생생~~~
이거 오랜 만에 60년 전 전우를 만나다니~~
아즉도 살아 있다니 참 시월이 무심코나~~~ㅠㅠㅠㅠ 이젠 구라도 몬치고 ㅋㅋ